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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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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5-22 ㅣ No.120629

 


2018년 5월 22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 야고 4,1-10

사랑하는 여러분,

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4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5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9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복음 마르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형제님께서 어느 날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습니다.

한 눈에 반했고 이 여자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 형제님은 그 뒤에 이 자매님께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상대방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말과 행동을 삼가고

상대방에게 호감이 갈 수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통했는지

둘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 둘은 서로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합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 펼쳐질 것만

같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무엇이든지 내 말을 들어주고

 믿어주던 아내의 모습이 아니라

끊임없는 잔소리로 인해 ‘과연

내가 사귀던 여자가 맞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아내 역시 크게 실망했습니다.

언제나 예의 바르고 성실한 모습은

 어디가고, 결혼 후에 자신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구를 뿡뿡 뀌고

주말에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누워서 배를 내밀고 벅벅 긁는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혼 후 바뀐 상대에 대해

실망했다는 말씀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결혼하면서 사람이

 바뀐 것일까요? 아닙니다.

나와 결혼을 했으니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래 내 모습은 이렇다면서

상대방에게 이해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좋아한다면

내가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뀔 수가 있습니다.

 연애할 때의 심정으로 살아간다면

나의 말과 행동은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앙을 처음 갖게 되었을 때,

우리들은 사랑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바뀌고 맙니다.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죄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따라서 처음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갖게 되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부르심에 응답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그 사랑을 쫓아

 살기 위해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들은 첫 마음을 잃습니다.

그래서 높고 낮음에

대해 논쟁을 벌입니다.
주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세상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법칙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법칙을 따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신형철)

산책하기 좋은 날.

"용서"

어렸을 때, 친구와 심하게

말다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주먹질이

오갈 정도로 분위기가

아주 험악해졌지요.

그런데 한 친구가 우리 둘 사이에

서서 말리면서 “왜 싸우는 거야?”

라고 묻습니다.

저는 친구의 잘못을 이야기했고,

상대방 역시 저의

잘못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저희를 말리던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왜 싸워?”
지금은 정말로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상대방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실제로 꽤 오랜 시간을 냉랭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순간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용서할 수 없다’면서

계속해서 용서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워서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면

그때 용서하겠다면서 조건을

내세웠던 것은 아닐까요?
내 안에 갇혀 있으면 절대로

 주님의 품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주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살아보자고요.

지금의 어렵고 힘든 시간을

거뜬하게 이겨내면서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 강화도의 북문에 다녀왔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0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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