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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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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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3-16 ㅣ No.119026

 

 2018년 3월 16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지혜 2,1ㄱ.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복음 요한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삶 안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 둘을 분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스토아학파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말했습니다.

사실 통제할 수 업슨 것에

대해 영향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 번은 비행기 환승을 위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원래 출발하는 시간보다

무려 3시간

연착되었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화가 너무 났습니다.

비행기 대합실에서

할 일도 따로 없었고,

늦은 시간이라 쇼핑을 할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공항이

 워낙 작은 곳이라서 그런지

인터넷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힘들다면서

공항 측에 항의를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즉, 통제할 수 없는

경우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상황에 영향을

받아서 화를 내고 있는

제 모습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릅니다.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처럼 보이지만,

이 상황에서도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자신의 마음입니다.

화가 나는 마음은 내 것이기에

분명히 통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책을 보다보니

3시간이 후딱 지나가더군요.
많은 이들이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시간을 쏟으면서

정작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에는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손해는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두말 할 필요 없이

 내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러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러한 기도보다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끊임없이

바칠 때가 많지 않나요?

그래서 주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모습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바꾸려는 억지를 보게 됩니다.

주님은 통제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는

우리 자신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뛰어넘는 통제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분께 아무도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일과 세상의 일,

 이 둘 사이를 올바로 정의하고

분리할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더 이상 주님께

 불평불만의 모습으로

다가서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 찬미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존 러스킨)


어제 강의를 했던 서울 우장산 성당.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1991년 일본의 사과 산지로

유명한 아오모리 현에

큰 태풍이 휘젓고 지나갔습니다.

그 결과 과수원에서 익어가던

사과들이 떨어져서

팔 수 없게 되었지요.

한 해 농사를 망쳤으니

농부들의 실망이 컸을까요?

그런데 떨어진 사과를 줍던

농부가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몇 개의 사과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과들을

 ‘떨어지지 않는 사과’라고

이름을 붙여서 팔았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사과들은 모두 높은

가격에 팔렸습니다.

‘떨어지지 않는’이라는 말이

 ‘합격’을 의미한다면서

수험생들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 되었던 것이지요.
태풍으로 사과 농사를 망친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것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과연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혹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원망과 절망으로 다가서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요?

성전을 지으면서 봉헌한 신자들의

묵주기도 꾸러미라고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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