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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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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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3-21 ㅣ No.119146

 

2018년 3월 2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다니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복음 요한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멕시코 어느 마을에는
온천과 냉천이 솟아나는
 아주 신기한 곳이 있습니다.
이 온천과 냉천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요?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빨래를 들고 와서는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군 뒤에 깨끗해진 옷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외국 관광객이
자신을 안내하는 멕시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좋겠습니다.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거저 쓸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큰 선물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멕시코 안내원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합니다.
“감사한다고요? 천만에요.
 감사하기는커녕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기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 주목하고
아파하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려지지 않습니까?
1940년대 미국인들은
10점 만점에 평균 7.5점의
행복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940년대에는
부족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상하수도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여건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행복도는 어떨까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니
 행복도가 훨씬 더 높아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무르기가
그분께로 오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죄로 인해서 진리이신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주님 안에 머물러야 진정한
자유를 얻어서 참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신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구원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대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주님을
죽일 생각만 하게 만든 것입니다.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집중하게 되면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없으며,
 그 결과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또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또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함께 하시는
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공포는
그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더욱 악화된다.
(러셀)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 이구아수 폭포.
"가능한 일을 바라봅시다."
    고등학생 때, 영화 ‘미션’을
보고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제를 꿈꾸는 있었던 저에게
영화에서 보여주는 선교사의 모습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배경인 남미,
특히 어마어마한 이구아수 폭포의
모습에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먼 남미에
 갈 수 있을까 싶었지요.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었던
저로써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주교님과 함께
이곳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곳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그보다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고 있는 부정적인
내 마음 때문에 실제로
못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불가능한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일보다 가능한 일이
많을 때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일들만을 바라보면서 가능한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상으로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직접 보고 이렇게 사진도 찍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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