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믿음이다.
   모든 것은 오로지 믿음에 달려 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연옥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녀에게 하느님은 심판관이 아닌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었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가르침은 7개 문항에서 더 잘 설명될 것이다.

1) “예외적인 연옥이 상례가 되었다”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교회가 매일같이 미사 중게 기억하여 기도를 올려주는 그 사람들은 사실 그곳에 갈 필요가 없던 사람들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죄를 짓고 시련과 많은 괴로움을 겪고 죽은 뒤에 저승에서 다시 한번 더욱더 심한 고통을 겪게 하려고 우리를 이 지상에 보내시진 않으셨다. 누구나 지상에서 시험을 끝낸 다음에는 하느님께 곧장 갈 수 있는 충분한 은총을 받는다. 연옥은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한 사람들을 위한 임시 처방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께서 예외적으로 생각하신 것이 상례가 되었고, 죽어서 곧장 하늘나라에 간다는 그 상례가 예외가 되고 말았다.

2) “‘불가피한 것에 만족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에게 연옥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내게도 역시 그것을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도 그것을 원하지 않아야 한다! 연옥에서 겪는 고통을 아주 잠시라도 대면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오늘날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죄 많은 삶을 살면서 자신을 연옥의 위험에 내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 신비가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연옥에서 겪는 가장 작은 고통도 지상에서 겪는 가장 큰 고통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연옥은 더 이상 자비의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 그것을 말해준다. “너는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루가 12, 59)
   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라고 쉽게 말한다. 이것은 사실 엄청난 오류다. 사람들은 거기서 그냥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지상에서는 결코 겪지 못했던 그리고 겪을 수도 없었던 그런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을 것이다. 불쌍한 영혼들이 저승에서 자신들에게 닥칠 일을 지상에서 미리 안다면 연옥은 아마 텅 비게 될 것이다.

3) “연옥은 헛되이 낭비된 시간이다”

   데레사 성녀는 말한다. “나는 안다, 오로지 성인들의 영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보속의 장소에 들어갈 수 있는 공로가 내게는 없음을. 나는 안다, 연옥불보다 사랑의 불이 더 정화시킬 수 있음을. 나는 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고 싶어하실 리가 없다는 것을. 또한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나로 하여금 ‘예수님은 달래주지 않으실 거야.’ 라고 느끼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연옥의 정화 없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만들어주셨을 때 그 연옥이 완전히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면, 연옥은 아주 큰 은총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에 대한 잣대는 죽는 순간 이미 최종적으로 제출된다.” 라는 데레사 성녀의 견해는 옳다. 그 후에는 아무런 은총도 더해지지 않는다. 연옥에가지 않는다고 해서 놓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4) “긍정적인 하느님 상이 필요하다”

   데레사 성녀는 수련 수녀들에게, “연옥에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거의 충격적인 발언이다. 이 말이 맞다면, 수백만 명의 그리스도 신자들은 연옥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틀림없이 하느님을 모욕하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 사람들은 아무런 근거 없이 연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믿는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바로 그들 곁에 서서 그들을 기꺼이 도우려고 하시는데도 하느님을 전혀 참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연옥에 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전의 부정적인 하느님 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앞 세대의 수많은 신자들처럼 부분적으로는 엄한 하느님 상을 교육받아 왔다. “우리를 벌주시는 것은 당연해. 우리는 그래도 싸지 뭐… .”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얀세니즘, 정적주의 칼빈주의 등의 이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5) “사랑은 두려움을 물리친다”

   죽음에 당연히 뒤따르는 하늘나라에 대한 문제는 바로 믿음의 문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믿음이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은총을 방해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모든 것은 오로지 믿음에 달려있다!
   그러나 사랑의 완성 없이 믿음은 있을 수 없다. 반대로 믿음 없는 사랑 또한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요한 사도의 말이다.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요한 4,17-18)
   이 구절은 우리가 논하고 있는 주제에 밝은 빛을 던진다. 심판날은 우리가 죽는 날이다. 사랑을 이룬 자는 죽는 순간, 자비롭고 관대하신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연옥에서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똑같은 은총이 병자성사 안에도 존재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병자성사가 그 실제적인 열매로서 죄에 대한 징벌의 면제를 가져다 준다고 가르친다. 성사를 받고 죽는 환자를 지켜본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고 하늘나라를 열망하고 요구함으로써 그들의 기쁨과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때때로 확인한다. 이것은 그때까지 믿음이 적었던 사람이나 심지어 큰 죄 중에 살아 온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대 알베르토 성인이나 보나벤투라 성인 같은 스콜라 철학의 대가들이 가르친 바대로, 그러한 사람들도 연옥을 거치지 않고 곧장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병자성사의 큰 은총을 본다.

6) “꼴찌가 첫째가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자성사를 받긴 하지만, 자신이 살아온 행실 때문에 곧장 하늘나라에 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연옥에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는 신비가들의 글을 자주 읽을 수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아니 거의 모두가 죽음을 앞두고 병자성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분명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또한 필요한 통회와 순종으로써 병자성사를 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미 오래전부터 지니고 있던 잘못된 태도와 악덕을 간직한 채 죽을 때까지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레사 성녀는, 많은 공로를 쌓은 많은 성인들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연옥으로 가야만 했다는 말을 언젠가 들었다고 전한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정의는 때로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녀는 우리에게 선한 공로를 다버리고 차라리 빈손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갈 것을 권한다. 성녀는 자신의 대모인 큰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비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첫째가 언제나 첫째로서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꼴찌가 첫째가 되는 예는 아주 많다. 데레사 성녀는 예수님의 자비에 대해 말하면서 십자가 오른쪽의 강도를 예로 든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바로 이해할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내가 말하려는 바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데레사 성녀가 룰랑 수도원장(중국의 선교사)에게 썼던 것처럼,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완전한 사랑의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은총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단, 우리가 믿을 때에만. 그러면 우리에게 그때까지 달라붙어 있던 모든 ‘인간적인 나약함의 흔적’ 이 사라지고 우리가 하늘나라에 있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7) “데레사 성녀의 가르침-제3천년기를 윈한 메세지”

   사람들은 데레사 성녀가 예전부터 전해오던 연옥에 대한 모든 인습적인 견해들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나아가 선언할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죄인들이, 공로가 많은 위대한 성인들보다 하늘나라에 쉽게 들어가는 이유를.
   데레사 성녀는 믿음만으로 충분하다고, 공로는 아무런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고, 오히려 하늘나라로 곧장 가는데 장애가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또한 죄는 전혀 장애가 되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완전히 엉망인 인생을 살았더라도 오로지 믿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그렇게 죽은 자를 곧바로 당신 품에 받아들이실 것이다. 아무런 업적도 내세울 수 없을 때, 더욱이나 비참한 처지일 때,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손쉬운 방법인가!
   성녀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미소한 자들과 겸손함 자들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지름길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길을 가고 있다. 성녀는 마리아 언니에게 이렇게 썼다. “하느님께서 내 모습 가운데 마음에 들어 하실 모습은, 내가 나의 미소함과 나의 부족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에 의탁하는 무조건적인 믿음… . 그것이 나의 유일한 보물입니다. 사랑하는 대모님, 나의 보물이 당신의 보물이 되어선 안 될 이유가 있나요?”
   사람들은 데레사 성녀가 성덕을 통속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이가 그녀의 작은 길에 다가갈 수 있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그 길이 하늘나라로 곧장 가는 길이 되었다고… . 그 길은 더 이상 예외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아주 현명하게도 이 교회 박사의 ‘보물’ 을 일단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 길은 걷기 좋은 길이 될 것이다. 특히 작은 영혼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위해 데레사 성녀는 자신의 책 ‘ B’ 의 끝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당신께 애원합니다. 당신의 눈길을 많은 작은 영혼들에게 보내주시길… . 나는 당신께 애원합니다. 당신 사랑에 합당한 희생 제물로서 작은 이들을 많이 뽑으시길.”
   그렇다. 성녀의 놀라운 메시지에 귀 기울인다면 그러한 작은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 아주 많아질 것이다… . 그러면 연옥은 ‘하늘나라로 가는 피할 수 없는 실제적인 건널목’ 이 되기를 그만둘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아기 예수의 성녀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준다! 성녀의 보물 같은 메세지가 이룬 신학에는 퍼 올릴 것이 많다. 여기에서는 성녀가 쓴 것 중에서 단지 연옥에 대한 메시지만 주로 살폈을 뿐이다. 그렇다. 실제로 연옥에 대한 메시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죽음 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하는 문제는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할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페브로니아 수녀가 연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한다면, 저승에서 보내온 그녀의 무언의 메시지가 우리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데레사 성녀는 말한다. “수녀님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 여기 있지 않았을텐데요… .’ ”  (편집자 주 – 가르멜 수도원의 부원장이던 페브로니아 수녀는 연옥에 대한 데레사 성녀의 생각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성녀를 비난했다. 그리고 일 년도 되지 않아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죽은 지 3개월 후 데레사 성녀에게 나타나 자신이 연옥에 있으니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데레사 성녀는 일기에서 이 수녀가 연옥에 있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마리아’ 112호 참고)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다. 페브로니아 수녀는 저승으로 가는 ‘잘못된’ 문을 지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경우처럼 연옥을 피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럴 수 없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누구도 그들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은 데레사 성녀가 교회에 보내진 참된 선물이라는 점이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묵시록적 시대에 데레사 성녀를 우리에게 인도자로, 위로자로서 보내주셨다. 우리가 본향으로 갈 때, 연옥에 대한 그녀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참된 은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간절한 말씀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루가 8,8)

– 후버트 반 딕 신부님 (독일 DerFels 에서)
– 마리아 1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