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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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렬신부(화내는 것도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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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10-18 ㅣ No.115529

 

화내는 것도 예수님처럼

+찬미예수님 

지금 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세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18;22)”

베드로 사도는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되냐고 말하면

칭찬받을 줄 알았어요.

그때 유대인에겐 3은

가장 완전한 수이기에,

 구약에는 3번 용서하면

하느님이라 했지요.

그래서 7번을 용서하면

되겠지 하고 물은 것인데

예수님은 부족하다 하시니

기가 막혔겠지요.

무한히 용서하라는

예수님인데,

그 무한히 용서하라는 것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누군가 나를 이유 없이 패도

 “때리세요.”, 혹은 내 재산을

다 빼돌렸는데 용서해야지?

그것은 아닐 거예요.

 이런 예수님도 성서에 보면

화내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언제였나요?

성전에서 장사꾼들에게,

율법 교사들에게,

또 으뜸제자인 베드로에게도

사탄아 물러가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화와 우리의 화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화는

의노라고 하고

우리들의 보통 화는

분노라고 합니다.

그럼 의노와 분노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분이 잘 아는

성전에서 화내신 사건,

그 때는 성전에 들어가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어요.

입장료도 비쌌을 뿐 아니라,

 같은 비둘기라 하더라도

성전 안에서는

 천배가 넘었어요.

열심히 일 년간 잘 키워서

데리고 온 비둘기는

꼭 검식관이 퇴짜를

놓아서 새로 사야했어요.

장사꾼들은 대사제가 지정했고,

성전 곳곳에는  불평하는

사람 있는지 감시하고요.

이런 분위기에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상을 들어

엎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러나 아무도 그 분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겠지요.

왜? 그 분 뒤에서

나오는 아우라!

내 아버지 집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 셈이냐?

이렇게 예수님의 의노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되는 사상이나,

조직에게 보인

감정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보이는 분노는

지극히 이기적입니다.

요즘 서울 시내 한 복판에

길가는 사람이 묻지마

폭행을 하는 경우가 있지요?

CCTV를 보면 많은 사람이

지나가면서 말리지를 않아요.

버스 안에서도 소매치기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잠자는 척

하든지, 창밖을 본대요.

관여하고 싶지 않은 거지요.

현대인들이 의노를

보여야 할 때는 계산하고

앞뒤 재면서 의노를 못 보이고,

참으면 덕이 되고 하늘에

로를 쌓는 일에는 분노를 해요.

손해볼까봐, 자존심 상해서!

그러니 예수님도 화내셨는데

우리도 내면 어때?

아이구! 화라도 같은

화가 아니지요?

예수님의 화와

 우리의 화는 달라요.

 우리는 모든 것을

예수님을 따라 가야해요.

우리의 롤모델

(role model)이에요.

어떻게 기도할지 모를 때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분별이 안 되고 힘들 때도,

예수님은 이 순간에 어떻게

하셨는가를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분노할 때도

멋있게 분노해야한다는 거지요.

즉, 분노가 아니라

의노를 보여야 되고,

어지간한 것은

하느님께 맡기세요.

왜냐?

 하느님은 살아계시기에,

나를 모함하고 다니는 것

하느님이 아세요.

그러니 가서 그 사람

멱살을 잡고 경찰서 가보자?

변호사 써서

죽을 때까지 싸워보자?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알아서 심판 하시고,

알아서 벌주실 겁니다.

선을 굵게 살아야합니다.

 우리 살아가면서

마음의 평화를 깨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천국의 마음으로 있다가도

누군가 툭 던진 말 한마디에

금방 연옥이 되고 지옥이 되요.

아마 오늘 성지에 오기 전에

한바탕 싸우고 온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요.

성지만 가려는 날은

꼭 싸움이 일어나고,

꼭 그 전날 누가 시비걸구..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말려 들어가지 말고

그러려니 하세요.

어떤 때 나는 흰색인데

까맣다고 하면,

그거 증명할 필요 없어요.

하느님이 보시기에 내가

흰색이고 내 양심이

검은 색이 아니면 되는 거예요.

수백 명이 나에게 검다하여도

그 수백 명이 하느님에게

심판받을 것인데 뭐가 걱정입니까?

정말 두려운 것은

내가 위선을 살 때 그것이

정말 두려운 것 이지요.

그러니 담대하게 살아라.

동네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

그 심한 비바람에 휘둘려도

뿌리는 굳건하게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첫 번째는 예수님은

위선자를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요.

위선자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입니다.

물론 이 세상사람 가운데

언행이 완전히 일치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위선자 소리 안 들으려면 

‘자기가 한 말을 무던히도

지키려 애쓰는 구나’

라는 평가를 받아야 해요.

내가 한 말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은 축복받은 행위입니다.

 베드로 1서 2장 12절에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을

우리는 이교인 이라 부릅니다.

남편이, 시어머니,

동생이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 이교인 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보고

주변에서 하느님 찾아서

세례 받은 사람이

몇 사람 있을 것 같습니까?

오히려 반대로 성당가려는

사람에게 발을 건 적은 없었는지.

 20년 냉담한 자매의 냉담한

이유는 시어머니 때문이었대요.

자기는 하느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성모님이 성모님이 아닌

시어머니 얼굴로 보였대요.

묵주만 들면 시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는데 너무 힘들었대요.

 라틴어에서 스칸달룸

(scandalum)이라는 말이 있어요.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뜻이죠.

성당가고 싶은데 누구 때문에

자꾸 걸려 넘어져!

그 걸려 넘어지게 하는

존재가 바로 여러분이 아닌지

잘 생각해 보세요.

혹시 나한테 걸려 넘어져서

하느님에게 나가고 싶은데

못나가는 사람은 혹시 없을까?

 성당에 가면

열심하다는 소리 듣지만

정작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냉정하고, 사랑이라고는 없는

인간으로 보여 지고 있다면

나는 분명 예수님의

의노대상 1번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학자예요.

무덤 속에서는 구더기가

시신을 파먹고 있는데 아무리

회를 예쁘게 칠한들 뭐합니까?

 두 번째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은

주변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무관심은 무책임과 동의어예요.

내 가까운 사람에게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게 살아갈 때 예수님은

분명 의노를 보이실 거에요.

나의 무관심의 대상이 된

사람을 정직하게 꼼꼼히

살펴보면 참 많아요..

부모님들, 어르신들,

몇 십년동안 한 번 미사도

드려주지 않은 돌아가신

부모님, 배우자 등등

 무관심을 이야기 할 때

등장하는 성서속의 인물이

부자와 라자로지요?

부자는 분명히 동네사람이

문앞에 데려다 놓은

라자로를 먹여 살렸어요.

그런데 그 방법이

우스운 거지요.

유대인들의 부자는 물이

귀하니 고기 먹은 후 꼭 손을

식빵으로 닦잖아요?

그 빵조각 모아다가 대문 앞에

 있는 라자로에게 너 먹어라.

라자로는 그 빵이 뭔 빵인지도

모르고 고맙게 먹었어요.

온 몸이 부스럼이 난 라자로는

 개들이 와서 그 부스럼을

핥아도 치울 힘도 없었어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 많아요.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인 악 때문에 아무리

기를 써도 헤어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 너무 많아요.

열심히 살려고 해도 항상 힘들고,

라자로는 이런, 누구의 도움이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의 표시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을 부자는

자선을 베푸는 척 하면서

무시하고 있어요.

너는 내 덕에 산다!

나중에 죽어서 라자로는

천국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가서

아브라함에게 외칩니다..

“아브라함님, 그 업고 있는

라자로한테 물 좀 가져다

제 혀에 찍게 해주세요.”

“얘야, 내가 내려가고 싶어도

너와 나 사이에는 큰 깊은

골이 파여 있어서 못 간단다.”

“그럼 골 좀 메꾸시지요?”

“이놈아, 그 골은 네가 파논

 골인데, 내가 왜 메꿔?”

이 후반부 이야기는

안 나오는 이야기예요.(웃음)

구덩이를 깊이 파면 팔수록

점점 천국이랑 멀어지는 것을

모르고, 기를 쓰고 팠잖아요?

 성당에서 이일저일 열심히

하더라도, 집안일 소홀히 하면

하느님이 예뻐할 것 같아요?

새끼들 굶겨 가면서 봉사한다?

물론 어쩌다가는

 “엄마가 성당에서 늦으니

시켜먹어라” 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10여 년 동안을

매 주말마다 시켜먹으라고

하면 아니지요.

그 아이들이 건전한 마음으로

 교회에 오겠어요?

 우리들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챙겨야하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

제쳐두고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만 사랑은

베푸는 것은 위선입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잘 해야 합니다.

집안에 있는 사람에게

모질게 하는 사람일수록

희한하게 문밖을

나가면 가면을 써요.

가면을 많이 쓰는 사람은

피곤한 인생이지요.

하긴 집안에서는 가면을

써봐야 다 알잖아?

그러니 거칠게 막 대하는 거야.

 매너도 없고.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어요.

‘스스로 있을 때 경계하여라.’

혼자 있을 때 더 잘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혼자 있을 때 흩어지기 시작하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의노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은 하느님보다

자기 법에 얽매여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보니

늘 자기 잣대가 있어요.

자기 법이 많으면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 힘들어요.

이런 사람들은 특징은 첫째,

자기 잣대로 판단을 빨리해요.

두 번째,

자기 법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상처가 많아요.

분노가 많이 쌓여있는 사람일수록

방어기제로 벽을 쌓아요.

그래서 열등감이 많아요.

그리고 자기법이 많이 사람은

 에고이스트가 될 가능성이 커요.

남에 대한 배려가 적지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한히 용서하라 하셨는데,

용서의 반대는 무엇이라 생각해요?

분노? 저주? 이런 어두운 마음?

 오늘 우리들이 집에 가지고

가야할 것은 화도 종류가 있다는 것,

우리도 화를 내야할 때 분명히

 내야하지만 예수님을 닮은 화,

의노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느님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사상이나

조직, 인간들 앞에서 예수님은

가만있지 않으셨어요.

그것 말고 참으면 덕이 되고,

참으면 나중에 하느님이 알아서

심판해줄 실 것 같은 것은 참으세요.

내 주머니 이렇게 생겼다고,

나 억울하다고 까뒤집을 필요 없어요.

 절대 평화를 잃지 마세요.

왜 누구의 언짢은 말 한마디에

천국이었던 마음이

지옥으로 바뀌나요?

그러면 그 전의 마음이

천국이 아니었다는 말이 되요.

유리 같았다는 거지요.

내가 천국의 마음이 가지고

있었다면 누구의 돌 하나에

쉽게 깨지면 안돼요.

성령가운데 모시고 성체를

가까이 하면서 담대하도록 합시다.

 ♣ 2017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6/25)

배티성지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배티성지 -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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