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8일 (목)
(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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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05 -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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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8-05 ㅣ No.113661




2017
08 05 () 가해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성모 대성전 봉헌 기념일)

레위기 25,1.8-17 / 예레미야서 26,11-16.24
마태오복음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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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 레위기 25,1.8-17
1
주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8
“너희는 안식년을 일곱 번, 곧 일곱 해를 일곱 번 헤아려라. 그러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 마흔아홉 해가 된다. 9 그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려라. 너희가 사는 온 땅에 나팔 소리를 울려라.
10
너희는 이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한 해로 선언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고, 저마다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 11 이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다. 너희는 씨를 뿌려서도 안 되고, 저절로 자란 곡식을 거두어서도 안 되며, 저절로 열린 포도를 따서도 안 된다.
12
이 해는 희년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해다. 너희는 밭에서 그냥 나는 것만을 먹어야 한다.
13
이 희년에 너희는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아야 한다. 14 너희가 동족에게 무엇을 팔거나 동족의 손에서 무엇을 살 때, 서로 속여서는 안 된다. 15 너희는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헤아린 다음 너희 동족에게서 사고, 그는 소출을 거둘 햇수를 헤아린 다음 너희에게 팔아야 한다.
16
그 햇수가 많으면 값을 올리고, 햇수가 적으면 값을 내려야 한다. 그는 소출을 거둘 횟수를 너희에게 파는 것이다.
17
너희는 동족끼리 속여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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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26,11-16.24

그 무렵 11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의 귀로 들으신 것처럼 이 사람은 이 도성을 거슬러 예언하였으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12
이에 예레미야가 모든 대신들과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13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14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15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이 나를 죽인다면, 여러분 자신과 이 도성과 그 주민들은 죄 없는 이의 피를 흘린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 모든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16
그러자 대신들과 온 백성이 사제들과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사형당할 만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였습니다.”
24
예레미야는 사판의 아들 아히캄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지는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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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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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8 05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성모 대성전 봉헌 기념일)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는 헤로데 임금에게 바른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헤로데의 비정상적인 아내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을 미워하였습니다. 헤로데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헤로디아는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요한에게 증오심을 가졌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건에서 우리는 악한 계략과 의인의 희생을 바라보게 됩니다. 헤로디아의 악한 계략으로 세례자 요한이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악한 계략과 요한의 죽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꾸밉니다. 빌라도는 유다 지도자들의 계략과 군중들의 폭동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인간의 악한 계략과 의인의 희생은 오늘날에도 지속됩니다. 한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죗값은 후대에까지 이어집니다. 죄의 악순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끊을 수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죽였던 요한이 되살아날까 봐 두려워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하느님의 심판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담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님 안에서 되돌아보지 않으면, 우리 역시 악한 계략의 동조자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하루를 마감하기 전에 ‘반성 기도’와 ‘통회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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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7 30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 기념일)


죽음의 순간에도 세례자 요한은예언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의 권력이 얼마나 추악할 수 있으며, 인간의 시기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권력의 망토를 둘러쓴 이들이 자신의 야망이나 정략적 계산, 그리고 비열함으로 죄 없는 이들이나 진정한 영웅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을 역사 안에서 수없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한 일에 대해 요한이 여러 차례 그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를 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그 헤로디아의 딸이 자기 생일에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준 대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게 하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 그 소녀와 그 어미에게 가져다줍니다.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이나 그의 목을 베어 버린 사건과 그 배경, 그리고 이 모든 모습을 곁에서 보고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어이가 없을뿐더러 인간의 비열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모든 것으로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잔혹하게 처형되실 것인지를 보여 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지지만,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로 극복되었습니다.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겨 내고 날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할 새로운 예언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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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801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사유 재산권에 한계를 긋는 것이 희년에 관한 레위기의 법률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땅을 구입하더라도 그 땅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값을 지불하고 땅을 샀다 하더라도, 오십 년마다 돌아오는 희년 직전까지만 그 땅을 임대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땅을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자기 소유의 땅을 돈을 받고 완전히 팔아넘길 수는 없습니다. 그 땅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이 사유 재산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계명은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명합니다. 분명 이웃의 사유 재산권을 존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땅은 다릅니다. 이집트 탈출을 체험한 이스라엘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에게, 땅은 삶을 다시 시작하려면 꼭 필요한 마지노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각 지파, 가문, 가정이 살아가도록 주신 땅을 다른 사람이 영구히 차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각자의 몫으로 나누어 주신 땅! 재력과 권력과 폭력을 동원하여 그 땅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이웃의 생존을 위협하고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농경 사회가 아닌 오늘날에도 이웃의 삶을 위협하면서까지 나의 재산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레위기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 모두 인간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서로 독려하고 배려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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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802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베르첼리의 성 에우세비오 주교 기념일)
(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사제 기념일)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최후에 대한 상세한 정황을 알려 줍니다. 유다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살로메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헤로디아의 딸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반드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내용은 헤로데의 마음입니다. 복음은 헤로데의 잘못된 행위가 무엇이며, 그의 불편한 심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뛰어난 철학자들의 윤리적 통찰의 도움으로 성찰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에 대해분노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연회석 손님들 앞에서 춤추어 헤로데를즐겁게해 주었습니다. 기분이 들뜬 헤로데는 성급하게 약속은 하였으나 자신의 위신을 지키고자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 앞에서는 마음이괴로웠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막강한 힘을 지닌폭군이 과연 행복한지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폭군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데, 그 마음이 서로 상반되는 원의와 욕구로 갈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 진정한친구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행복한 사람의 특징을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좋은이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덕은 다름 아니라 감정과 원의가 갈림 없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는 데서 비롯됩니다.
헤로데에게도 회한과 일말의 양심은 있었을 것이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감정도 있었겠지만 혼동되고 무질서한 마음, 갈라진 원의는 올바른 행위의 기회를 놓치게 했습니다. 그의 불편한 심기의 본질은 여기에 있었고, 이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의 여러 욕구와 감정을 복음의 빛에 비추어 보며 조화와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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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803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죄가 불러일으키는 힘을 잘 보여 줍니다. 헤로데는 요한 세례자를 죽였습니다. 단순히 요한 한 사람을 죽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요한을 죽임으로써 자기 안에 있는 정의를 죽였습니다. 순결을 죽였습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죄의 그늘 속에 있던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앓는 이를 고쳐 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굶주린 이를 배부르게 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기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죽였던 요한이 되살아났다며 두려워합니다. 죄지은 자에게는 예수님의 출현이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 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처음에 아담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죄짓고 난 뒤에는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만 듣고도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숨어 버렸습니다(창세 3,8-10 참조). 하느님과의 만남이 기쁨이 아니라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올가미는 사람의 눈을 비뚤게 만듭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예수님의 출현을 무서워하고, 아담이 하느님께서 거니시는 소리를 두려워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출현은 기쁨이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거니시는 소리는 반가움이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에 대한 겸손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뵙기가 두렵지만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믿으며 용기 있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겸손한 태도만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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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804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인간은 다른 이들과 연대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한 사람의 죄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죄가 다른 이에게 어떤 비극을 불러일으키는지 잘 보여 줍니다.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성인이 많은 죄인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아르스의 성자라 불리는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입니다.
당시 프랑스의 아르스는 주민 200여 명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거의 모두 세례를 받은 신자였지만, 세상사에 매달리거나 세상의 쾌락을 찾아 살기에 바빴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그 작은 마을의 본당 신부로 임명 받습니다. 그는 아르스로 가는 도중에 만난 한 목동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내게 아르스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으니, 나는 네게 천국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겠다.”
비안네 신부의 고행과 성덕이 널리 알려지면서 교회를 떠났던 신자들도 차츰 교회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에게 전국에서 고해성사를 보러 오는 이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하루에 17시간 동안이나 고해성사를 주어야 할 정도였고, 고해성사를 받은 사람이 1년에 2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성무일도』의 독서 기도에 나오듯이, 비안네 신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사람의 고귀한 과업이요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은 이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그는 기도와 극기와 사랑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천국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비안네 성인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행복을 찾는지 자문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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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7 30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 기념일)


의인의 희생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죄악이 따릅니다. 죄는 전염성이 강해서 주변을 오염시키고 어느새 그것이 정당성을 갖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동참하는 세 인물, 헤로데와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에게서도 악의 세력이 어떻게 일하는지 아주 잘 드러납니다.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자신의 비윤리적 삶을 지적하는 요한에게 늘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보다 더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사실 헤로디아였습니다. 헤로데에 붙어 권력을 누리며 살던 헤로디아는 이를 반대하는 요한 때문에 늘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비윤리적 삶을 지키려고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은 딸을 이용하여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헤로디아에게서 발생한 악한 계략이 그녀의 딸을 오염시키고, 이것이 다시 헤로데의 권력의 힘을 움직여 의인을 죽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고 예수님을 죽일 계략을 꾸민 대사제와 원로들, 여기에 동조하는 유다의 배신, 영문도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정치적 이해관계로 무고한 이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빌라도, 약자를 조롱하는 병사들, 이 모든 사람이 예수님 수난과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입니다.
의인을 희생시킨 이 모든 사람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식별하며 살지 않으면 의인을 죽게 하는 또 하나의 동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말과 행동 때문에 누군가가 크고 작은 희생을 당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잘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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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7 31)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대체로 사람들은 공권력(국가 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거나 무기력해집니다. 반대로, 공권력은 권력의 눈밖에 난 사람들이나 힘없는 백성에게는 한없이 강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국가 권력에 대항하면, 국가 기관 모독죄로 몰아세웁니다. 만일 종교인들이 잘못된 공권력에 대항하면, 정치와 종교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데 종교가 정치에 관여한다고 하면서, 파렴치한 종교인으로 몰아세워 세상의 우스개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몇몇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담보로 정치 권력과 결탁하려는 것을 가끔씩 봅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신념(신앙) 등이 이미 자신들의 안위를 유지하려는 수단에 다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에게 순교 정신은 공염불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와 진실을 위해서 과감하게 국가 최고 권력에 대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공권력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 수많은 교우가 국가 권력이 휘두르는 칼날에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맡겼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권력으로 진리가 거짓으로, 거짓이 진리로 왜곡되는 현실 앞에 그저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끝까지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그 일로 죽임을 당할지라도, 세상의 권력이나 반대 세력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명을 부여받은 우리는 어떠한 권력이나 반대 세력의 박해에 떳떳하게 맞서야 합니다.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주님께 의탁하는 굳건한 믿음을 가질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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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8 01)
(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억울합니다. 그는 평생을 의롭게 살았고,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한 여인의 증오를 받아 어이없이 죽습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예수님께서도 억울하게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모습이 많을수록 예수님의 죽음을 닮는 것이 됩니다.
조선 시대의 유학자 ‘조광조’는 중종 임금 때 등장합니다. 연산군으로 폐해가 심했던 ‘당시 사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정치 개혁에 열정을 쏟습니다. 인맥을 끊고, 제도를 바로잡고, ‘임금의 중립’을 위해 애썼습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혀, 전남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습니다. ‘기묘사화’입니다. 당시 37세로 한창 일할 나이에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지요. 연산군을 몰아낸 공신 중에 가짜가 많다면서 가려낼 것을 주장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모든 죽음에는 조금씩 억울함이 있습니다. 애매하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안타까움이 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죽음이 됩니다. 세례자의 죽음 역시 ‘이런 사실’을 묵상하게 합니다. 억울함이 깊으면 희생도 깊은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만 생각하면 ‘어린이의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억울함에서 ‘감사’를 찾아낼 때 아름다운 신앙으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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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8 02)


오늘 복음에서 느낄 수 있듯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뛰어났던 분이 어이없는 종말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한 여인의 증오로 의로운 사람이 희생된 것이지요. 역사 안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요한은 구세주의 등장을 준비한 분입니다. 그러기에 광야에서 살며 회개를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지도자들의 거짓과 위선을 과감하게 꾸짖었습니다. 임금에게까지 직언을 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분이었기에 편안한 죽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장수를 누리며 편안히 숨을 거두는 것은 세례자 요한에게 허락된 임종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미구에 당하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견하는 암시입니다.
세상에는 억울한 죽음이 많습니다. 세례자 요한보다 더 억울한 죽음도 있습니다. 그냥 묻혀 버린다면 정말 애달픈 일입니다. 그러한 죽음일수록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억울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과 연결되는 것인지요?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었음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죽음은 그 자체가 봉헌입니다. 그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후손들이 무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억울함’을 희생과 봉헌으로 감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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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8 04)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없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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