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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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눈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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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damiano53] 쪽지 캡슐

2017-02-13 ㅣ No.110060

2017.2.13.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창세4,1-15.25 마르8,11-1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믿음의 눈



오늘 창세기의 카인과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경우 다 믿음의 눈 먼 모습입니다. 

누구나 카인의 경우라 해도 하느님에 대한 서운함과 동생 아벨에 대한 질투에 참으로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둘 다 똑같이 정성을 다해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는데 

아벨 동생의 제물은 받아들이고 자기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카인은 얼마나 실망스럽고 화가 났겠는지요.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고, 이어 하느님의 추궁이 뒤따릅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테, 너는 그 죄악을 다스려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라도 카인은 깨달았어야 했습니다. 

냉정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의 입장을 전혀 생각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눈이 없었던 탓입니다. 


‘왜,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부질없는 물음입니다. 

아무리 물어도 대답은 나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니곤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유에 속한 신비로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불가사의한 경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족할 줄 아는 게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어 유혹에 빠진 카인입니다. 

믿음의 눈이 있었다면 하느님의 결정을 존중하고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의연하게 처신했을 것입니다. 

사실 최선을 다해 제물을 봉헌했고 하느님의 결정을 관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여 

제 본분에 충실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일입니다. 


오히려 하느님도 내심 고마워하며 미안해 했을 지도 모르고 

다음 번에는 카인의 제물을 꼭 받아들이리라 다짐했을 지도 모릅니다. 

정말 믿음이 있고 지혜로운 카인이었다면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렸을 것이고 끝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순간 질투와 분노의 유혹에 눈이 멀어 

자기의 품위를 떨어뜨린 어리석고 안타까운 경거망동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아무 것도 아닌 문제가 카인이 이성을 잃고 분노함으로 큰 문제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평소 자존감이 약하고 열등감이 컸던 카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닌 것 갖고 분노하고 격하게 행동함으로 후회한 적도 많을 것입니다. 


한 번 무너진 카인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이어 아우 아벨을 살해하고 마침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방랑길에 오릅니다. 


그대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버지 아담의 재판을 보는 듯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흡사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이 아담에게 묻던 물음을 연상케 합니다. 

한 번 무너진 카인의 뻔뻔한 모습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답변입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의 반응에 상관치 않고 하느님은 끝까지 그를 보살피지만 

진정한 회개가 없어 계속 망가지고 무너져 내리는 카인의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졸지에 두 아들을 잃은 아담과 하와 부모의 아픔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새삼 자신들의 원죄의 결과에 전율했을 것이며 하여 하느님을 더욱 찾았을 것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묘사에서 인간의 죄악에 좌절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간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와 배려를 배웁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일으키는 문제를 수습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십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주셨구나.”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이렇게 용감하게 슬픔을 딛고 일어나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요 보속이고 용서받는 일입니다. 

힘든 세상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입니다. 

참으로 질긴 목숨이요 강인한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 역시 믿음의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자체가 불순하며 완전히 편견에 닫혀 있는 모습들입니다. 

예수님의 대응이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이들의 완고함에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 세대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 가득한 세상인데, 

예수님 자체가 최고의 표징인데, 이를 알아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에게 더 이상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믿음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어 

하늘에서 오는 최고의 표징인 당신을 알아 보고 믿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시편31,20).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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