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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23 - 가해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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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6-23 ㅣ No.112803




2017
06 23 () 가해 예수 성심 대축일 복음 묵상



신명기 7,6-11
요한 1 4,7-16

마태오복음 11,25-30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성심은 거룩한 심장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심장이라는 단어는 인간 주체, 곧 인간 자신을 의미합니다. 심장은 사랑의 상징으로 오늘날 모든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유래되어 보편화된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심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을 찾으면, "수고하고 짐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시오."(마태 11,28-2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심장입니다. 요한복음은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심장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형 집행 제도를 보면 사형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심장을 창으로 찌르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옆구리를 찔렀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심장을 찔렀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거기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물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시오...생명수의 강이 그의 배에서 흘러나올 것입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소개한 다음 이 복음서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영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7,37-39) 그렇다면 "피와 물이 나왔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요한 복음서 고유의 표현입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특수 신심은 17세기 프랑스에서 꽃피웠습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비오 9세와 레오 13세 두 분 교황의 영향으로 예수 성심 축일은 세계 교회를 위한 축일로 반포되었고, 성시간과 첫 금요일의 신심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대 유럽에는 감상적 낭만주의가 인간 심성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감동하여 눈물을 잘 흘린다는 사실은 인간미 있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기 프랑스의 전제 군주였던 루이 14세는 "짐이 국가"라고 말하면서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신하를 알현하는 중 고개를 돌려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 신앙이 돈독한 사람의 처신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발생한 예수 성심 신심입니다.

그 시대 예수 성심 신심에 들어 있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보상하셨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어스러진 예수님의 성심에 대해서 우리가 보상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시관이 둘러쳐지거나 화살이 꿰뚫은 심장이 그려진 성화를 보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아파하고 보상하고자 하는 신심이었습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상처를 보상해 드리기 위해 성시간과 성금요일의 신심행위를 하였습니다. 19세기 가톨릭 교회 신심은 이런 성심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시기에 창설된 수도회의 절대 다수가 예수 성심 혹은 성모 성심과 관련된 이름을 붙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의 감수성도 변합니다. 같은 하느님이고 같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시대에 따라 사람의 신심 형태는 다릅니다. 시대적 감수성이 다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읽어내는 것도 다릅니다. 현대인은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행한 일들을 보고 그 사람의 마음가짐을 짐작할 뿐입니다. 오늘은 인간 마음을 직접 인식하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 마음을 지배하는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도 자기가 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논하기보다는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행동하셨는지를 관찰하고, 그 말씀과 행동을 발생시킨 마음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 합니다. 오늘 우리는 느낌을 위주로 판단하는 낭만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어떤 일에 감동하고 눈물을 쉽게 흘리는 감상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그것은 흘러간 한 시대의 인간 심성이었습니다.

현대인은 복음서들이 남긴 예수님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분의 삶을 배우려 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들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도 당신에게 배워서 같은 아버지의 자녀로 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율법과 제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은 하느님이 율법과 더불어 사람을 다스리고 지배할 권한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우리 삶 안에 살아 계셔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주장하듯이 하느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어놓고 그 준수를 지켜보다가 상도 주고 벌도 주는 분이 아니라, 무상으로 베푸시는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런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인간 세상 안에 살아 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도 버리지 않는 목자의 사랑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용서하고 병든 이를 고쳐 주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 사랑을 실천합니다. "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7)

예수님과 더불어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실천은 인류 역사 안에 여러 형태의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순교로 피를 흘려 그 사랑이 어떤 치열한 베품인지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명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떤 현세적 버림을 요구하는지를 보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선교로 혹은 복지활동으로 그 사랑의 실천이 어떤 헌신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여러 형태의 사랑의 실천과 더불어 하느님은 인류 역사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그런 여러 형태의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 안에 자발적 봉사와 희생의 실천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우리가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사랑이 예수라는 한 인물 안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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