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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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기본교리( 28-6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1년∼18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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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3-16 ㅣ No.119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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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28-6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1821년∼1846년)
김대건 신부가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을
받기 약 한달 전,
동료 신부에게 보낸
 고별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천주께서는 제가 끝까지
이 모든 혹독한 형벌을
감수하도록
도우시기를 바라나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였습니다. 조선말기 정치,
사회적 암흑기에 태어나
모진 박해와 환란 속에서
믿음으로 진리를 증거하며
죽어간 김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836년, 모방신부는
조선인 사제의 양성이
시급하다고 느끼고 김대건의
총명함과 굳센 의지,
진실한 신앙심을 보고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최방제와 최양업과 함께
유학의 길을 떠나게 했습니다.
겨우 15세의 나이에
약 6개월간 육로만을 통하여
마카오에 도착한 때는
1837년 6월 6일었습니다.
1844년 12월에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8월에 서품되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서품된 바로 그 달 말에
조선 입국을 열망하고 있던
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비밀리에 입국한 김신부는
 서울과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활동을 폈습니다.
한편 사제의 부족을 절실히
느낀 주교는 매스뜨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속히 조선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를 하였고,
김신부는 1846년 5월에
서울을 떠나 황해도까지 갔으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결국 사학의 괴수로 몰려
국사범 취급을 받아
군문효수형의 선고를 받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 당하였습니다.
서품 받은지 겨우 1년째 되던 해
나이는 26세의 청년이었습니다.

한국 최초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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