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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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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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대 [yongdae_kim] 쪽지 캡슐

2017-07-10 ㅣ No.113143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18-26)

 

 

 

일반적으로 병에 걸리면 병을 숨기는 것이 예사인데

 

이는 자신의 약함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동물적인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병을 자랑하면 병의 원인을 알 수 있게 되고

 

명의(名醫)를 만나 병을 고칠 수도 있게 되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아무 효험이 없어 숨기고 있다가 달리 방법이 없으니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위에 알려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은 자존심을 버리고

 

이방인인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부탁 드립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John Chrysostom) 성인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회당장이 자신의 불행을 지나치게 떠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려고 합니다.

 

더욱더 효과적으로 관심을 끌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이 해석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즉 성인의 이 해석이 너무나 이성적(理性的)이어서

 

신비스런 요소를 완전히 없애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현대의 신학자들은 복음에서 의문스런 점이나 시적(詩的)인 요소

(그들은 신화(myths)’라고 했습니다)를 제거하게 되면

 

복음 안에 숨어 있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의문스런 점이나 시적인 표현 안에 진리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인(詩人) 창조주(maker)’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이 말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시인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시인처럼 생각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태여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해석에 우리가 반박을 한다면

 

회당장이 떠버리고 다녀서가 아니라 그 당시에는 재빨리 매장하는 것이 관습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시신(屍身)이 더 썩기 전에

 

어린 소녀의 생명을 서둘러 구해주셨을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 주장 안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 결과 과연 무엇을 얻었습니까?

 

그런 주장은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몰래 치료를 받으려고 했다는 것만 알고 싶어했던 것이 아닙니까?

 

그 여인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은밀한 데가 아프기도 하고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치료를 받고 싶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곧 알아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여인의 친구가 되고 싶어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자(記者)처럼 사실을 파헤치려는 자세가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읽어야 예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인간적인 면을 더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마태오 복음보다 훨씬 짧아 길이가 60%밖에 안 되지만

 

어린 소녀를 치유해주시는 장면에 대한 설명은

 

마태오 복음보다 두 배나 더 깁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오히려 인간미가 없이 냉정하게 사실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에서는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르 5,41-42)

 

 

 

모든 복음서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인간미가 넘치는 이야기가 수두룩합니다.

 

진리는 깊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보편적인(catholic)’ 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이런 종교를 가진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에게 모범을 보여

 

가톨릭의 우수성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죽은 딸과 하혈하는 여인을

 

살려주시고 치유해주시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복음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믿음이 깊으면 반드시 구원을 받게 된다

 

생명을 얻게 되고 치유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구원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회당장의 딸 이야기나 하혈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과거의 사건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금 바로 우리 앞에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결코 회당장의 사정이나 하혈하는 여인의 과거를

 

알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유다교의 회당장이 이방인인 예수님께 무릎을 꿇은 사실을 알면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것과

 

유다교에서는 구세주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정황은 알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의 뜻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과거의 사건을 파헤치는 것은 신학자의 일이지만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성을 애타게 찾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속독(速讀)을 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게 되지만

 

묵상하면서 정독(精讀)을 하는 사람들은

 

숲을 보는 깨달음을 얻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묵상의 버릇이 들지 않으면

 

성경은 하나의 역사서나 문학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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