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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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16 -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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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8-16 ㅣ No.113930




2017
08 16 () 가해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기념일)

신명기 34,1-12 / 에제키엘서 9,1-7; 10,18-22
마태오복음 18,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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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신명기 34,1-12

그 무렵 1 모세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자, 주님께서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2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3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야자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
4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의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5
주님의 종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곳 모압 땅에서 죽었다. 6 그분께서 그를 모압 땅 벳 프오르 맞은쪽 골짜기에 묻히게 하셨는데,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한다.
7
모세는 죽을 때에 나이가 백스무 살이었으나, 눈이 어둡지 않았고 기력도 없지 않았다. 8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압 평야에서 삼십 일 동안 모세를 생각하며 애곡하였다. 그런 뒤에 모세를 애도하는 애곡 기간이 끝났다.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가득 찼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실천하였다.
10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11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와 온 나라에 일으키게 하신 그 모든 표징과 기적을 보아서도 그러하고, 1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이룬 그 모든 위업과 그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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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에제키엘서 9,1-7; 10,18-22

주님께서는 1 내가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도성의 징벌이 다가왔다.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손에 들고 나와라.
2
그러자 북쪽으로 난 윗대문 쪽에서 여섯 사람이 오는데, 저마다 파괴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 필갑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와서 구리 제단 곁에 섰다. 3 그러자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때까지 자리 잡고 있던 커룹들 위에서 떠올라 주님의 집 문지방으로 옮겨 갔다. 주님께서는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 필갑을 찬 사람을 부르셨다.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5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6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집 앞에 있는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7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라. 그 뜰들을 살해된 자들로 채워라. 가거라.” 그러자 그들은 도성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쳐 죽였다.
10,18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 커룹들 위에 멈추었다. 19 그러자 커룹들은 날개를 펴고, 내가 보는 앞에서 땅에서 치솟았다.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들도 옆에서 함께 나갔다. 그들이 주님의 집 동쪽 대문 어귀에 멈추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
나는 크바르 강 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떠받들고 있는 생물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커룹임을 알 수 있었다.
21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넷인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같은 형상이 있었다. 22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보았던 모습,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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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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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08 16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기념일)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도록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이 가득 차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게 됩니다.
신약의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의 공동체가 아니라 은총의 공동체입니다. 잘못한 이웃을 단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이끄는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말고 상대방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았기에 신적 지혜와 온유로 이웃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카인이 질투심에 아벨을 죽였을 때, 시치미를 떼며 아우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변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탓을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그러한 변명을 이해하고 눈감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교회는 매정한 종이 아니라 자비로운 종의 모습으로 움직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 주는 성사입니다. 교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은 진리에 충실하고 은총 안에 머물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진실을 이야기하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웃의 잘못에 너그러운 ‘화해의 사도’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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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810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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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812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기념일)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레위 19,17)는 말씀에 따라, 형제적 충고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레위 19,18 참조)이며, 죄 지은 형제를 타이르라는 오늘 복음 말씀도 이 구절과 연결됩니다.
잘못을 일깨워 주어야 하는 것은 그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무관한 사람이라면 방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나의 형제이기에, 그를 포기하거나 잃어버릴 수 없으므로 그의 잘못을 일깨워 형제로서 살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결국 그렇게 권고하는 것은 그 형제에 대한 책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오늘 독서가 모세 오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며 눈을 감아야만 했습니다. 이집트 땅 파라오와 그의 모든 신하 앞에서 모세가 행한 모든 표징과 기적은 물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머무르는 40여 년 동안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그가 이룬 모든 위업과 모든 놀라운 대업을 보아서도, 하느님께서는 적어도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셔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에 하느님께서 무정하다 못해 야속하시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소명을 여기서 마감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모세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수용하는 이 위대한 종 모세의 모습,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면서 그 자세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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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8 13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폰시아노 교황과 성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교회란 어떠한 공동체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교회는 서로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서도록 촉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이처럼 회개하여 새롭게 변화된 삶을 위하여 교회의 각 구성원은, 서로서로 섬세한 배려로 설득하는 온유한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자세를 ‘단둘이 만나’라는 표현으로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랑은 우유부단함이나 감상적 태도, 또는 악습과의 적당한 타협이나 묵인을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심판자의 위치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른 삶이 무엇인지 올곧은 직언을 하는 증인으로의 역할을 피하지 말아야 함을 복음은 일러 줍니다. 병든 생각이나 삶의 태도를 치유하는 사랑은 비록 아픔이 따를지라도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강직함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치유와 회개의 삶은 자신보다 더 큰 진리에 순종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따를 때 비롯됩니다. ‘맺고 푸는’, 주님에게서 받은 교회의 권리와 진리 주장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길을 언제라도 비추어 보고 성찰하게 하는 기준인 진리를 교회가 담고 있음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과 흐려진 생각이 제자리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머니이자 교사’인 교회에 대한 신뢰는, 진정 진리에 따라 자신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그 빛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표지가 됩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쇄신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며 주님의 현존을 느껴야 합니다. 교회가 쇄신을 갈망하는 공동체,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하는 삶의 공동체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함께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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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8 14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오늘 복음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함부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몇 단계의 신중한 처신을 요구하십니다.
첫 번째는 죄를 지은 형제와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만일 이 단계가 없다면 죄지은 이가 자신의 잘못도 깨닫지 못한 채 죄인으로 다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별 있는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다시 그 죄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두 번의 타이름으로도 그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 앞에서 잘잘못을 따지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 단계를 거치고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를 더 이상 형제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단죄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러한 단계를 생략한 채 처음부터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고발하고 그를 단죄합니다. 또는 자신에게 죄지은 형제와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는 전혀 하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미워하기만 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사람에 대하여 뒷소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죄지은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려면 그의 잘못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깨우쳐 줄 때에도 상대편의 인격을 존중하며 신중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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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8 15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모 승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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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810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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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8 11)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공동체라는 말은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말은 곧 공동체의 특성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사랑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공동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가정 공동체, 마을 공동체, 교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 등. 그러나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한 집단일 따름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그분의 정신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선익(공동선)을 해치는 어떤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공동체로 돌아오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나 가정 공동체에서 얼마만큼 주님의 자녀로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 주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상처 준 일은 없는지, 그리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참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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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8 12)
(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를 타일러 주라고 하십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애정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칫 마음을 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물론, ‘본인도’ 상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라고 하십니다. 힘이 달리면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설득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공동체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죄인처럼 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조직이 ‘바리사이파’입니다. 율법 준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방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율법을 대하는 것처럼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청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둘이나 셋은 결코 숫자가 아닙니다.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라는 가르침입니다.
용서와 애정을 쏟아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 관계가 많을수록 기도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을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 그도 언젠가 나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함께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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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8 13)
(
성 폰시아노 교황과 성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남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는 것은 여간 용기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해타산이 없는데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기주의가 팽배한 현실에서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십상인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먼저 가족 안에서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결과에 관계없이 행위 자체가 말씀의 실천이 됩니다. 체념하며 포기해 온 관계라면 더욱 시도해 볼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정으로 시작하면 애정을 만납니다. 사랑으로 출발하면 사랑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이끄심인 까닭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을 모으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일’입니다. 상대를 바꾸려는 지적이라면 애정은 담기지 않습니다. 상대방으로 말미암아 받은 ‘내 마음의 상처’를 전달할 때 사랑이 함께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뒤의 기도라면 어찌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실는지요? 사랑과 애정은 언제라도 밝은 기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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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8 15)


성모 승천 대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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