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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선택과 장자들의 삶(창세25: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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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5-24 ㅣ No.120664

 

 

 

공동번역성서

 

 하느님의 선택과 장자들의 삶

 

(창세25:12~34)

12 사라의 몸종 에집트 여자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은 아래와 같다.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태어난 차례를 따라 적으면 아래와 같다. 맏아들 느바욧, 그 아래로 케달, 아드브엘, 밉삼, 14 미스마, 두마, 마싸, 15 하닷, 데마, 여툴, 나비스, 케드마. 16 이것이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이다. 이것은 그들이 모여 사는 천막촌의 이름이요, 열 두 부족의 대표 이름이기도 하다. 17 이스마엘은 백 삼십 칠 년을 살고 세상을 떠났다. 18 이스마엘 사람들은 하윌라에서 수르에 이르는 지방에 퍼져 살았다. 수르는 에집트 동쪽 아시리아로 가는 도중에 있다. 이렇게 그들은 모든 골육의 형제들과 맞서 자리를 잡았다.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의 역사는 아래와 같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 이사악이 태어났는데, 20 이사악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을 때 그의 나이는 사십 세였다. 리브가는 바딴아람에 사는 아람 사람 브두엘의 딸로서 아람 사람 라반의 누이였다. 21 리브가가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이사악은 야훼께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야훼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는데, 22 뱃속에 든 두 아이가 서로 싸우므로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와서야 어디 살겠는가!' 하면서 야훼께 까닭을 물으러 나갔다. 23 야훼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24 달이 차서 몸을 풀고 보니 쌍둥이 였다. 25 선 동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 몸이 털투성이였다. 그래서 이름을 에사오라 하였다. 26 후 동이는 에사오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했다. 리브가가 그들을 낳은 것은 이사악이 육십 세 되던 해였다. 27 두 아들이 자라나, 에사오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질이 차분하여 천막에 머물러 살았다. 28 이사악은 에사오가 사냥해 오는 고기에 맛을 들여 에사오를 더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하였다. 29 하루는 에사오가 허기져 들에서 돌아 와 보니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30 에사오가 야곱에게 '배고파 죽겠다. 그 붉은 죽 좀 먹자' 하였다.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고도 부르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31 야곱이 형에게 당장 상속권을 팔라고 제안하자 32 에사오는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상속권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였다. 33 그러나 야곱은, 먼저 맹세부터 하라고 다그쳐 요구하였다. 에사오는 맹세하고 장자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 34 그리고 에사오는 야곱에게서 떡과 불콩죽을 받아먹은 후에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는 이제 이사악과 리브가 그리고 이사악의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로 넘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이사악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도 역시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불가능함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악의 이야기도 그의 아내 리브가의 불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 21절로 갑니다.

(25:21) 21 리브가가 아기를 낳지 못하였으므로 이사악은 야훼께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하느님은 분명 모리야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후손)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후손)가 그 원수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22:17)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그 계약의 현장에 이사악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씨가 잉태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악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느님의 계약을 확실하게 들었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무려 20년을 기다렸습니다.

왜 하느님은 그토록 오랫동안 이사악에게 자손을 주시지 않으셨을까? 역시 아브라함 때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후손의 탄생과 번성과 완성은 인간의 불가능함 속에서 하느님의 주권과 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진짜 약속의 씨(제라,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탄생될 교회는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자격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갈라3:16) 16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 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 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축복하시면서 네 씨, 네 자손, 네 후손이라 지칭한 이는 다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는 항상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聖肉身과 그 분의 십자가의 삶과 죽음이 인간의 요구나 열심에 의해서가 아닌 하느님 자신의 계획에서 시작되어 완성된 것처럼 그 예수 안에서 죄 된 몸을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聖都들 또한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로 출생하게 됨을 성경은 반복적이며 점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지 한 번 볼까요? 오늘은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로 창세기에서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거쳐 로마서와 히브리서까지 연결을 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재미있으실 거예요. 본문 23절로 가보자구요.

(25:23) 23 야훼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태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태에서 나오기도 전에 두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억누를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야곱과 에사오가 태중에 있을 때에 이미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한사람은 계약의 라인으로 또 한 사람은 유기(遺棄)된 자들의 라인으로 갈려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바오로는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로마9:1018)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14 그렇다고 하느님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고 말씀하셨듯이 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17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너를 시켜서 내 힘을 드러내고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

여기에는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이 있지요 하느님께서 야곱과 에사오가 태중에 있을 때 에사오는 미워하셨고 야곱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는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矜恤)히 여기시는 하느님 마음대로 택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그것은 모두 하느님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라 합니다. 심지어 파라오는 하느님의 일에 쓰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그를 강팍(强愎)하게 놔두셨다 라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아니 우리 인간은 무슨 꼭두각시입니까?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누구는 천국가고 누구는 지옥엘 가게?’ 그게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첫째 아담 속에 들어 있는 人本主義 자들의 질문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밑에 붙어 있습니다.

(로마9:19~24) 19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24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귀히 쓸 그릇을 만들기도 하고 천히 쓸 그릇도 만드는 것처럼 인간을 택하시는 것도 하느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의 선택과 결정에 순복하여 살아야 할 피조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그 분의 주권과 선택과 예정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순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의 書信에서 교회들에게 이렇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베후1:10~11)10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시고 뽑아 주셨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절대로 빗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고 11 또한 여러분에게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아닌 하느님의 부르심과 선택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은혜 앞에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성숙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요.

 

앞서 보신 것처럼 하느님은 분명 이사악과 리브가에게 작은애가 선택된 자이고 큰애가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가 작은를 섬긴다는 것은 장자권이 작은 아들에게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그 長子權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요.

아브라함 가정에서의 장자권은 가나안에 대한 企業의 상속과 父系의 축복에 의한 계약의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약속의 후손에 대한 장자권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가계에는 하느님의 계약이 흐르고 있고 그 계약을 상속받는 자가 하느님의 택한 라인임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장자권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장자권이 이미 두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결정되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이사악과 리브가도 하느님의 선택과 주권을 신실하게 믿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장자권을 상속하려 했습니다.

(27:14) 1 이사악은 늙어 눈이 어두어 졌다. 어느 날 그는 큰아들 에사오를 불렀다. 2 '얘야!' ', 어서 말씀하십시오.' '너도 보다시피 내가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 3 그러니 너는 사냥할 때 쓰는 화살통과 활을 메고 들에 나가 사냥을 해다가 4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이사악이 자기 마음대로 육신의 맏아들 에사오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합니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이사악이 에사오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25:28) 28 이사악은 에사오가 사냥해 오는 고기에 맛을 들여

이 구절을 직역하면 이사악은 에사오의 사냥한 고기를 항상 그의 입에 두었다입니다. 이사악은 에사오의 사냥물로 만든 고기를 항상 즐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장자권을 에사오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눈앞의 별미에 하느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바꿔 먹어 버린 에사오와 흡사하지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선택 이 번복 되나요? 그러한 에사오의 불신앙에도 장자권은 야곱에게 돌아가지요.

 

리브가는 어떻습니까? 리브가 역시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장자권을 주실 것임을 직접 들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던 간에 하느님을 신뢰하고 기다렸어야지요. 그런데 리브가는 집에서 從容하게 자신을 도와주던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야곱에게 자신의 꾀로 장자권을 탈취하게 합니다. 본문 28절의 이사악은 에사오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 하였다라는 구절은 이사악과 리브가가 하느님의 약속을 근거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감정에 이끌려 서로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장자권을 상속하게 할 것임暗示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리브가가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않고 하느님의 계약을 믿으며 가만히 기다렸어도 그 장자권은 야곱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이사악과 형 에사오를 속이게 만듭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하느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자신의 꾀를 의지하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온갖 방해 속에서도 하느님의 계약의 선택은 제길을 찾아갑니다. 야곱은 그 불신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평생을 통해 그 불신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느님의 계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의 말년에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면서 자기와 형 에사오에게서 일어났던, 하느님의 선택에 의한 變改할수없는 장자권의 상속 의미를 믿음 안에서 확실히 깨닫고 순종하여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왼손을 얹고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손을 엇갈려 올려 축복함으로 하느님의 주권에 순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가 그의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이사악과 야곱 또한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 지고 완성되어져 간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주권과 선택에 의한 장자권의 상속은 이제 한 개인에서 하나의 민족과 국가의 차원으로 발전하여 좀 더 크게 설명이 됩니다.

(출애4:22~23) 22그러면 너는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23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일렀건만 너는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들어라, 내가 이제 너의 맏아들을 죽이리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장자가 되는 데에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 있었나요? 이스라엘이 이 세상 어떤 민족보다 잘난 민족이기에 그들이 선택되어진 것인가요?

(신명7:67) 6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 몸바친 거룩한 백성이 아니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에 민족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너희를 뽑아 당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이다. 7 야훼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들보다 수효가 많아서 거기에 마음이 끌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너희는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민족이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자격이나 하느님을 만족시킬만한 조건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냥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은 자들을 하느님 마음대로 택하신 것입니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은 자들이라는 표현은 정말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중에 수효가 가장 적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을 찾지 않으셨음을 강조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장자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들인 성도들의 모형으로 택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는 어떤 자격이나 공로에 의해 구원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스라엘의 선택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로 가면 영적 이스라엘인 진짜 장자들이 나옵니다.

(히브12:22~23) 22그러나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고 23 또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의 장자들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인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이스라엘 등이 설명용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진짜 장자들인 성도가 어떻게 하느님의 장자가 됩니까? 자기들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닌 하느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 받아 공짜로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창세기부터 이렇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느님의 장자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되는지가 아주 명쾌하게 설명이 되어 있지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느님의 장자들이,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장자들이 하느님의 저주에 의해 죽어갈 때 하느님의 장자들인 이스라엘은 어떻게 그 죽음을 면하고 새 생명을 얻게 되나요? 어린양의 피에 의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양의 피에 의해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이집트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의 구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집의 장자는 거기서 즉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여 인방과 문설주에 그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 무리중 많은 잡식구들(12:38)이 함께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개입되지 않고 오직 어린양의 피의 공로에 의해서 장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섬기는 장자들의 정체성은 어린양의 피 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스라엘에게 죽음의 신을 넘어가게(pass over, 過越)하는 어린양의 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 역시 이집트 세상의 장자들처럼 모두 다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요한8:44) 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본성을 드러낸다. 그는 정녕 거짓말쟁이 이며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렇게 모두 마귀의 장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귀의 장자들이 하느님의 장자들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어떻게요? 어린양의 피의 공로, 즉 십자가로요. 감격스럽지 않으세요?

(에페13-7)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내용이 여기에 다 들어 있지요? 우리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아 豫定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하느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모두 장자라고 하는가? 장자는 아버지의 기업을 모두 상속받는 자이기 때문에 우리 가 장자인 것입니다. 양자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자는 상속에 대한 법적인 구속력을 내포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는 적자(嫡子)에게는 유산 상속의 의무가 없었지만 양자(養子)에게는 반드시 법적으로 유산 상속을해야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양자의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아들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종종 하느님의 백성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지요? 그래서 여자분들 많이 섭섭하지 않으셨어요? 아들의 개념도 상속의 필연성을 담고 있는 단어인 것이지 딸과 아들 등의 성별을 구분 짓는 단어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모든 풍요와 평안과 안식을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로마8:17)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공동 상속자)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까?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진짜 하느님의 맏아들은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앞에서 우리 갈라디아서에서도 확인했지요? 아브라함의 후손, 씨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聯合되어 죽고 다시 태어나 우리가 작은 예수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를 예수로 봐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장자들이 된 것입니다.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거쳐 장자들의 총회인 교회로 이어지는지 연결이 되시지요?

 

하느님의 계약의 장자권은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에사오가 그 장자권을 약간의 떡과 팥죽 한 그릇에 포기해 버립니다. 그것은 평소에 에사오에게 하느님의 계약의 장자권에 대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25:2934) 29 하루는 에사오가 허기져 들에서 돌아 와 보니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30 에사오가 야곱에게 '배고파 죽겠다. 그 붉은 죽 좀 먹자' 하였다. 그의 이름을 에돔이라고도 부르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31 야곱이 형에게 당장 상속권을 팔라고 제안하자 32 에사오는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상속권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였다. 33 그러나 야곱은, 먼저 맹세부터 하라고 다그쳐 요구하였다. 에사오는 맹세하고 장자의 상속권을 야곱에게 팔아 넘겼다. 34 그리고 에사오는 야곱에게서 떡과 불콩죽을 받아 먹은 후에 일어나 나갔다. 이렇게 에사오는 자기의 상속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참 어처구니없지요?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하느님의 계약의 장자권을 팔아버립니다. 히브리서는 그러한 에사오의 행동을 불경스럽다라고 가혹하게 비난합니다.

(히브12:16) 16 또 음란한 자나 음식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아 먹은 에사오 같은 불경스러운 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시오.

여기서 불경스러운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베벨로스문지방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에사오가 문지방을 밟듯 하느님의 계약을 짓밟았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육신의 배를 불리는 떡과 팥죽이 하느님의 계약보다 더 소중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한 에사오를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는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배가 고프다고 내가 이제 죽게 되었다고 엄살을 피우며 팥죽 한 그릇에 하느님의 계약의 장자권을 내 팽개친 에사오와 우리가 그렇게 많이 다릅니까? 우리는 정말 하느님의 계약과 우리의 성도 됨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있나요? 혹시 우리도 에사오처럼 우리의 신앙과 성도됨을 팥죽보다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여 여전히 세상의 힘과 쾌락을 신앙과 바꿔 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하느님을 원망하고 세상의 유익 앞에서 하느님의 백성다운 삶을 쉽게 놓아버리는 그런 삶의 모습이 우리 안에는 없냐는 말입니다. 그건 하느님의 계약과 우리의 믿음을 문지방을 짓밟듯 밟아버리는 행위, 즉 망령된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 관해 우리 주님이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르4:16~19) 16 씨가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17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지 않아 오래 가지 못하고 그 후에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를 당하게 되면 곧 넘어지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18 그리고 씨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19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 와서 그 말씀을 가로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염려와 유혹과 욕심과 환난과 핍박 앞에서 언제든지 내 팽개쳐지는 하느님의 계약과 우리의 신앙, 그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사오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팥죽만도 못한 神秘主義奇福主義에 하늘 所望을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나 하늘희망보다는 팥죽을 주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팥죽을 약속하는 교회는 모두 크게 부흥을 합니다. 사람들은 하늘 希望보다는 눈에 보이는 팥죽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하늘 희망, 즉 장자권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처럼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계약에 대한 믿음은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은 것입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한자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 것처럼 우리의 모든 소유와도 바꿀 수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혹시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다 사라진다 해도 나에게 하느님께서 상속하신 장자권이 있기에 나는 행복해야 합니다. 그게 성도의 삶의 자세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조그마한 시험과 불행과 고난 앞에서도 그 장자권을 소유한 나의 실체를 잊어버리고 부들부들 떨며 하느님을 원망 하지요 그래서 신비주의와 기복주의에 열광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하느님의 장자권이 있습니다. 기죽지 마세요. 당당하십시오.

 

그러한 하느님의 장자들은 하느님의 진짜 장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듯이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라 이 땅에서 버림받고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이 역사와 인생의 주인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건 단지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에 연합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는 작은 자의 모습으로 살게 되지만 결국 그들을 밟고 조롱하던 큰 자들이 어린 자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십자가의 원리를 함의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는 십자가의 원리를 한 편의 드라마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떨어진 하느님의 계약 성취의 선발대로 이집트로 보내졌던 사람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을 당한 어린 자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결국 그를 버린 큰 자들이 어린 자인 요셉 앞에서 요셉을 섬기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에 우리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의 인생 속에서도 끊임없이 십자가의 원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 삶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서 종이 됩니다. 어린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주인집의 제반 상황을 주관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안주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가게 됩니다. 역시 어린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서도 제반 사무를 도맡아 합니다.

그가 파라오의 궁에 들어갔을 때에도 이집트의 역사를 좌우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요셉의 아비 야곱이 세상 권세 잡은자의 대표적 상징인 파라오에게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거지 야곱이 파라오를 축복합니다. 누가 주입니까? 축복하는자가 승리자입니다. 작은자가 큰 자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요셉, 야곱 모두 세상에서 큰 고생과 억지와 불행과 아픔을 겪고 약자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역사는 그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역사를 당신의 백성들을 주인공 삼아 운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 주인공들이 맡은 역할은 당해주고 섬겨주고 사랑해주고 용서해주고 안아주는 어린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세상의 힘을 의지하여 자신의 배를 섬기던 큰자들이 그 어린 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죽도록 고생을 하던, 버려진 막내 요셉을 장자라 하는 것입니다.

(대상5:2) 2 유다가 동기들 가운데서는 세력이 컸으므로 그의 혈통에서 영도자가 났으나 장자권만은 요셉에게 있었다.

그게 바로 장자들의 총회에 들어온 하느님의 장자들, 즉 성도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 받은 삶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그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에베소서 1 장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하느님의 복은 마귀의 장자들이었던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복은 하느님 백성의 완성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부어지게 되는 하느님의 열심과 그분의 능력을 가리켜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이 아닙니다.

 11절에 보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사악에게 복을 주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정작 하느님의 복을 받은 이사악은 잉태도 못하고 있는데 하느님에게 쫓겨난 이스마엘자손들은 하윌라에서 부터 아시리아로 통하는 이집트 앞 수르까지(18) 이르는 방대한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마엘이 받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왜 성경이 이라는 단어 아래에 그러한 극명한 대조를 해 놓은 것일까요?

하느님의 복은 이 세상 것을 확장시켜 주시고 확대시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계약을 이어가는 복인 것입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그 계약 속에서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 불림을 받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는 것을 복이라 합니다.

그래서 장자 권을 가진 작은 자 야곱이 큰 자인 에사오에게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에사오는 400인의 사병을 소유한 부자요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을 받은 야곱은 평생을 사기나 당하고 쫓겨 다니다가 결국 절름발이가 되어 이국땅에서 숨을 거두는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깨닫게 되고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희망되심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목표지점이며 그 삶이 바로 승리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예수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여 살아내야 하는 예수의 형제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예수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 하느님께 환도뼈를 맞아 절름발이가 되지요? 그는 평생 다리를 절며 살게 됩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모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세상에 대한 연정이 끊임없이 우리를 미혹하여 하느님도 이길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살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이 절름발이 이스라엘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가 사시기에 그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가 하느님의 맏아들 예수의 삶을 넉넉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도우십니다.

(창세 49:23~24) 23 사람들이 활을 쏘며 무섭게 다그쳐 몰려 왔다가 24 활은 꺽어지고 팔마다 힘줄도 끊어졌다. 이것은 야곱의 강하신 이의 팔이 하신 일, 이스라엘 목자의 이름으로 이룩된 일이다.

따라서 그 부분을 잘 다듬어 번역을 하면 야곱의 전능자의 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 되신 목자로부터 요셉의 힘 이 나온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인내와 사랑과 섬김과 신앙은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 이스라엘, 즉 교회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느님의 장자만들기의 목적은 장자를 만들어 아버지인 하느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장자를 만들어 우리에게 세상의 힘을 쏟아부어주는 게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악한 세력을 상징하는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세상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에게 온전히 순종의 제사를 드리는 장자들을 만들어 당신만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우리를 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건지신 장자인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로 레위지파를 세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민수 3:11~13) 11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12 '나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레위인들을 뽑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처음 태어나는 모든 맏아들을 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은 나의 것이다. 13 처음 난 것은 모두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에집트 땅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을 치던 날, 나는 이스라엘에서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모두 나의 것으로 구분하여 나의 것으로 삼았다. 나는 야훼이다.'

레위지파는 오직 하느님 섬기는 일만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장자들의 대표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 분께 순종하는 것으로만 기뻐하고 만족하고 행복함을 누리는 사람, 그 것이 너무 좋아 팥죽이 아니라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다는 굳은 신앙으로 오늘을 사는 사람, 그것이 참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어줍지 않은 신비주의나 기복주의에 여러분의 고귀한 장자권을 팔아먹지 마세요. 여러분 앞에 닥친 배고픔으로 하느님을 원망하지 마세요. 그것은 하느님의 장자권을 내 팽개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이 다 날아간다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하늘의 장자 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 것을 잘 지키시고 누리시고 그로 말미암아 평안을 잃지 마십시오.

 

 

오늘도 주님께서 同行하심을 믿고 行하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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