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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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어---- 도나 오쉐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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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대 [yongdae_kim] 쪽지 캡슐

2017-11-12 ㅣ No.116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13)

 

우리 모두 마태오 복음(25)에 나오는 어리석은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일랜드 남서부 문스터(Munster) ()에 있는

 

코크(Cork)의 한 교회 입구의 한 쪽 벽에는 슬기로운 처녀들이 조각되어 있고

 

다른 한 쪽 벽에는 어리석은 처녀들이 조각 되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슬기로운 처녀들보다 어리석은 처녀들을

 

더욱더 흥미롭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더 개성이 있어 보이고 더 활기찬 것 같습니다.

 

복음에서도 슬기로운 처녀들보다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더 호감이 갑니다.

 

아마 여러분이 궁지에 몰린다면 슬기로운 처녀들보다는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완벽한 처녀는 자신의 어머니 외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완벽한 처녀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거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우화를 말씀하실 때에는 일수가 사나운 날이었을까요?

 

 

 

비유(parable)는 우화(allegory)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화는 인간의 경험을 말하며 정곡을 찔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지만

 

비유는 단 한가지 사실만 말합니다.

 

비유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목적은 하나뿐입니다.

 

그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슬기로운 처녀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이 도움을 청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하고 병들고, 상처 받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에제키엘 34장에서 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양의 비유를 이용하셨습니다)

 

이 처녀들의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열 처녀의 비유로 돌아가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왜 따분하게 보이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왜 재미 있게 보였을까요?

 

아마 한 가지 이유는 어리석음은 자신의 것이지만

 

지혜는 보통 다른 데서 빌려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혜는 모방할 때가 많으므로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선()이나 지혜를 거의 바라지도 않으며

 

오히려 싫어할 때가 많으며 우리의 얼굴에 쓰여져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만든 지혜가 있을까요?

 

실제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축구 응원자처럼 좋아하는 팀의

 

유니폼 색깔과 같은 옷을 입듯이

 

단지 지혜가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일까요?

 

집이나 학교에서는 착해야만 하며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착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는 착하려는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착한 것처럼 보이려고만 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교육도 위선을 보이는 데 치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어린이들이

 

이와 같은 어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은 지혜로워하며 몸은 건강해야 합니다.

 

지혜롭거나 건강하지 않은 영혼이나 몸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보나 지식은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있으며

 

자신이 CD에 담아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에 해당되는 라틴어 ‘sapientia’

 

sapor’에서 나왔는데 맛보다(taste)’는 뜻입니다.

 

지혜하느님의 선()에 대한 지식을 맛보는 것 즉 ‘sapida scientia’입니다.

 

책이나 어떤 사람의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것 즉 자신이 알고 활용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입으로나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영어는 우리의 제2국어(second language)이고

 

우리 자신의 인격이 곧 모국어(first language)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입니다.

 

 

 

지혜는 조금만 있어도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는 조금밖에 없는 지혜로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나 삶은 정보를 얻고 활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엘리엇(T.S. Elliot) 에서

 

우리에게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어디에 있는가?

지식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정보 속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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