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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여성선각자 강완숙(골롬바) 순교 216주년 추모(3)[브레이크뉴스-201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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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pgu77] 쪽지 캡슐

2017-07-20 ㅣ No.213050

조선후기 여성선각자 강완숙(골롬바) 순교 216주년 추모(3)
 
 
 
박관우 역사작가  기사입력2017/07/20 [09:49]
 
▲ 박관우 역사작가 ⓒ브레이크뉴스

강완숙 관련 칼럼 2회에서 주문모(周文謨) 신부(神父)가 조선에 입국하여 부활대축일(復活大祝日)에 첫 미사성제를 거행하였다는 스토리까지 소개한 바 있는데 3회에서 그 이후의 상황을 소개한다.


주문모 신부가 1794년(정조 18) 조선에 입국하여 착한 목자(牧者)로서 사목생활(司牧生活)을 수행한지 6개월 만에 위기를 맞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밀고(密告)에 의하여 주 신부의 입국 사실과 거처가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외국 신부 체포령이 내려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일부 신자들이 행동을 미심쩍 하게 여겨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주 신부의 처소를 제공하였던 최인길(崔仁吉)이 얼마든지 피신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주 신부에게 피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자신이 주 신부로 변장하여 결국 체포되었는데 그러한 시간을 최대한 이용하여 주 신부는 피신하는데 성공하였으니 성직자를 생각하는 최인길의 마음에 고개가 숙연하여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당국에서 최인길이 주 신부가 아니란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를 체포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주 신부 영입을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윤유일(尹有一)과 지황(池璜)도 함께 체포되기에 이르렀으니 이를 을묘박해(乙卯迫害)라 한다.


이러한 박해로 인하여 위의 세 사람은 주 신부의 행방을 추궁하는 당국의 집요한 질문에 일체 언급하지 않았으며, 결국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여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주 신부의 행방을 말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세 사람의 심문 광경을 당시 포도청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죽음을 기뻐하고 삶을 미워하며 곤장 맛보기를 마치 엿 맛보듯이 하고 입을 꼭 다물어 한마디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최인길을 비롯하여 윤유일, 지황은 장살(杖殺)의 처분을 받고 사정없이 내려치는 곤장으로 인하여 장렬한 순교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때는 바야흐로 1795년(정조 19) 5월 12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박해의 여파가 세 사람의 순교로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 주 신부를 체포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이승훈(李承薰)은 예산으로 귀양 갔으며, 이가환(李家煥)은 충주목사로 정약용(丁若鏞)은 금정찰방으로 각각 좌천시켰다.


이와 같이 을묘박해는 규모 상으로 볼 때 대규모 박해는 아니었으나 정조의 측근이며, 남인계의 대표적인 학자들이 귀양 가거나 좌천까지 하기에 이르렀으니 정국에 미치는 파장은 간단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최인길의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체포를 피한 주 신부는 강완숙의 적극적인 협조로 그녀의 집 나무광속에 머물게 되었다.


여기서 당시 조선의 풍습을 간략히 소개하면 양반집은 관헌의 사찰과 가택수색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더욱이 양반부녀자가 주인인 경우에는 외부 남성들이 출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로 강완숙은 이런 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극비리에 주 신부를 은신시킨 것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 식견에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주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머무르게 된 것과 관련된 일화가 있어서 소개한다.


강완숙은 처음에 주 신부를 자신의 집 나무광에 피신시키고 식구들도 모르게 3개월 동안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강완숙은 주 신부가 나무광에 머무르게 한 점에 대하여 미안함을 느끼던 차에 자신을 믿고 아들이 살고 있는 덕산을 떠나 서울로 함께 상경한 시어머니에게 처음으로 주 신부의 존재를 알렸다.


강완숙은 시어머니에게 “신부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영혼을 구하려고 이곳에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신부님은 피신할 곳도 없습니다. 제가 목석이 아닌 이상 이러한 생각을 할 때에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저는 물론 신부님을 구하기 위해서 제 목숨을 내어놓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이 말을 들은 시어머니는 체포령이 내려 있는 주 신부를 은신시킨 것이 발각되면 화가 미칠 것을 알면서도 며느리를 믿고 주 신부의 처소를 나무광에서 사랑방으로 이동하는 것을 수용하였으니 이 어찌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와 더불어 강완숙의 의붓아들 홍필주도 뒤늦게 주 신부가 집에 머무르고 있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결국 이러한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홍필주는 주 신부의 복사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 역사작가.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저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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