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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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강론.“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파주 올리베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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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7-11-12 ㅣ No.116115

 

마태 25,1-13(연중 32 주일)

 

11월의 가을입니다. 단풍이 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움입니다.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입니다.

지금, 우리는 위령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시기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죽음과 종말,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전례의 중심주제로 선정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역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대한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참 지혜를 배우는 일입니다.

<1독서>에서는 지혜를 인격화하여 표현해줍니다. 바로 참 지혜이신 하느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지혜라는 단어 대신에 하느님이란 말을 넣어서 읽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하느님)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입니다. 지혜(하느님)을 얻으려고 깨어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집니다.”(지혜6,15)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하신 지혜를 말해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데려가실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7).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지혜 있는 이들의 삶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며, 혼인잔치는 하늘나라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기름은 신앙의 삶을, 은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을, 열 처녀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인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마태 25,13)

 

깨어 있되, 항상 깨어 있어라 하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이 다시 오실 날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깨어 있되, ‘신랑을 향하여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 항상 깨어 있어야 할 우선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신랑을 맞이하게 위해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음신랑을 기다리는 것이요, 희망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억하고,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 언제나 계시며, 또한 오시는 주님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는 신랑을 향하여 있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부터는 정신 차리고 경계함을 말해줍니다. 곧 항상 깨어정신 차리고 있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 어떤 유혹에도 단박에 쳐부수겠다는 초병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 있음의 또 다른 의미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한 예비함, 준비함입니다.

이는 결코 미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미래는 현재 안에서 그리고 현재를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를 제쳐두고 미래만을 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현재는 미래를 결정짓는 마당이기에, 현재를 등하시하는 것은 결국 미래를 등한시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현재를 살되 미래를 바라보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님, 주님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항상 깨어 있을 수는 있는 것일까?”

 

우리는 당연히 항상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라고 하십니다. 곧 우리는 깨어나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미 깨어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계시된 바를 믿고 받아들인 우리는 이미 깨어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항상 깨어있을 수가 있으며, 또한 항상 깨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구원받은 존재이며, 하늘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예기치 않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할 것이니 항상 깨어 있어라는 단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기뻐 여기시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지혜로운 이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희망하고 기다려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기쁨과 사랑을 소망해야 할 일입니다.

이 가을, 결실의 아름다움과 소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비의 완성의 때를 기다려야 할 일입니다. ‘신랑을 생각하는 설레임과 부푼 가슴으로 살아가야할 일입니다. 아니, 이미 혼인잔치의 기쁨과 사랑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살지 않고, 성령의 생명의 불꽃을 태우는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지혜로움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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