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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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 희망을 잀었을 때 - 반영억 라파엘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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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7-04-30 ㅣ No.111763

부활 3주일(루카24,13-35)

희망을 잃었을 때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랍니다. 사랑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 하십시오.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루카1,68.71 ;2,38) 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찬 행동을 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환호하였고 (루카19,37-38), 예수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19,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며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죄수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관한 모든 희망들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원수들에게 예속 당한다면 어떻게 그가 원수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과 많은 사람은 영광을 쫓았으니 메시아의 죽음은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절망에 절망을 더했습니다. 낙심과 불안이 커지니 슬픔만 커질 뿐입니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주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라고 선포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여정에서도 무거운 시련과 고통 안에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지만 내 눈이 가려 못보고 못 느낄 뿐입니다. 문제에만 매여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은총인데 당장은 은총으로 느끼지 못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뒷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으면 희망을 잃었을 때,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기 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망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길을 가면 그만인데 구지‘함께 묵자’고 붙잡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창세기 18,1-15의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결국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는 순간에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나그네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따라서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때를 놓치면 그만큼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개신교 신자에게도 전화를 많이 받게 되었는데 저에게 전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대략 “오늘도 한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으니 설교에서 바르게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미처 받지 못하면 메시지를 남기고 새벽에도 상관없이 전화를 합니다. 어느 날은 미안했던지 “요즘 사제님을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하고는 또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지나친 열심도 문제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고상하게 열심 해야 합니다. 친절하게도 문의할 것이 있으면 연락하시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었는데 신자분들에게 알려드릴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새벽에, 한 밤중에 시도 때도 없이 문의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똑 같은 사람되지요!…

 

이웃의 요구를 잘 받아주어야 하는데 특히 개신교에서 열성을 보이는 이가 이렇게 나올 때 우리가 성모님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알려줘야 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는 어떻게 모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마리아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목사님 부인에게는 사모님, 사모님 하잖아요!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과 순명,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탄생을 가져오셨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철저히 따르셨던 어머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을 먼저 알아채신 분이 어머니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지니신 아들,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순명하시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이런 것입니다. 곤란한 처지에 있게 된 사정을 미리 알아채시어 그 사람과 공명하시고 그것을 주님을 통해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어머니의 전구는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철저히 아들의 삶에 동행하셨으며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아들의 시신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분이십니다. 요람에서 무덤에까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직접 갈 수도 있지만 효과적으로 가기위해 어머니의 손을 빌어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치마폭이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당신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도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능하신 분이 큰일을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분 마음에는 늘 주님이 모두였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모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 예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깨우치게 됩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국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가는 것이고 결국은 주님의 능력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직접적으로 만나든 간접적으로 만나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란다면 성모님을 잘 모셔야 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실망과 좌절의 늪이라 생각될 때 더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하면 믿음의 눈을 뜨게 되어 비로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내일이 있어 행복합니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쁩니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에 사랑을 더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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