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170804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스크랩 인쇄

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8-04 ㅣ No.113636




2017
08 04 () 가해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레위기 23,1.4-11.15-16.27.34-37
마태오복음 13,54-58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
저 사람이 어디서? >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래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지?" 라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나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일반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도 온화할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지혜로울까?"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묵상을 잘 할까?" "저 신부님은, 저 수녀님은, 저 형제는, 저 자매는 어떻게 저렇게도 덕스러울까?"라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또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 본적이라도 있는가? 아니면 "저 사람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 "저 자매는 어떻게 다이어트를 해서 저렇게 살을 뺐지?" "저 자매는 어떻게 해서 저렇게 예뻐졌지?" "저 사람이 입은 옷이 참 멋있다. 어디에서 샀지?" 아니면 "저 사람은 성질이 되게 나쁘군. 아니 저런 나쁜 사람이 있나?" "저 사람 형편없는 사람이군. 신부가, 수녀가, 신자가 뭐 저래?" "저 사람은 부정축재 자야, 저 사람은 강도야, 저 사람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정말 무식한 사람이야.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등등.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또 우리도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한다. 과연 나는 어떤 소리를 주로 많이 듣고 또 어떤 소리를 듣기를 바라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취약점은 신자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 받은 사람이나,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사목 회장이나 구역반장, 단장이나 모두가 대개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이 그 사람이요, 그 생각이 그 생각이지 상대방을 크게 놀래 킬만한 사람이 별로 없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빛이라면 어둠을 밝혀주는 지혜로운 말을 들려 주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반 사람들이 우리 신자들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고도 아무런 차이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나 말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그들과 별 다른 차이가 없이 그냥 그냥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라는 놀라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어야 정말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를 희랍어로 Sofia(소피아)라고 하며, 그 뜻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판단력"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르고 그른 것이 있다. 그리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등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하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을 먼저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가?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드시고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1-10 참조)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또 설상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는 우리가 하는 직업에서, 사도직에서, 학교 공부에서, 활동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고 싶으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지혜의 폭은 달라질 수 있다. 말씀을 읽기는 읽되 그냥 읽는 것으로 그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는 깊은 샘물을 파듯이 깊이 깊이 말씀을 묵상할 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세계와 사고의 범위를 넘어 하느님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로 깊이 내려갈수록 더 깊고 맑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를 보고 "참 예뻐졌다. 건강해졌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그런 말보다도 "참 성숙해졌네, 굉장히 지혜로워졌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더군다나 성직자의 삶, 수도자의 삶을 살았는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진보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사람들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한 삶이요 크게 잘못된 삶이다.

묵상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듯이 맑은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저 사람의 저런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저 가정은 늘 화목하게 지낼까? 저 사람의 평화스런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저 사람의 기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들에게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이런 삶은 신앙인들 특히 복음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서 만이 가능하다.

신앙은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길들여 질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된다. 신앙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좁은 세계에서 나와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휠씬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그리고 멀리 내다본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그 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끝을 맺는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지혜인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믿음을 갖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생활에 충실 한다면 분명히 몇 년 후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놀랠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이 어디에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저 사람이 옛날의 그가 아니네! 저런 여유가, 저런 평화가, 저런 희생이, 저런 온유함이, 저런 사랑이, 저런 기쁨이, 저런 용기가 어디서 왔을까?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네." 하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가?

아니면 "저 사람은 저 형편없이 되어버렸네, 저 사람은 옛날 그대로잖아, 아니 저 사람은 더 못되었네, 성질은 더 나빠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척 추해졌구만. 불쌍도 하지!!!"라는 말을 들을 것인가?

인생은 빠스카이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나는 변해간다는 말이다. 어느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자문해보자.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277 2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