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간의 휴가
가메자끼요시에 수녀

1947년 1월 21일, “진정으로 그 길이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이 간다면 수도원에 가는 것을 막지 않겠다.”고 하는 아버지의 최종적인 허락을 얻어 쿠사쯔(당시 내가 근무하던 교회의 병원)로 돌아가기 위해 혼자 현관에서 구두끈을 매만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대문 밖까지 바래다 주던 어머니와 언니도 이 날은 나와 주지 않았다. 교회를 전혀 모르는 그들은 안방에 앉은 채 달랠 길 없는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다. 히라쯔까 역으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나는 멀어져 가는 정든 산과 언덕들, 온갖 추억을 담은 강줄기를 응시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 때 내 마음 속에 계속 울려온 것이 이 성서 구절이다. 들을 적마다 나는 5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음을 꿰뚫고 흐르는 뜨거움을 느낀다. 그 때의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이상한 힘에 이끌리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소명(召命), 틀림없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음을 오늘날까지 나는 변함없이 믿고 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고사하고 작은 공소 하나 없던 한적한 마을에서 어떻게 나 같은 것을 하느님은…’ 하고 자주 불가사의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그리고 이제 꿈처럼 지나가 버린 70여 년의 생애를 돌아볼 때 가슴에 솟구쳐 오르는 생각은 ‘아, 역시 올바로 들어선 길이었다. 하느님은 줄곧 나를 이끌어 주고 계셨다.’라는 확신과 깊은 감사뿐이다. 지금 나는 두 팔로 다 껴안을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기쁨의 곡식단을 받아 들고 하느님께로, 부모님과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내가 안과의사가 되려고 마음 먹은 것은 내과의사였던 아버지와 형부가 “여자는 왕진이 없는 안과가 적격이야. 늘 집을 지킬 수 있으니까.” 해서 였는데, 대학시절 세례를 받은 후에 생각이 달라졌다. 내과라면 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세례를 베풀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같은 반 친구가 나에게 학교 기숙사보다 환경이 좋은 곳이 있는데 거기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 왔다. 수녀회가 경영하는 그 기숙사에는 다섯 대학에서 온 20여명의 신자와 비신자가 섞인, 대체로 명랑하고 풋풋한 지방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학교 기숙사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수녀님들도 이해심이 깊고 상냥하여 철부지 같은 어리광도 언니처럼 받아 주었다.

뒷날 이들 기숙생 중 다섯이 수녀가 되었는데 모두 생존해 있다. 그 중 우정을 훨씬 넘어 하느님의 섭리 중 섭리로 맺어진 영신적 자매가 있는데 바로 그 시절의 오직 한 명뿐이었던 한국인 기숙생이었다. 기숙생들 대개가 지방에서 왔고 각기 다른 학교에 적을 둔 학생들이라 특히 저녁식탁에 함께 앉으면 나는 정신이 얼떨떨해졌었다. 지방 사투리가 여기저기서 남발하여 웃음이 터져나오고, 제각기 학교에서의 하루 얘기를 참새떼처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저귀게 되었다.

때로는 교리공부를 시작한다느니 언제쯤 영세할 것이라느니 등등 제각기 근황을 쏟아 놓다 보면 기쁨과 한숨과 선망이 한데 섞여 나오기도 했다. 이럴 때면 나는 의기소침해지고 처참한 기분이 되었다. 그간 아버지에게 몇 차례 가톨릭 입교의 허락을 청했으나 완고하고 엄격한 아버지는 그 때마다 한밤중에도 무릎을 꿇린 채 기나긴 설법을 하곤 했으니 생각만 해도 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나의 심적 고뇌를 깊이 이해하고 위로와 격려를 베풀던 친구가 바로 이 한국학생이었다. 마지막 학년을 앞둔 새봄, 고향집에 가서 일주일동안 쉬려고 떠나던 날, 그 친구는 전철역까지 나를 바래다 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불쑥 “이번에 집에 가면 아버지한테 영세 허락을 청해보면 어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 했고 그녀도 더는 말이 없었다 7일 휴가동안 내내 그 말이 내 마음속에서 메아리쳤으나 떠나는 날까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비록 거절당할지언정 청을 드려봐야 도리가 아닐까. 그 친구가 나를 위해 단식하면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면 어떻게 하지?’이런 고민 끝에 마지막 순간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드리면서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하여 “아버지, 제가 세례를 받고 싶은데 허락해주시면 정말 기쁘겠습니다.”하자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쓸쓸한 그림자가 스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그래, 좋아. 너 원하는대로 해라.”하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겨우 한 마디하고는 기쁨과 감격으로 솟구치는 눈물을 삼키며 대문 밖으로 뛰어 나왔다. 하마터면 문턱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전철역에는 그녀가 나와 있었다. 우리 둘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수도원이 바라다 보일 때 비로소 나는 떠나 오기 전에 있었던 아버지와의 대화를 옮기면서 가슴이 메었다. 내 생애에 이런 벅찬 기쁨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몇 달이 지난 후 친구는 그 7일간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 놓았다. “이번에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 보라.”하고는 아차! 했단다. 별 깊은 생각없이 한 말이었는데 곧 번민이 뒤따르더라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기도 바칠 줄 알고 그 엄격한 아버지에게 애써 청했다가 거절당하면 순전히 내 탓이 아닌가.’하고 말이다. 이래서 그 날로부터 그녀는 두 가지 의향을 두고 9일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아버지의 완강한 마음을 성심의 뜨거운 사랑불에 녹녹하게 녹여 딸의 청을 허락하도록 해 주실 것, 둘째는 날짜가 7일뿐이지만 9일동안의 간절한 기도를 7일 안으로 앞당겨서 아버지에게 감히 청을 드릴 용기를 줍소사 하는 어린애 같은 흥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의 미사와 영성체, 묵주 기도 5단, 성인 호칭기도, 또 통학시에 앉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 마치 보름달처럼 하자없이 둥글해야지 티끌만큼이라도 헤쳐지면 9일기도의 보람이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 생겨서 성인 호칭기도를 올릴 때에도, 매번 성인 한 분 한 분의 소매를 잡아 흔들면서 우리 부녀를 위해 전달해 줍소사하는 식으로 일일이 다짐을 하며 바치곤 했다는 것이다.

수녀원에서 미사가 없을 때에는 먼 거리로 새벽미사를 드리러 가야하는데 새벽인지라 버스에 좌석이 많이 비어 있는데도 앉을 수 없는 자신의 서약이 스스로도 어리석게 여겨져 쑥스러웠다는 것이다. 내가 기숙사로 돌아오는 주일도 아직 아버지에게 청할 용기가 없어 망설이고 있다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서 수녀원 미사 후에 다시 학교로 가서 영성체시에 신자들 마음에 모셔지는 성체의 주님께 일일이 “주님, 부탁합니다. 주님, 부탁합니다.”하며 입술이 마르도록 애절하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이런 일심불란의 어린이 아닌 어린이의 순수한 기도를 하느님은 못 들은 체하지 못하셨다고 믿어진다. 그 여름 7월에 나는 크리스티나라는 세례명으로 그녀를 대모로 세우고 영세했고 11월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영세 후 곧 이어지는 마지막 여름방학에 이 친구는 나를 위해 성모 방문수녀회의 시설인 성 데레사 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굳건한 믿음으로 기초닦기를 해주고 싶은 심정에서 귀향의 기쁨도 단념했으니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아버지도 내가 방학동안 친구와 같이 병원 봉사실습을 한다는 말에 넘어가 쾌히 허락해 주셨다. 이 요양원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시찌리가 하마라는 바다를 내려다 보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우리는 봉사자의 넓은 방을 얻어 기거하면서 주방일을 도우며 수녀들의 일과에도 참여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이 기간은 하느님안에 사는 훈련을 하는, 우리에게는 다시 얻기 어려운 특별 수련기간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하고 묻기로 약속하였다. 산책할 때도 , 주방에서 바쁘게 일할 때도, 밤에 모기장 속에서도 불쑥 그녀는 나에게 그 질문을 던지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네가 떠나버리면 나는 신자의 본분도 못해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라고 대답하곤 하여 그만 그녀를 어이없게 웃기곤 하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 때 우리의 심정은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더구나 그 친구는 이미 수도생활을 택한 신분이 아닌가. 드디어 이별의 때가 왔다. 그때는 전쟁이 한창이어서 폭격이 잦은 관계로 이미 부산경유는 통제되어 있어 불가불 니이가따로 해서 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인턴으로 있었으나 도저히 도쿄에서 그대로 헤어질 수는 없어 학교에 결석계를 내고 니이가따까지 동행했다.

저녁차로 다음 새벽에 가 닿으니 청진행 배는 3일 후에나 있단다. 친구는 성당을 찾아 신부님을 만나러 가자고 한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느냐고 했더니 여관에 3일이나 묵어야 하니 돈을 좀 빌려야 겠단다. 아는 신부님이라도 계신가 했으나 그럴 리가 없고 그저 신부님이면 된다고 한다. 물어 물어 신부님을 찾아갔다. 첫 인사로 시작하여 아무런 격의도 의심도 없이 친숙한 사이처럼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며, 그 얌전한 친구의 넉살좋은 일면을 보며 나는 놀랐다. 믿음이란 이렇게 사람을 바꾸어 놓는가? 이것이 가톨릭의 세계인가?
내가 그 때까지 살아온 세계와는 너무나 딴판인 세상에 감격하였다. 신언회(神言會)의 회원이라는 이 외국인 신부님은 가는 끈이 달린 앞치마를 목에 걸고 목공일을 하고 계셨는데 성화에서 보곤하던 성 요셉을 그대로 연상케 했다. 친구가 원하는 금액을 흔쾌히 내어주시던 그 모습은 오래오래 내 마음을 감동케 한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4일째 되는 아침이면 이 친구는 드디어 떠나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 전날부터 숫제 말도 못하고 찔금거리며 울먹이기만 하였다.

점심을 먹고 그녀는 말했다. “내일 아침 내가 배를 타고 떠난 후에 네가 기차로 온종일 혼자 눈물지며 도쿄까지 가야한다는 것은 차마 견딜 수가 없으니 내가 너를 먼저 밤차로 떠나보내고 배를 타는 것이 한결 마음이 가볍겠다. 밤에 기차를 타면 낮과 달라 좀 눈물 흘리다, 잠자다, 졸다 하노라면 밤이 새어 도쿄역에 도착하게 될테니까…”하면서 여관주인한테 도시락 하나 잘 준비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나는 할 말을 잊었었다.
기숙사를 떠나기 전에 그녀는 오랫동안 목에 걸고 아끼던 아주 섬세하게 조각된 예수의 십자고상을 내게 매어주었는데 이것은 친구의 가장 귀한 선물로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이 십자고상을 잃게되어 찾고 또 찾다 엉엉 울면서 헤매었다. 다시 한번 이별하는 아픔을 겪으며 그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이런 회신이 왔다. “십자가를 주님보다 더 애착하면 안되기에 네게서 그것을 걷우신 분은 네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시는 주님이심을 항상 기억하라.” 오래지 않아 그녀는 수녀원에 입회한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속세에서 몸을 숨겼다. 때는 1944년 이었다. 일본의 패전, 한국의 해방, 그후 소련군 38선 이북 주둔, 50년에 한국전쟁 발발 등 계속되는 전화와 비참한 재난속에서 근 10년동안 우리는 서로의 생사를 몰랐다.

어느 날 나는 가톨릭 구제회계통의 아시아지역 원조의 화보를 입수했다. Sign이라는 잡지였던가 . 그 표지에 큼지막하게 한 수녀가 흰 앞치마를 입고 줄서 기다리는 피난민들에게 애띤 얼굴로 옷 보따리를 나누어 주는 사진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꿈에도 못 잊던 친구의 얼굴이 아닌가. ‘아, 수녀가 되었고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 죽었던 사람 만난 것 만큼이나 놀라웠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눈물이 솟구쳤다. 시국이 어느정도 안정이 되어 외국과의 서신 왕래가 이루어진 어느 날, 옛 기숙사 수녀원에서 편지가 한장 날라왔다. 친구가 그간의 자기 소식을 수녀원장에게 상세히 써 보내면서 10년 전에 기숙사에서 같이 공부하던 가메자끼라는 학생이 살아 있으면 전해달라고 동봉한 편지가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생사를 모른 채 살아 이대로 생을 마치게 되면 천국에가서 친구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다 털어 놓으면 되겠지만 내가 수녀가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현세에서 꼭 알려주고 싶었던지라 나는 곧 회답을 쓰고 수녀복의 작은 사진을 한장 동봉하였다.

영세도 남달리 어렵게 한 내가 수녀가 되었다는 것은 친구에게는 저윽이 놀랄만한 사실이었고 또 그만큼 기쁜 소식임에 틀림이 없다. 헤어진 지 23년이 지난 후 우리는 일본에서 수녀복의 모습으로 처음 상면하였다. 그리고 근 15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내가 서울에 들릴 일이 있어 친구의 수녀원에서 수일간 머물러 쉬며 함께 지냈다. 친구 수녀는 1997년에 서원 50년을 맞았고 나는 내년 2000년이 서원 50년을 맞는 대희년이 될 것이다.

– 가톨릭 다이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