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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완수 [ohsoo] 쪽지 캡슐

2020-11-15 ㅣ No.15004

+찬미예수님 

 

오늘 명동성당 08시에 도착해서 성당을 5바퀴를 돌며 묵주기도를 하며 순례자들을 기다리다, 명동성당을 만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시아로 떠나는 프랑스 선교사들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르 아브르” 항구나 “보르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항해하여 아프리카 대륙을 남쪽으로 한 바퀴 돌아서 인도양으로 나갔다. 또는 프랑스 남쪽의 “마르세유” 항구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가로지른 후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이르러 육로를 이용해서 수에즈까지 간 후 다시 배를 타고 홍해를 거쳐서 인도양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뒤에는 대부분 마르세유 항구에서 출발하여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후 아시아로 향하곤 했다.

 

인도양을 가로 지른 배는 인도의 고아 항구에 잠시 정박한 다음에 인도 대륙을 남쪽으로 돌아서 스리랑카를 지났다. 거기서 조금만 더 동쪽으로 항해하면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에 있는 믈라카 해협을 통과하게 된다.

믈라카 해협 끝에 있는 싱가포르를 지난 배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중국 남쪽의 항구 도시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에는 포교성성 극동대표부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었다. 이곳에서 선교사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시암, 베트남, 중국의 사천, 귀주, 운남 등 각자의 임지로 흩어졌다.

 

조선에 배속된 선교사들에게 조선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였다. 마카오를 떠나 중국 대륙을 종단하여 북상한 다음 북경과 만주를 거쳐서 압록강을 넘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었다. 초기에 입국한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 등은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 하지만 최초의 조선인 사제 김대건 신부가 해로를 개척한 뒤에는 대부분 상해나 홍콩에서 출발하는 중국 어선을 타고 조선 연안까지 왔다. 백령도 부근의 무인도에 조선인 신자들이 배를 대고 기다리다가 선교사들을 태워서 조선에 상륙시켰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조선 관헌들의 눈을 피하여 몰래 입국했다.

 

한양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주교가 상주하던 비밀 거처에서 조선어를 배우기도 했고 경기도나 충청도의 한적한 시골로 가서 신자들만 모여 사는 마을에 한 동안 머물렀다. 이들이 어느 정도 조선어에 익숙해져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또 신자들의 고백을 알아듣게 되면 본격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도록 주교가 선교사 개개인에게 지역을 할당 해 주었다. 이들의 주된 활동 무대는 한양과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서부 지역, 전라도와 경상도의 북부 지역 정도였다. 19세기 중엽 조선에 들어와서 천주교 선교활동에 종사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모두 합쳐 20명 남짓이었다. 이들은 평균 7년 정도 조선에 체류 하면서 활동 했다. 그 가운데 12명은 조선 관헌에게 체포되어 참수 형을 당 했고, 5명은 병으로 사망했다. 나머지 3명은 1866년 병인박해가 터졌을 때 중국으로 탈출했다.

 

도보순례신청 010-4239-1929

11/28일 - 3코스 약현성당출발 

12/12일 - 1코스 명동성당출발 

12/26일 - 3코스 약현성당출발 

 

클릭  하시면  도보순례사진

http://www.marcus-1.com/tmbi_cmm/?MODE=view&BD_CD=REVIEW1&MSEQ=9&page=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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