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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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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평신도를 보고 싶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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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bukhansan] 쪽지 캡슐

2017-07-11 ㅣ No.213026

 

                                                                                                                                                   김종학 

 

 

당당한 평신도를 보고 싶다

 

 

박문수(프란치스코)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얼마 전 어느 교구에 교육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본당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종일 교육이었는데 당일 강사 여섯 명 가운데 필자만 유일한 평신도였다.

교육이 끝나고 신자들을 배웅하는데 한 할머니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동안 살면서 교회에서 항상 주눅 든 평신도들만 보아 왔는데 오늘 당당한 평신도를 보았어, 반가워!”

뜻밖의 일이라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그 할머니의 밝은 표정을 보고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그날 이후로 한참 동안 그 할머니의 말이 묵상의 주제가 되었다.

 

 

 

물 먹은 평신도, 그래도

 

 

사실 나는 그 할머니 말씀처럼 당당한 평신도는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을 먹어서 그런지 대부분의 교회 일에 대하여 옛날처럼 당당하지 않다. 가능하면 이해해보려 하다 보니 두루뭉술한 경우가 더 많다.

물론 필자가 현실에 대한 이해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지난 이십년 가까이 현장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을 해왔으니 교회안의 여러 신원들의 사정을 다른 신자 분들보다는 조금 더 잘 아는 편이다.

옛날처럼 날카롭지 않으니 다른 분들이 나를 만나는 것을 덜 기피하는 덕에 교구, 수도회, 주교, 사제, 수도자 할 것 없이 폭넓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참으로 교회와 각 신원의 다양한 사정들을 이해하게 된다. 실제 물먹은 측면도 적지 않지만, 이러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 너그러워진 것도 많은 것이다.

어떻든 평신도가 교회에서 당당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며칠 전 일이다. 필자가 참여하는 모임에서 어느 사목회장이 본당사목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내용인즉 평등하지 않은 교회 상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제의 반론이 들어왔다. 사제도 문제지만 사목위원의 자질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와 사심 없이 협력하는 자세를 가질 때 사목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 감시하고 견제하고 때로는 비판하려는 자세로 임할 때 협력 보다는 기피를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종합하면 사목위원은 신앙도 좋고, 매일 미사도 참석하고, 거의 매일 본당에 드나들어야 할 뿐 아니라 폭넓은 사목에 대한 식견과 경제적 능력까지 갖췄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완벽한 평신도 상이다.

필자는 이 말을 들으며 교회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게 완벽한 상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실 교회쇄신 논의의 상당부분이 이러한 완벽한 신원상의 나열이 아니던가?

 

 

 

완벽한 사제, 완벽한 평신도

 

 

필자는 본당에서 열심한 신자는 아니다. 주일 미사만 간신히 하고 어쩌다 남성구역 모임에 나가는 것이 전부다. 이런 무심하고 소극적인 신자에게 사목위원을 하라고 하면 난 무조건 거절할 생각이다.

앞의 어느 사제의 말처럼 철저해야 하는데, 필자에겐 그럴 시간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교회생활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는 적당히 하려거든 아예 발을 담그지 말라는 것이다.

어느 날 구역모임에 나갔더니 그 다음 주 구역담당 기도가 있으니 그 시간에 맞춰 나오라. 청소가 있으니 어느 날 나오라, 오늘은 무엇, 내일은 무엇. 매일 전화를 받는 통에 그나마 나가던 구역 모임도 쉬고 있다.

 

 

아무 직책도 없는 신자인 내게도 이러한데 조금이라도 책임을 맡은 신자들은 사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일이 많아질수록 지원자는 적어지고, 적다보니 이미 열심히 하는 신자들이 그 일을 다 떠안게 된다.

이렇게 이삼년 하면 다 진저리를 내고 뒤로 나자빠지기 일쑤다. 이렇게 열심히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신자들도 적지 않지만, 상처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실 이런 분들에게는 그저 감사하고 칭찬을 해도 부족한데 사제들에게 야단을 맞거나 박대를 받는 경우가 흔하다. 동기부여를 기대하다 이렇게 야단을 맞거나 무시를 당하면 회의가 밀려온다. 그래서 다음에는 절대 안 한다가 된다.

 

 

나이가 육칠십인 어른들도 사제들에게 절절 맨다. 신앙의 훈계라면 나이를 불문하고 달게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봉사를 하려면 이러한 상황을 잘 참거나 이미 극복했어야 한다.

그리고 신자들의 이익보다는 사제의 기호에 맞춰야 한다. 이런 사정이 되다보니 못 마땅한 사람은 이런 자리를 멀리하고, 이보다 더 실망한 사람은 냉담해버린다.

그러니 신자들은 당당한 평신도 보다 굽신거리는 신자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의식은 자랐는데, 사목환경이 달라지지 않았으니

 

 

요즈음은 신자들이 많이 똑똑해졌다. 각종 신앙 강좌, 무슨 대학, 영성 훈련 프로그램 등에는 신자들로 넘쳐나는 까닭이다.

사제, 수도자들 스스로 겁이 날 정도라고 하니 많이 배우긴 배우는 모양이다. 이렇게 배운 사람들 가운데는 봉사를 통해 나누는 경우도 있지만, 알수록 실망스러워서 근처에 오려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의식은 자랐는데, 사목환경이 달라지지 않았으니 못 마땅한 것이다.

 

 

하나의 예로 아쉬울 게 없는데 굳이 굽신거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들 수 있다. 나 혼자도 얼마든지 좋은 것을 다 찾아다니며 즐길 수 있는데, 칭찬도 아닌 야단을 들어가면서 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인 셈이다.

교회와 신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도 사회변화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수평적인 의식이 강해져 쉽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경우도 자주 눈에 띤다.

적어도 이런 사례들로만 보면 한국교회는 협의체적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다.

평신도가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든 아니든 사제, 수도자, 신자들이 함께 대등하게 협력하며 교회와 신자들의 선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의 현실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끊임없이 충돌하고 좌절하고 냉담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굽신거리는 경우가 계속되고 있다.

 

 

당당한 평신도들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미사에 만족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당당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커서일 것이다.

필자가 보건데 현재는 당당하고자 하는 욕구회피하려는 욕구가 팽팽하다. 당당하기 위해서는 교회 제도의 쇄신은 물론 기존의 사목방식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당분간 회피하거나 적당히 굽신대는 신자들을 계속 보게 될 것 같다. 이럴 때 당당한 평신도가 되어야 도움이 될 터인데, 자꾸 회피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2008-06-2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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