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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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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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4-30 ㅣ No.111765

 

2017년 4월 30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사도 2,14.22ㄴ-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제2독서 1베드 1,17-21

사랑하는 여러분,

 17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복음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긴장을 하게 되면 입 안의 침을
목구멍으로 삼킬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침이 목구멍으로 삼킬 때
더럽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한 생각을 하시는 분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침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나의 침을 접시에
 뱉은 뒤에 다시 삼키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나의 침인데도 불구하고
망설이게 될 것입니다.
뾰족한 곳에 손끝이 찔려서
 약간의 피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이들이
망설이지 않고 찔린 손끝을
입에 갖다 대지 않습니까?
하지만 피검사를 위해 시험관에
담은 내 피를 마시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분명히 나의 피라도 마시는데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 밖으로 나오면 더럽다는
생각 때문에, 피를 마시는 것은
 끔찍하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나의 이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판단을
내리고 단죄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분명히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나의
판단만을 무조건 옳다고,
나의 결정이 최선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착각이 나의 이웃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웃을 힘들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판단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게 하지요.
때로는 절망과 좌절감을
 맛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커다란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인 메시아를 꿈 꾼 것입니다.
 병자를 고쳐주시는 등 깜짝
 놀랄만한 적을 행하시는 주님,
여기에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씀 등은 그들의 기대감을 더욱 더
크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처형으로 허무한 죽음을
당하십니다. 이때 사람들의
실망감은 얼마나 컸을까요?
 절망과 좌절감에 어떻게
할지를 몰랐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 죽음으로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생각,
더 이상 어디에 희망을 두어야
할지를 모르는 혼란감 속에서
‘엠마오’로 돌아가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 길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지만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틀에 있는
예수님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 그 자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내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집중하고
있다면 결코 나와 함께
걷고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떼어낸 빵을
받았을 때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성체성사를 통해
님을 알아볼 수 있으며,
주님과 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늘 주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기쁨과 행복의 길을 걷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받는 일은 불타오름에
나지 않으나 사랑하는 것은
마르지 않는 기름에 의해
빛남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것은
사라지지만 사랑하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릴케)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실패는 배움이다"
(‘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떤 장군이 전쟁에 참패해
동굴 속으로 숨었습니다.
실패를 치욕으로 받아들인 그는
목숨을 끊고자 했습니다.
그때 동굴 입구에 매달린
거미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거미는 열심히 거미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미는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거미줄 치는 일을 번번이
실패했지만 일곱 번째에
성공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장군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 난 겨우 한 번
실패했을 뿐이다."
실패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실패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실패가 삶 자체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주님의 선물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겨우 몇 번의 실패를 가지고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삶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소중한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엠마오라고 추정되는 라루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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