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심 좋은 거북뫼 삼형제
기해박해 180주년을 기억하며 선정한 마지막 순교자는 바로 성 김성우 안토니오이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경기도 광주에 행정구역을 가진 구산(龜山)에서 아버지 김영춘과 어머니 청주 한씨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우의 이름은 우집(禹集)이고, 동생들의 이름은 각각 김만집과 김문집이라 하였다. 집안은 부유하면서도 인심 좋기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특히 장남인 김성우는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천주교 신자로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입교와 상경(上京)
김 안토니오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1830년경이었다. 셋째인 문집과 함께였다. 이때 둘째인 만집은 입교를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신앙을 받아들여 3형제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친척과 이웃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구산 마을이 교우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3년 뒤인 1833년 유방제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김성우는 성사를 자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현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에 있는 마장안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구산으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작은 강당을 마련하고 1836년 이후에는 한여름 동안 모방 신부를 이곳에 거처하도록 했다.
체포와 투옥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얼마 안된 3월 21일, 포졸들이 구산으로 들이닥쳐 그와 동생 하나를 체포하였다. 이때 그들은 약간의 돈을 주고 풀려날 수 있었으나, 그 해 말 배교자의 밀고로 동생들과 사촌 김주집이 체포되어. 광주 유수가 던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둘째인 아우구스티노는 체포된 뒤 고문을 참아 받으면서 관헌들 앞에서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설명하였고,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41년 2월 19일 옥중에서 통회와 신앙심을 지닌 채 병사하고 말았다. 반면에 셋째인 문집과 사촌인 주집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사망하였다.
재투옥과 순교
당시 김성우는 미리 포졸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지방으로 피신하였다가 끝내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1840년 1월경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고, 외교인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그중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또 온갖 형벌을 받아내면서 석방될 희망을 전혀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옥중에서 생애를 다하려고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대를 맞고도 배교하지 않자 관장은 다음날인 4월 29일 그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순교한 뒤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 등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시복 후 1927년 5월 30일에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페레올 주교의 기록
앵베르 주교를 이어 조선 대목구장이 되어 약 13년 동안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페레올 주교는 그의 기해박해 보고서에서 김성우 안토니오의 순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체포된 김성우 안토니오는 갖가지 고문을 꿋꿋하게 견뎌 냈다. 그는 포도대장에게 “어떤 질문을 하시고 어떤 충고를 하셔도, 제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천주교인이요 천주교인으로 죽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그는 곤장 90대를 맞은 다음 1841년 3월에 옥에서 교수형을 당했는데 나이는 47세였다.
김성우 안토니오에 대한 기록을 끝으로 페레올 주교는 기해박해에 대한 보고서를 마친다. “제 인생도 이들처럼 마치기 바랍니다(Fiant novissima mea horum similia).” 이어진 보고서 말미 그의 신앙고백은 기해박해 순교자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있다. 조선대목구장에 선출되고도 기해박해 국면에 이르러 조선 입국이 늦어지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곧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가을, 구산 성지
하남 향토 사적 제 4호 구산. 시끌벅적한 서울을 동남쪽으로 살짝 벗어나 하남시로 방향을 틀면, 한때 카페가 촌을 이루었던 미사리 조정경기장 일대로 들어설 수 있다. 그곳에는 천주교 신자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구산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바로 김성우 안토니오 가족과 친우들이 소박한 교우촌을 이루었던 구산 마을이다. 지금은 신도시 미사지구의 개발로 주변에 훌쩍 큰 아파트 단지들이 사방에 들어서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구산 성지는 소박한 교우촌의 그 흔적을 끝내 담고 있다. 기해박해를 되새기는 10월의 마지막에, 잠시 짬을 내어 미사리 구산 성지를 들러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인심 좋기로 소문났던 김성우 안토니오 삼형제의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페레올 주교의 보고서에서처럼 박해의 와중에 흔들림이 없었던 김 안토니오의 신앙고백을 들을 수도 있을까. 물론 가을을 통과하는 아름다운 단풍과 호젓한 드라이브는 덤이다.
참고
『가톨릭대사전』 김성우 안토니오 편
『페레올주교 서한집』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