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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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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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7-21 ㅣ No.12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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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1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제1독서 미카 2,1-5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2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망했네.

그분께서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리셨네.

 어떻게 우리 밭을 빼앗으시어

변절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제

비를 뽑고 줄을 드리워 줄 이가

주님의 회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복음 마태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종종 신부님의 강론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만납니다.

강론 시간이 너무 짧거나 길다는 불만,

강론 내용에 대한 불만,

강론 할 때의 신부님 자세에

대한 불만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신부님의 강론에

대해 좋다 나쁘다 등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강론을

하는 사제이다 보니,

강론을 준비하고 또 신자들

 앞에서 강론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런 경험도 해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그 일에 대해

남에 대한 판단을

많이 하게 됩니다.

권투 경기를 보면서 한 번도

링 위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누구보다 흥분해서 그 선수에

대한 욕을 많이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권투를 해 본 사람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선수를

향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잘 모르기 때문에 남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알려고 하는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어리석은 사람의 길을

쫓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함부로 주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합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성경을 읽어보았을까요?

또한 가톨릭 교리와 교회법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또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작은 판단을 내세워서

 하느님이 없다고

쉽게 말할 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까를 모의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쁜 행동을

하신 적도 없었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잘못된 말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씀이었고,

기쁨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행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는데 모의를 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판단만을 내세우면서

감히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지면서

원망을 자주하고 있다면 분명

또 다른 모습으로 주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

성경이나 영적독서 읽기,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것 등 우리의 노력들이

주님을 환하게 알 수 있게 하며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거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어떠한 일도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알의 과일,

한 송이의 꽃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무의 열매조차

금방 맺히지 않는데

하물며 인생의 열매를

 노력도 하지 않고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다.

(에픽테토스)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과 다른 미래를 만나기 위해..."

지금과 똑같이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이상한 점

하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미래를 꿈꾸고

 또 기대하면서 지금 우리는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으면서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과연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바꿔야 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아닌

다른 지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바뀌기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뀐다고 해도 스스로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바뀐 것도 모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다른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까?

그 미래를 구체적으로

떠올려보고 이를 위해

지금 내가 어제와 다르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지금과 다른 멋진 미래를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시골의 장독대가 정겹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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