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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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께서 그토록 바란 그 용서를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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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7-03-21 ㅣ No.11089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남이 나를 섭섭하게 했던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 하지만 남이 나를 고맙게 했던 일은 어느새 잊는다. 남에게 뭔가를 베풀었던 일은 오래 기억한다. 하지만 남에게 상처 주었던 일은 까맣게 잊는다. 이게 우리 모습이요 우리네 인생살이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큰 아픔을 준 이를 용서하지 못한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으려면 우리도 다른 이를 용서해야만 한다. 미움은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고통만을 가중시킬 것이기에.

 

1995년 미국 오클라호마의 연방 정부 청사에 대한 폭탄 테러 사건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큰 참사였다. 이 범인은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많은 언론이 이를 지켜본 이들이 어떠했는지를 인터뷰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허무한 마음뿐이었단다. 후련해질 것으로 기대한 게 전혀 그렇지 않았다나. 이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자신이 받은 상처의 치유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말해 준다. 진정한 치유는 오직 용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야 치유되기에. 죄인인 우리를 주님은 언제나 용서하셨다. 그러므로 미루어 온 용서를 그분께 청하자.

 

남에게 도움 받았던 일은 되도록 잊지는 말자. 그러면 감사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으리라. 다른 이를 원망하는 일도 적어지고 그만큼 삶이 풍요로워지는 걸 느끼리라. 인생은 고마운 일만 기억하며 살기에도 너무나 짧다. 그러기에 큰 아픔을 받아 상처만 남은 것은 주님께 의탁하고 맡겨드리자. 미운 마음은 그렇게 다 드리자. 붙들수록 자신만 불쌍해 질 뿐이니까. 무엇보다 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자. 그게 용서의 출발이다. 용서받고 싶은 것만큼 꼭 용서하자.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 행위이니까. 용서받는 일도 은총이지만 용서하는 일은 더 은총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용서받지 못해서 고통을 받고 있을까? 예수님도 우리 죄 때문에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스스로 안으셨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용서가 어려운데,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산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용서해야 할 이만 생각하면 사실 용서가 잘되지 않는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면 용서할 게다. 우리가 용서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 시건방진 생각의 뿌리는 그분에 대한 교만에서 나오기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하느님의 자녀로서 사랑 실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자 했다.

 

도대체 언제쯤, 어디서 평안한 마음으로 용서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은 죄를 용서받고도 동료의 작은 작은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남이 베푼 것을 당연하게여기는 자이리라.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다.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유혹이다. 주님께서 주셨기에 모든 것을 감사의 시각으로 보아야 할게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틀에 맞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대로 실천하라신다. 우리는 분노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주신 것을 발전시키고 다른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인간이다. 용서는 선택이 아닌 의무이다. 그분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새긴 계약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하신 것을 베풀면서 내 자신이 먼저 이행해야 한다. 그러면 하늘의 그분께서도 꼭 그렇게 하실 것이기에.

 

어떤 대가로 베푸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 외에는 달리 설명할 게 없다. 용서는 무엇을 바쳐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며 뉘우치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하느님께 무엇을 바쳐야만 한다는 생각을 과감히 떨치자.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어느새 기복적이며 이교적인 요소들이 많이 스며들었다. 하느님은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사랑으로 준 선물에 대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유혹에 불과하리라.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가엾은 마음일 게다. 이렇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오직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입고 회개하여 형제들을 향해 가 마음으로부터서로 용서하는 것일 게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가 자라나 큰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시리라.

 

이 시각 못다 한 용서를 한번 되돌아보자. 베드로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그 많은 일곱이 아닌, 단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한 게 우리 주위에 수없이 널려있다. ‘네가 먼저라면서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라며 용기를 갖고 용서를 청하자. 그 마무리는 주님께서 다 해주실 것이다. 용서받은 일도 용서하는 일도 우리에게는 다 평화이다. 이렇게 베드로는 잘못한 형제를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세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한술 더 떠 일곱 번이라고 말한 것이리라. 이는 내심 칭찬받고 싶은 의도일 게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흔일곱 번이란 사실 무한수를 뜻하신 것이다. 끝없이 용서해 주라는 거다.

 

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길밖에는 없다. 모든 것을 예수님 기준에, 당신을 죽인 자들까지도 용서하신 그분 기준에 맞추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이는 정의가 아닌, 악이다. 어떻게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그분께서 그 끔찍한 십자가에 매달리셨나? 사랑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보다 더 큰 악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셨다. 하느님께서는 왜 불의를 받아들이라 하셨나? 불의를 헤쳐 나가 악을 극복해야만 더욱 성숙해지기에. 이렇게 악에 처해서도 용서와 사랑을 베풀 때만이 진정으로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질 게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그러한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느님께서 진정 나에게 원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이 사순 시기에 깊이 묵상해 보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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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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