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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표징은 내안에 있다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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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2-13 ㅣ No.110059


 

참된 표징은 내안에 있다

 

- 윤경재 요셉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8,12)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확실히 믿게 만들어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요구는 미리 일정한 기준선을 그어놓고 대상을 저울질하는 자세였습니다. 적어도 이 선은 넘어야 표징으로 인정하겠으니 기준을 넘는 일들을 보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자기네 입맛에 맞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 가슴에 단 훈장을 더욱 빛나게 할 어떤 표징을 원했습니다. 표징을 보여주면 그 표징마저도 새 훈장으로 만들어 자기들 이마에 달 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바리사이들은 모세오경 구절을 적어 넣은 성구갑을 이마와 옷자락에 매달고 다녔습니다.

 

요한복음서 묵상을 지은 마르띠니 추기경은 요한복음서의 특징 중 하나를 믿다라는 동사를 무려 98회나 사용했는데 단 한 번도 믿음이라는 명사형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습니다. 그 의미는 믿음은 동사적 행위이지 정지된 상태나 사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20,31)

 

요한저자는 신앙행위의 대상과 목적을 예수님의 신원을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일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마르띠니 추기경은 우리가 이런 신앙행위를 하는데 장애요소로 다가오는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합니다. 첫째가 표지를 이루는 그 사물에만 집착하는 것이며. 둘째가 메시아 강박관념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메시아를 모시려는 강박증을 말합니다. 셋째는 종교적 자기만족으로 스스로 신앙에 대해 잘 안다는 착각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 내용에서 나오는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행동에 바로 이런 세 가지 장애요소가 모두 담겼습니다. 집착과 강박과 착각이 종합 세트처럼 한 데 담겼습니다.

 

미국의 신학자 레너드 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는 서로가 서로를 아는 걸 뜻한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듯이 말이다. 그건 아주 관계적인 의미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걸 믿어야 하는 신앙의 원리로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만 믿으면서 믿는 사람(信者)’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다의 뜻은 그런 게 아니다.”

 

예수께서 원하신 것은 교리를 믿는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14,20)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15,4)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14,27)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2,19)

 

다른 신약성경 저자들과 비교하면 요한 저자는 믿음의 행위를 주님을 아는 것에 두었고, 하느님의 빛을 향하는 데 두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집착과 강박과 착각을 내려놓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행위이지 훈장처럼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의 신자, 레지오 단원, 전례부 단원, 꾸르실리스타, 사목위원이라는 이름이 신앙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사물을 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는 필연적으로 착각이 따릅니다. 다른 하나는 신의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여기엔 착각의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기에 성냥개비와 성냥갑이 있습니다. 둘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불이 붙지 않습니다. 성냥갑 안에 담아 두어도 불꽃이 일지 않습니다. 성냥개비와 성냥갑에는 불의 속성이 내재되어 있지만, 둘이 만나서 마찰을 일으키기 전에는 그 속성이 발현되지 못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안에서 문고리를 열고 나와 하느님과 마주쳐 주기를. 우리가 성냥개비처럼 몸을 부딪쳐 스스로 불붙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처럼 표징은 어떤 외부적 사물과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내가 공유한 속성을 만남과 마찰을 통해 꺼내는 행위에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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