2017년 6월 24일 (토)
(백)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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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1일(금) 교회학자 聖 안셀모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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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욱 [uiuihhh8] 쪽지 캡슐

2017-04-20 ㅣ No.11157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4월21일(금) 음3/25

교회학자 聖 안 셀 모

                                                    

                                          

                   
                                 
안셀모(4.21)

성인명

안셀모(Anselm)

축일

4월 21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대주교, 교회학자, 철학자

활동지역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1033-1109년

같은이름

안셀름, 안셀무스, 안쎌모, 안쎌무스



캔터베리의 성 안셀모(Anselmus)
     

           
     
            

        




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15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려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1056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Bourgogne)
공부하러 집을 떠났고, 1059년에는 노르망디(Normandie)의 베크(Bec)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수도원 원장은 란프랑쿠스(Lanfrancus)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1060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정식으로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1067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성 안셀무스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윤리 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박학다식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청년들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성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가 사망한 뒤 영국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에 의해
109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성 안셀무스는 이때부터 적지 않은 분쟁에 휩싸였다.
영국 국왕의 교회 직무에 대한 간섭에 반발하고 교황의 권위를 위해 투쟁하며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물론 다른 많은 주교들로부터도 배척을 받게 되었다.
안셀무스는 1093년까지 베크를 떠나지 않고
국왕 윌리엄 2세와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097년 영국을 떠나 로마로 망명을 갔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7월 29일) 역시 윌리엄의 요구를 반대하자,
윌리엄은 안셀무스를 유배시키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끝내는 안셀무스의 귀국을 허용하였다.

1098년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요청에 따라

성 안셀무스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성령을 두고 벌인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필리오퀘'(filioque) 논쟁을 조정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1100년에 윌리엄 2세 국왕이 사망하자 안셀무스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또 다시 윌리엄의 후계자인 헨리 1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1103년에 다시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다.
1102년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공의회에서
안셀무스는 노예 매매를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는 영국 국왕을 상대로 하여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그 당시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스콜라 학파의 아버지'란 칭호를 이미 얻고 있었다.
그는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리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의 저자이다.
이 사상은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데카르트(Descartes)
그리고 헤겔(Hegel)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안셀무스의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 (Cur Deus Homo)
중세의 강생에 관한 신학 논문 중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대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De fide Trinitatis),
“동정녀 잉태론” (De Conceptu Virginali), “진리론” (De Veritate)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는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시성되었고,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 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안셀무스를 언급할 정도였다. 성 안셀무스의 상징은 배이다.

 

* 자료집에서 발췌.

 

 

 

         

 

                   

     
       
     
      
      

      

             
                       

귀족 집안에 태어나 15세부터 수도원 입회를 원했으나

반대하던 아버지의 사후 28세에 입회하여

저명한 호교신학자로서 프랑스와 영국의 곳곳에 수도원을 세웠고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후 성직자의 개혁을 위한 노력 가운데

국왕과 다른 성직자들의 배척을 받아 망명 길에 오르기도 했으나

많은 저서를 남기고  캔터베리에서 잠든

주님의 일꾼 성 안셀무스 님이시여 

 

님의 성실과 열심을 기억하는 저희를

천상의 기도로 이끌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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