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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사랑의 순교자 - 반영억 라파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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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8-09-20 ㅣ No.123593

 

반신부의 복음 묵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사랑의 순교자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교회는 백 여년 동안 신유, 기해, 병오, 병인등 4대 박해를 통해 만 명 이상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 순교자의 피가 오늘의 신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순교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순교라는 말은 신앙과 믿음을 증거하기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는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합니다. 순교자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었습니다.”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면서 그 믿음의 가르침을 사랑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지혜서의 말씀을 보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서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지혜3,9).라고 적고 있는데 바로 순교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들의 행동이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지혜3,1-9).라고 적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삶을 세상은 어리석게 보았지만 주 하느님 눈에 들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의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 곧 영생이라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김성우 안또니오는 박해 속에서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 “앉거나 눕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순교성인 중 가장 나이 어렸던 유대철 성인은 1814년 기해박해 당시에 스스로 포도청에 찾아가 천주교 신자라고 밝혔고 옥리들이 담뱃대를 불에 달구어 쇠끝으로 그의 살을 지졌지만 태연자약하게 이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옥리들이 화젓가락으로 벌건 숯불을 집어 올려 그의 입에 갖다 대는데 유대철이 입을 크게 벌리자 깜짝 놀라 숯불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최해성 요한은 배교하면 한 고을을 통째로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박해를 각오해야 했고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외의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오직 주님만을 얻고자 했으며’주님과 고난을 함께하고 그분과 함께 죽기를 원했습니다. 아무것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로마8,35-39).

  

 

그들이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꿋꿋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6장에서는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 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하고 노래합니다. 지금 받는 수고와 땀은 후에 받을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련과 역경,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00여년의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자수가 늘어갔고 감옥에 갇히고 처형당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충성을 지켰습니다. 그 힘은 바로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면서도 평화롭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하고 이제 그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처음 신앙을 받아들일 때에 성직자나 수도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도 없었습니다. 성경도, 기도서나 묵주, 신심서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공부하며 진리를 찾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은 무엇이든 풍족합니다. 그런데 주님 체험은 많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은총은 많은데 담을 그릇이 없는 탓입니다. 복음에서 보듯“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지만 버리지 못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만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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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다는 것은 비운다는 것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덜어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나의 취향과 성격, 나의 계획 등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더 크신 예수님에게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로 바오로 사도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베냐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5-8)라고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철저하게 버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자기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 입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익숙해져 왔는데 그런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아픔이 없이는 절대로 자신을 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 십자가를 질 수도 없습니다. 바오로는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했으며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2코린 11,23.27).하고 고백합니다.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희생제물로 바치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협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다하는 것인데,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 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그리고 명예와 재물과 취미생활, 위신체면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주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3,9).

  

 

현대의 순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리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 알퐁소는 당신이 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뜻에 맞춘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에게 명한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아가는 사랑의 순교자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밉거들랑 사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날은 안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을 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를 죽이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입으로, 주님의 손발로 움직이십시오. 이것이 오늘의 순교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 마더 데레사 -

 

사람들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랑하여라.

 

당신이 선한 일을 하면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거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당신이 성실하면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적을 만날 것이다.

그래도 사랑하라.

 

당신이 정직하고 솔직하면 상처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만든 것이 하룻밤에 무너질지 모른다.

그래도 만들어라.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도와주면 공격할지 모른다.

그래도 도와주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면 당신은 발길로 차일 것이다.

그래도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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