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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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렬신부(기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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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3-20 ㅣ No.119123

 

"기도하면"

+찬미 예수님.

한 주일동안 편안 하셨습니까?

사순 몇 주 드리고 있죠?

시간 빨리 가죠.

부활이 얼마 안 남았어요.

재의 수요일 날 그리고

순 제1주일에 사순,

40일이 무슨 뜻인지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첫째, 40일은

심판과 정화의 시간이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시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심판을 하고 정화하는 시기이다.

다른 사람 정화시키려

하지 말고 본인을 정화하자.

둘째, 은총을 받기 위한 준비기간이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40일 동안

단식과 극기 끝에 하느님께

천국 가는 지름길인 십계명을 받았다.

사순절시간이 간다고

다 기쁘게 부활 맞이하는 거 아니고,

축복받기 위한 준비를

각자가 해야 된다.

셋째, 다른 어느 때보다도

유혹과 시련이 많은 시기이다.

그런데 그 유혹은 먼 데서가

아니라 가까운 데서.

 친한 사람에게서,

가족에게서 많이 받게 돼요.

생각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그렇지만 시련과 유혹의 끝에는

하느님을 만난다고 그랬습니다.

지난 주일복음에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와 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 복음에는

광야가 아니라 산위로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기도하러 올라갔더니

어느 분들이 나타나신 것에요?

선배들이 나타났어요.

모세와 엘리아.

그리고 예수님이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실 때 특별히

누구를 데리고 갔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셋을 데리고 갔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언급이 없지만

다른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아와 만나 많은

이야기를 할 때 세 제자는

잠에 떨어져 있었다고 나와요.

만남을 못 보죠.

그런데 깨어나서 보니

선생님 얼굴이 이상해졌어.

그냥 빛이 하얗게!

그래서 ‘아니 졸고 있을 때

저 분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지?’

 하며 엉뚱하게

집 짓고 살자고 합니다.

기도하면 변해요.

저도 이렇게 미사하면서

안 보는 척 하면서도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다 훑어봐요.

아무리 머리 큰 사람

뒤에 숨어 앉았어도.

미사포를 푹 눌러쓰고

있어도 다 들어와요.

‘지난 주 보다 얼굴이

참 맑아지셨다, 참 밝아지셨다.’

그런 분이 있는가 하면,

‘한 주일 동안 힘든 일이

있었나 보다.’ 하는 분도 있어요.

다시 말하면 기도하는 얼굴과

기도 안 하는 얼굴이 표시가 나요.

기도하면 변하는데,

세 가지가 변해요.

첫 번째, 얼굴이 변해요.

걱정근심에 가득 찬 얼굴이

평화에 가득 찬 얼굴로 바뀌어요.

아주 교만이 가득 차 있던

얼굴이 겸손한 얼굴로 바뀌어요.

화가 얼굴에, 귓불까지

시뻘겋게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얼굴이 용서의 얼굴로 바뀌어요.

두려움과 세상 걱정에

어두웠던 얼굴이 담대함이,

영적 자신감이 얼굴로 바뀌어요.

‘올 테면 와봐.

내 뒤에는 하느님 계셔.’

라고 얼굴에 쓰여 있어요.

굳은 얼굴이

부드러운 얼굴로 바뀌어요.

기도하면 노안이 동안이 돼요

비록 몸이야 세월이 지나니까

허리가 꼬부라지고 얼굴은

쭈글쭈글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눈을 보면 애기 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어요.

여기도 많아요.

애기 눈을 갖고 있는.

예수님의, 성모님의 눈을

가지고 계시다는 거죠.

신앙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변하는 겁니다.

사십년, 오십년,

육십년을 살아도

아무 변화가 없다면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1년에 여러 번 피정 다니고,

세미나 받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그건 오히려 들었던 말들이

겸손의 재료가 되지 않고

지식이 되어

교만의 재료가 됩니다.

얼굴에 교만이 잔뜩 쌓여있죠.

‘우리 성당에 나보다 똑똑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까불지 마. 나 터줏대감이야.’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얼굴이 굳어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고서 도덕경에 보면,

‘부드러운 것은 살아있는 것의 상징이요

딱딱함은 죽음의 상징’이라고 그랬어요.

얼굴이 부드럽다는 것은

마음이 부드럽고 영혼이

부드럽다는 뜻이겠지요.

결국 신앙의 열매는

변화되는 것에요.

 오늘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는 중에 위대한 성인들을

만나셔서 힘을 얻으셨죠

주님수난에 앞서서 무슨

얘기를 주고 받으셨을까요?

‘주님, 힘내세요.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길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

뒤에는 부활이 있어요.

저희가 하늘에서 수많은

천사와 함께 주님 힘내시라고,

십자가 지고가다 쓰러지시더라도

일어서시라고

기도하고 있으니 힘내세요.

 담대하세요. 당신 어머니가

지켜주실 겁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갈 때는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올라갔지요.

‘이제 내 죽을 날이

며칠 안 남았는데,’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돌아가실지 다 알고 계셨으니,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우셨겠습니까?

그런데 응원군이 나타났다 가신 거죠.

그래서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가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실정도로 하얗게 빛난 거죠.

오늘 복음에 보면 이 세 제자들이

두려워했다고 그랬어요.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셨기에,

두려워 ‘여기에 우리 집 짓고

살면 안 될까요?’

라고 했을까요?

두 번째로 기도하면 뭐가 바뀔까요?

마음이 바뀌어요.

집착하는 마음에서

포기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요.

다른 말로 비우는

마음으로 바뀌어요.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게 돼요.

사람을 가슴에다 가득 채웠던

음이 하느님으로 채워져요.

우리는 다 체험하고 삽니다.

기도 며칠 안 해 봐요.

마음에 하느님은 없고 미운 놈,

서운한 놈, 꼴배기 싫은 놈,

30년 전 돈 떼먹은 놈까지 들어와요.

그런데 기도하면 사람이 물러나고

하느님이 차게 돼요.

따라해 보시겠습니까?

 ‘행복은 포기하는 것만큼 온다.’

지금 여러분 마음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유는 딱 하나.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에요.

그러나 지금 그것을

대충 포기하지는 마세요.

집착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것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하면 행복이 와요.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요.

여러분들, 기쁨의

기적을 원하시죠?

그러면 여러분 욕심의 마지막

하나까지 포기하세요.

몸 안에 있는 암이 낫는 원하는

기적을 원한다면

암까지도 사랑하세요.

여러분 몸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사세요.

암 갖고도 살만큼 살면

 되는 것에요. 그게 기적이죠.

있었던 암이 없어지는 것만

기적이 아니에요.

암과 동거하는 것도 기적이에요.

우리 신자들한테

기도 안 하면 시체에요.

아무리 본당활동을 많이 하고

많은 직책을 맡았더라도 기도하는

얼굴과 하지 않는 얼굴은 달라요.

말투부터 달라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절대 못 이겨요.

세 번째는 기도하면 행동이 변해요.

소극적인 마음에서

적극적인 마음으로 변해요.

그래서 전례에 임할 때도

적극적으로 임해요.

그전 같으면 미사 해치우러

나온 거고,

 미사보다도 미사 후 할 일이

더 머리 속에 내내 있었어요.

하지만 전례에 임하는

 자세도 끌려가는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임해요.

봉헌도 마지못해,

찌꺼기만 봉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는

제일 중요한 것을 봉헌해요.

봉사도 남의 눈치 보며

체면과 자존심 때문이 아닌,

누가 뭐래도 하느님만

바라보기에 묵묵히 일해요.

은총의 밤에 오신 분들이

우리 신자들이 행사 끝나고

난 다음에 일 마무리

하는데 깜짝 놀랐대요.

순식간에 천막이 없어지고

끝나면서도 생색내려고 ‘

신부님 저 일하고 가요.’

이런 사람 없더래요.

묵묵히 자기 일 하고 신부님이

눈길 한 번 안 줘도 그 앞에

나타나서 유세 떠는 법도 없고요

또, 무절제한 삶에서 절제가 있고

절도가 있는 삶으로 바뀌어요.

이기적인 행동만 하던 사람이

이타적인 행동을 해요.

남을 배려해요.

봉사할 때는 종이 하나 안 줍고

늘 뒤에서 말만했던

마음이 기도하면

따뜻한 마음으로 바뀌어요.

기도하면 얼굴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고 행동이

바뀐다고 했습니다.

기도해야 변화가 돼요.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문제가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에요.

제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응답의 문제다.’ 라고 늘 그랬죠.

성실하게 응답하고

변화되려고 애쓰려고

하는 것이 구원 받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묵시록 3장 16절에

‘네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너를 뱉어 버리겠다.’고 그랬어요.

기도하면 이렇게 분명히

변화가 되는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복음에는

졸고 있다 그랬죠.

기도하지 못하게 막는

영적인 졸음이 있어요.

그래서 늘 중요한

순간을 놓치고 말지요.

첫 번째, 영적졸음은

자기 편견이라는 것이 있어요.

자기 잣대가 있어,

자기 저울이 있어요.

이 사람은 끊임없이 판단해요.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든 눈금도

맞지 않는 엉터리 잣대를 가지고

남편을 재고, 식구들을 재고,

본당 신부를 재고, 수녀들을 재고,

심지어 하느님까지도 재요.

이 편견이라는 자는 우리가

절대로 기도생활을 못하게 막아요.

두 번째로 영적 졸음은 몸과

마음과 정신이 따로 노는

영적인 혼수상태가 있습니다.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은

 절대로 기도생활 못 해요.

몸은 미사시간 한 시간 내내

 앉아있지만,

머리는 딴 데 가 있어요.

죽은 미사죠.

묵주는 하루 종일 붙들고 있는데,

단 1단도 정신 차려서 해 본 적이 없이.

딴생각 하면서 손은

자동으로 넘어가는 것에요.

죽은 묵주기도. 죽은 봉사,

죽은 봉헌, 죽은 희생은 우리가 절대

기도생활 못 하게 가로막습니다.

반대로 영적졸음이 올 때

우리를 깨우는 것이 있어요.

첫 번째는 고통입니다.

원치 않아도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병 때문에,

또는 돈으로부터 고통이 옵니다.

그리고 고통이 오면 누구나,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힘들어요.

고통이 올 때 기쁘다는

사람은 거짓말이에요.

그리고 고독하고 외로워집니다.

그때 누구를 만난다는 겁니까?

평탄한 길보다는 고통의 길에서

하느님을 쉽게 만나요.

모든 것이 잘 될 때는

하느님 안 찾지만

힘들 때는 하느님이 보여요.

살려달라고 찾아요.

두 번째는 결핍감이라고 합니다.

항상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죠?

스스로 누구보다도 선하고,

누구보다도 정의롭고,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누구보다도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이들은 하느님께

용서 청할 일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할 일도 없기 때문에

결핍감, 즉, 부족하다는

생각이 없기에 결코 하느님의

사랑을 못 느끼죠.

용서도 받을 게 없다 보니까

하느님께 용서받을 것도 없고

달라고 하지도 않아요.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셨습니다.

‘선하면 선할수록 죄의식은 커진다.’

또 그 위대한 바오로 사도는 ‘

나는 죄인들의 괴수다.’

라고도 말씀 하셨어요.

프란체스코 성인은 다

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보다도 더 가련하고

비참한 죄인은 없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하느님 앞에

내가 얼마나 죄인임을

점점 깨닫습니다.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죄의식을 못 느끼는 죄입니다.

주님이 없으면 나는

한발 짝도 일어설 수 없다고

하는 이 결핍의식은 하느님의

용서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자 오늘 강론 정리합시다.

예수님이 타볼산에서

변화되셨듯이 우리들도 분명히

제대로 기도하면 변화가 됩니다.

세 가지, 얼굴이 변화될 것이요,

 마음이 변화될 것이요,

행동이 바뀔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가 좋게

 변하지 못하게끔 여러 가지를

가지고 기도를 막는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가 자기 잣대 가지고,

자기 편견 가지고 기도를

못하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또 어떤 때는 영적 혼수상태에

빠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은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갖는 동시에 기도 못하게

막는 그놈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느님은 때때로

고통을 허락하실 때가 있어요.

 우리가 너무나 졸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것이 충만해서

나는 더 이상 하느님께 청할 것도

 바랄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안 계시면 한 발짝도

일어설 수 없다고 하는 결핍감,

선하면 선할수록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드는 죄의식은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죄의식이 아니라

‘아 드디어 주님 만나는 길이 이거구나.’

하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그런 죄의식이죠.

지난 주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어떻게 싸우는지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오늘 사순 2주에는 기도하면

 어떻게 변화되는 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한 주일 동안 실패도 하겠지만

다시 한 번 일어서서 오늘 들은

말씀 마음에 새기도록 합시다.아멘.

2018년 사순 제2주일 화요일 (2/25)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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