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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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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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6-23 ㅣ No.112801

 

2017년 6월 23일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제1독서 신명 7,6-11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6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며,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시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를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7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실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수가 가장 적다.

8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어,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끌어 내셔서,

종살이하던 집,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너희를 구해 내셨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참하느님이시며,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10 또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그를

멸망시키시어 직접

갚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 없이 직접 갚으신다.
11 그러므로 내가 오늘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명령하는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너희는 지켜야 한다.”     

제2독서 1요한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복음 마태 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뜨거운 열정으로 사목했던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도

절할 용의가 있습니다.”
정말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성인께서는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서 거드름

피우는 부자들을 찾아가 고개를

조아리며 손을 벌렸다고 합니다.

청소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예전에 ‘폼생폼사’라는

말이 유행했었지요.

그래서 같은 제목의 노래가

큰 인기를 얻기도 했었습니다.

즉,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뜻으로 자존심은 도저히

어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존심도 사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더 대댄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신 것 역시 자신의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은 큰 사랑입니다.

사랑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당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주신 것이었지요.

이 크신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는 날이 바로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의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노력하는 날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그 마음을

이렇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사실 주님께 무엇을 배우고 싶습니까?

많은 이들이 주님께 이 세상 안에서

잘 사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를 얻고,

아프지 않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내용을 보십시오.

기도의 주 내용은

이 세상 안에서

 편하게 살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놀라움을 가져올만한

기적을 배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나를 드러내는

자존심을 세우는 것과 반대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만 진정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평온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사랑이 중요할까요?

세상의 기준으로는 자존심이

더 중요한 것처럼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에서는

세상 안에서 드러내는

자존심은 별 것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면

당연히 주님이 원하시는 기준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겠지요?
예수 성심 대축일인 오늘은

동시에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사제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도록 기도하자고

교회는 권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권고대로 사제들을 위해

기도해주시길 청합니다. 

내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

어제 강의를 했던

서울대교구 가락동 성당 내부.

"희망의 힘"

(한홍, ‘거인들의 발자국’ 중에서)

미국의 한 중환자 병동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십대 초반의

어린 소년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처음

자원 봉사를 나온 대학생 한 명이

 멋모르고 중환자 병동에 들어와서

(원래 자원 봉사자들은

중환자 병동에는 들어오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이 소년의 기록을 보고

나이를 확인한 다음,

중학교 2학년 과정에 해당되는

영어 문법의 동사 변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물론,

소년이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 순진한 대학생 자원봉사자는

 며칠 동안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의사들이

 회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판정을 내렸던 이 소년의

상태가 기적같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주, 두 주가

지나면서 완전히 고비를 넘기고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에

모두가 놀랐는데, 다들 이 소년의

회복 원인에 대해 궁금해 했다.

얼굴의 붕대를 풀던 날 소년에게

그 원인이 뭐냐고 물었다.

소년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사실은 저도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한 대학생 형이 들어와서

다음 학기 영어 시간에 배울

동사 변화를 가르쳐 주기

시작해서 놀랐습니다.”
그 형은 “네가 나아서 학교에

돌아가면 이것들을 알아 둬야

 공부에 뒤떨어지지 않을 거야”

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확신했죠.
“아, 의사 선생님들이 내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나에게 다음 학기 동사 변화를

가르쳐 줄 리가 없지!”
그때부터 마음이 기쁘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희망은 사실 나도 모르게

내뱉는 한 마디 말 하나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어제 강의를 했던

서울대교구 가락동 성당 외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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