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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종두인허원 박승석 서거 80주년 추모[브레이크뉴스-2017-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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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pgu77] 쪽지 캡슐

2017-02-24 ㅣ No.212202

잊혀진 종두인허원 박승석 서거 80주년 추모
 
우두법은 두창걸린 소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 사람에게 접종 두창 면역력 얻게 하는 법
 
박관우 역사작가  기사입력2017/02/24 [10:17] 
 
▲ 박관우 역사작가 ⓒ브레이크뉴스

역사에 존재하였던 인물이 세상을 떠난지 80년이 되었다면 그 세월이 길다고 볼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짧은 세월도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흐름속에 본 칼럼에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있으니 연천(漣川)에서 종두인허원(種痘認許員)으로 활동하였던 박승석(朴勝錫)이다. 박승석을 소개하기 이전에 그 행적과 깊은 관련이 있는 종두법(種痘法)을 살펴보기로 한다.


종두법은 흔히 천연두(天然痘)로 소개되어 있는 두창(痘瘡)을 예방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인두법(人痘法)과 우두법(牛痘法)이 있다.


인두법은 두창의 독(毒)을 인공적으로 인체에 접촉시켜 그 독력(毒力)을 약하게 하는 방법이며, 이에 반하여 우두법은 두창에 걸린 소의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 사람에게 접종해 두창의 면역력을 얻게 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인두법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에 의하여 공동연구된 이후 포천 출신 의관(醫官) 이종인(李鍾仁)이 널리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우두법(牛痘法)은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이 선구자(先驅者)라 할 수 있는데 박승석은 송촌보다 10년연하라 할 수 있으니 동시대에 함께 활동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제 종두인허원으로서 연천에서 우두(牛痘)를 시술(施術)하였던 박승석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 보기로 한다.


박승석의 본관은 반남(潘南)으로서 선조(宣祖) 대의 문신(文臣)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친교(親交)가 두터웠던 활당(活塘) 박동현(朴東賢)의 11대손으로 1865년(고종 2년) 12월 19일 박기양(朴沂陽)과 연안김씨(延安金氏) 사이에 5형제중 3남으로 경기도 연천군 군내면 상리 방골에서 출생하였다.


여기서 박승석이 출생한 1865년(고종 2년)은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景福宮)의 중건을 추진한 해이기도 하다.


박승석의 동생이 박승준(朴勝駿)이며, 1869년(고종 6년)생인데 1764년(영조 40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던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종손(宗孫)으로 출계(出系)하였던 점을 주목한다.


현석은 조선후기 숙종(肅宗) 대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재임한 정치가이면서 학자라 할 수 있는데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당쟁을 타파하기 위한 탕평책(蕩平策)을 최초로 건의한 인물이었다.


또한 청음(?陰) 김상헌(金尙憲)의 문인(門人)으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造詣)가 깊었으며, 대표적인 저서인 남계집(南溪集)을 비롯하여 남계예설(南溪禮說)과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포함한 수백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이러한 가문의 배경을 가진 박승석의 어린 시절을 포함하여 청년시절의 행적을 거의 알 수 없다는 것인데 그나마 알려진 사실이 일가 친척이 되는 박도양(朴道陽)의 아들로 출계하였다는 것인데 그 경위는 모르나 양부(養父)가 되는 박도양이 세상을 떠난 해에 박승석이 출생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생애의 대부분이 베일에 쌓여 있는 박승석의 행적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관보(官報)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 게재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박승석의 연령 49세가 되는 1913년 3월 8일부로 등록번호 1765번으로 종두인허원에 등록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종두인허원은 1899년(광무 3년)에 실시된 제도인데 우두를 전문적으로 시술하는 우두의사(牛痘醫師)의 역할을 하였다.


여기서 고증이 안된 부분이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기록이 종두인허원으로서 처음으로 등록이 된 것인지 아니면 대한제국(大韓帝國) 시대(時代)에 임명된 것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갱신한 것인지 이 부분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사실 49세라면 중년기에 접어 들었다고 볼 수 있는데 박승석이 경술국치 이전에도 우두를 시술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이렇게 본다면 박승석은 공식적으로 49세에 우두시술(牛痘施術)을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과연 어떤 계기에 의하여 우두시술에 뜻을 두게 되었는지 그 뿌리는 규명하지 못하였다.


2010년 3월에 연천의 군민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박승석이 1935년에도 우두시술한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이 해는 71세로서 박승석이 세상을 떠나기 2년전의 일이다.


박승석은 오랜 세월 우두시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연천에서 우두박생원(牛痘朴生員) 이라는 호칭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종두인허원으로서 활동하였던 박승석은 73세가 되는 1937년 12월 28일 강원도 철원군 신서면 도신리(현재: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도신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현재 단 한점의 유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로서는 사진만이라도 있었으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을 터인데 그것 마저 없으니 비통한 심정 금할 수 없다.


종두인허원 박승석의 서거 80주년을 숙연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당시 군민들의 생명을 수호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그 숭고(崇高)한 의술(醫術)을 잊지 않을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 역사작가.<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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