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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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반영억 라파엘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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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12829

연중12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원미사 (마태18,19-22)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남북통일기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엇보다도 아버지 하느님의 큰마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키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 가까운 사람과도 용서하고 화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의 화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용서와 화해는 지금 삶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과 백 사람이 하나 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예,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쉽다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은 안돼!’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 한번 틀어지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정성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머리수가 아니라 마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머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서로 하나가 되기가 힘든 데 하느님과, 예수님과 한 마음 되기는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사실 하느님과 하나 되면 이웃과 일치하는 것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가 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일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실제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는 분들은 적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막상 얼굴을 마주 하거나 목소리를 들으면 옛 생각에 울컥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것은 아직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으로 품어 끌어안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 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크지 못한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사람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상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상처를 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는 힘이 들지만 당신이 이미 용서 하셨기에 용서합니다. 당신이 그를 사랑하시기에 저도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것이 있다면 먼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1절에서 11절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이 여자를 끌고 와서는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 안에는 ‘나는 의롭다’, ‘나는 잘 살고 있다.’ ‘나는 거룩하다.’ 뽐내고 으스대는 마음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를 듣고 금방 대답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추측 하건 데 아마도 ‘너 자신을 알라!’하셨을 것입니다. ‘너도 하느님 앞에 죄인 아니냐? 잘 생각해 봐라. 너 잘 난척하지만 너도 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뜸을 들이시자 사람들이 재촉합니다. ‘스승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씀 좀 하십시오.’ 사람들이 줄곧 물어대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다 떠나갔습니다. 마침내 예수님 앞에는 죄 많은 여자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그러자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고 자비와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성경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떠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삶의 경륜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습니다. 말하자면 의롭다고 자처한 사람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세상에는 밝게 눈떠 있었지만 하늘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한 말씀에 눈이 뜨였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하시는 한 말씀에 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기 죄에다 죄를 더 보태지 않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눈뜨지 못했다면 돌을 집어 던졌을 것입니다. 죄에 죄를 더했을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잘못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굉장히 잘난 줄로 알아요. 의로운 줄로, 거룩한 줄로 알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순간 순간마다 죄에 죄를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죄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을 떠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이 잘못한 것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눈뜬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눈뜬 사람은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눈 뜬 사람은 그 허물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내가 저 사람과 똑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았지만 또 다른 잘못과 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이 죄 많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물었습니다. 일곱 번, 많죠. 한 번도 힘든데….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일생을 살아오면서 잘 산다고 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용서 받고 살았느냐? 너 그거 아느냐? 너 그거 안다면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를 결코 용서 못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이렇게 앙갚음을 하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느님께 눈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할지언정 몸으로 마음으로 손발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 눈뜰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눈뜨면 내 힘으로 안 되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힘으로, 능력으로 먼저 용서를 청할 수 있고 베풀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억울해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진실을 알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순히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 몸으로 손발로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으뜸제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떠날 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막상 위험에 직면하자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야 말로 본이 아니게 얼떨결에 주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가 나는 의롭다, 떳떳하다.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서 별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주님의 으뜸제자로 활동을 할 수 있었겠어요? 바오로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과거의 살인죄에 매여 있었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는 도구로 활동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자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대상은 우리 가족 안에 있을 수 있고 이웃 안에 공동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용서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믿음의 사람이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 하면서 남북의 화해와 친교에 앞서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베푸는 것부터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고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이웃에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마음을 다짐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결코 화해를 재촉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섣부른 화해는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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