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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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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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11-24 ㅣ No.116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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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1마카 4,36-37.52-59

그 무렵

36 유다와 그 형제들은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래서 온 군대가 모여

시온산으로 올라갔다.
52 그들은

백사십팔년 아홉째 달,

곧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

 아침 일찍 일어나,

53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54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
55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

56 그들은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다.

57 또 성전 앞면을 금관과

방패로 장식하고 대문을

새로 만들었으며,

방에도 모두 문을 달았다.
58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59 유다와 그의 형제들과

이스라엘 온 회중은 해마다

그때가 돌아오면, 키슬레우 달

스무닷샛날부터 여드레 동안

제단 봉헌 축일로 기쁘고

즐겁게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복음 루카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년이라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한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오랫동안 저의 새벽

묵상 글을 읽어왔다고

하면서 이렇게 직접 보게

되어서 너무 기쁘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신부님은 저의 멘토입니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멘토라고 하기에

너무나 부족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누군가가

 했던 말이

하나 생각나더군요.
‘아버지와 스승은 없고

멘토만 넘쳐난다.’
솔직히 누군가에게 큰

모범이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나름대로의 노력을

할 뿐인 것이지요.

사실 우리의 교육이

얼마나 깁니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사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멘토를 찾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멘토처럼

살아야 하는데 그럴 생각은

별로 없고 멘토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렵게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를 그만두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신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서 병도 고쳐주고

 더불어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해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입니다.

그리고 신부님을 멘토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만 할 뿐

정작 자신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태반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

멘토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

행동은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제도 아닌데,

당시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권한이 있다고

저런 행동을 하는가 라는

 생각을 했겠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성전에 있었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도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힘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 스스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말만 할 뿐

그렇게 살지 못했지요.

그래서 뒤에 숨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없앨 것인가를

궁리만 할 뿐입니다.
내 자신의 말에 힘이 있으려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남만 그렇게 살라고

책임을 떠넘겨서도 안 됩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이 다른 이들의

멘토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듯이,

 내 자신을 정화하는

오늘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정화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작은 경첩으로

큰 문이 움직이듯,

한 사람의 희생으로

공동체에

생명의 불이 지펴진다.

(래리 크랩)

남미 선교를 떠나는 동창신부 배웅 나왔습니다.

"관상은 심상만 못하고

심상은 덕상만 못하다"

(‘좋은 글’ 중에서)

相好不如身好(상호불여신호)

얼굴 좋은 것이 몸 건강한 것만 못하고
身好不如心好(신호불여심호)

몸 건강한 것이 마음 착한 것만 못하고
心好不如德好(심호불여덕)

마음 착한 것이 덕성 훌륭한 것만 못하다
위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마의선인’이 쓴 마의상서에

나오는 유명한 내용입니다.
‘마의선인’이 하루는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나무를 하러 가는

머슴의 관상을 보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의선인’은 머슴에게

“얼마 안가서 죽을 것 같으니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말라”

고 당부합니다.

그 머슴은 그 말을 듣고

 낙심하여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할 때 산 계곡물에

떠내려 오는 나무껍질 속에서

수많은 개미떼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머슴은 자신의 신세와

같은 개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나무껍질을 물에서

건져 개미떼들을

모두 살려 주었습니다.
며칠 후 마의선인은

그 머슴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부귀영화를 누릴 관상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마의선인은 그 젊은 머슴이

개미를 구해준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아 마의상서

 마지막 장에 남긴 말이

바로 위의 글귀입니다.
마음이 곱고 심성이 착하고

 남에게 배려하고 베풀어

덕성을 쌓으면 사람의 관상은

은은하게 편안하게

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하게 살면

해맑은 얼굴로 꽃피고

세상을 불편하게 살면

어두운 얼굴로 그늘이 집니다.

마음의 거울이 바로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공사중인 갑곶성지의 기념성당.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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