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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녹) 2019년 1월 22일 (화)연중 제2주간 화요일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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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2018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2169 굿뉴스 [goodnews] 스크랩 2018-12-26

 

2018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서울대교구 

춘천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대구대교구

부산교구

청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루카 2,14)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구원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아 여러분과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갈라진 북녘 형제들에게도 주님의 성탄이 새로운 희망과 빛이 되어 어렵고 힘든 마음속에 큰 위로와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천 년 전 한밤중에 베들레헴의 작은 마구간에서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그 아기는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구원을 위해 당신 스스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것도 구유에 잠들어 있는 가난하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우리가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구세주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똑같이 고통과 죽음을 겪음으로써 우리에게 구원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 구원의 계시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필리 2,7 참조)고 하셨습니다.

올 한 해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에 대한 전 세계의 기대가 우리나라에 집중되었습니다. 작년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다행히 올해 초 동계올림픽의 북한팀 참가를 계기로 긴장 분위기가 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남북한 정상이 최초로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만난 이후에 대화를 이어갔고 양측 문화예술단 공연이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열렸습니다. 이러한 대화의 물결은 북한을 국제사회에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 최초의 북미회담도 열렸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기회가 될 때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 평화가 우리들의 가장 큰 삶의 주제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삶은 평화와 행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평화는 단순히 외적으로 전쟁과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최대한 존중받고 시민 생활의 공동선이 보장되며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삶을 의미합니다. 반세기 전 이미 성 요한 23세 교황님은 힘과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면 그것이 바로 평화라고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평화는 하느님이 원하는 질서, 보다 완전한 정의를 인간 사이에 꽃피게 하는 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평화는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 안에서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개인들 사이의 상호 관계, 시민들과 정치 공동체들 간의 관계, 세계 공동체들 간의 관계들을 바르게 건설하자고 촉구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평화로운 세계 질서는 진리와 정의로 건설되고 사랑과 연대로 완성되며 자유가 보장할 때만 실현된다고 하셨습니다.’(성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참조) 이 모든 가치를 전제로 서로 믿음과 신뢰 안에서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좋은 열매가 맺어집니다.

오늘날 인류의 소망은 사랑과 정의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질서가 활짝 핀 진정한 평화입니다. 이러한 소망에 첫 번째로 응답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 안에서 세상의 평화 건설을 위해 가장 먼저 그리고 모범적으로 실천하도록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탄의 진정한 의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평화는 인간의 노력과 실천을 필요로 하지만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주 말씀하시는 대로 끝없는 용서와 조건 없는 나눔을 지닌 자비의 마음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의 구체적인 실천은 기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기도로써 청해야만 확실히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평화로 가는 길이 멀고 험난하더라도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며 인내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되어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아드님을 내어주신 성탄의 신비에 감사드리며, 아기 예수님이 주시는 은총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평양교구장 서리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춘천교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 3-4)


  “모든 사람들을 비추는 참 빛”(요한 1,9)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되며,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참조). 슬픔 속에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좌절 속에 있던 이들에게는 희망을, 어둠에 빛을 주는 구세주께서 오셨고, 그분께서 이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러한 구세주의 탄생이 우리에게 진정 기쁨인 이유는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분께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마태 20,28)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고나 공로만으로는 이루지 못할 구원의 은총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의 신비를 통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베드로 사도가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굳건히 고백합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전례 때 기도를 시작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로 함께 모인 이들을 기도에 초대하며, 또한 기도를 마칠 때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교구 설정 80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고 서로를 신앙 안에 북돋우며 격려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가는 길은 어둡지 않습니다. 아니 어두울 수 없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약속하신 그분은 우리를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뤄졌고, 우리는 그분을 이렇게 부릅니다. “임마누엘.”(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 1,23)


  임마누엘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기쁨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 기쁨을 자신에게만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우리는 다시 그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마태 5,16 참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특별히 80주년을 맞이하며 사목교서를 통해 제시한 세 가지 실천사항들, “남들이 바뀌길 바라기에 앞서 나부터 먼저 바뀌자”, “서로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고 사랑으로 하나 되자”, “신앙의 기쁨을 서로 나누자”를 삶의 모든 순간 속에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써 “빛의 자녀답게”(에페 5,8)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한 1,9)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며, 우리에게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80주년을 시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항상 이러한 말씀이 들려오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에페 5,14)


2018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춘천교구 교구장
김운회(루카) 주교  

 

 

  

[대전교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18년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그 어느 해보다 간절히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많은 불확실성이 우리 앞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번 성탄은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인 ‘강생’ 곧, 우리를 사랑하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잊고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 속에 선물로 주어질 일 년을 살아갈 순례자의 마음도 가다듬어 봅시다. 또한 절정으로 향해 가는 교구 시노드에 마음을 열고, 교회를 통해 활동하시는 성령의 은총에 우리를 맡기면서 묵묵히 걸어갑시다.


   오늘 우리 곁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단순히 ‘빛’이라 하지 않고, ‘참빛’이라 하셨습니다(요한 1,9 참조). 예수님은 세상을 비추는 여러 빛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의 어둠을 몰아내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 참 빛이십니다. 빛이신 예수님은 창조의 시작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머무시며 세상을 비추고 계셨습니다(요한 1,2 참조). 세상을 구원하려는 예수님은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이미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일회적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현재에 선택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순례의 여정을 마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끝없이 많은 시련과 유혹을 겪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고 약속하십니다. ‘생명’과 ‘빛’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모든 식물은 빛이 있어야 광합성을 하여 영양분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우리 인간도 빛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스스로 만든 어둠에 자신을 가둬 버리고 생명을 포기하는 불행한 선택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힘든 사건과 사고들, 어둠이 짙어 보이는 이 시대에 참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맞으며, 그분의 제자로서 두 가지 사명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존경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집시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결국 당신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큰 사랑을 체험한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기쁨으로 응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여러분이 예수님의 성체를 제대로 공경하려면, 그분이 헐벗으셨을 때에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또 다른 모습의 예수님이 고통받는 것을 못 본 체하면서 화려한 장식을 꾸미는 방법으로 성체를 흠숭하지 마십시오.”(마태오 복음 강해 50.3)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는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빈익빈 부익부로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는 사회에서 물질적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개인의 게으름과 타락으로 인한 가난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자들이 벗어날 수 없는 구조적 가난을 함께 아파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고 그분의 사랑을 증거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난에 대항해 사회혁명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선적으로 돌보고 병을 고쳐 주며 하느님께로 이끄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제자들은 하느님과 복음 선포를 위하여 헌신하려는 영적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도 가난하게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본받아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며, 손을 잡아 주고 품에 안아 주라는 불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돈과 물질을 인생의 목표로 추구하는 욕망에서 벗어나 영적 가난을 살아가고, 가난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또 다른 모습의 예수님을 만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고 인사하셨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이 있던 날에 제자들과 작별하시며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아름답다고 고백합니다(52,7 참조). 믿는 이들에게 평화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로 잇는 영적인 신비입니다. 그래서 별 탈 없이 지내는 세상의 평화와는 차원이 다른, 고난 가운데에서 만날 수 있는 평화 곧, 십자가를 통한 평화가 그리스도인의 평화입니다.

 

   지금 한반도에는 역사적이며 감격스러운 변화들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마지막 남은 분단국으로 존재하는 남북의 정상이 핵무기가 없는 한반도, 평화의 한반도를 전세계에 천명했습니다. 이에 따른 약속들이 느리지만 차근차근 이행되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인내의 과정도 필요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평화를 위한 우리의 여정을 축복하시고, 기도로써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초청장이 오면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낭만적으로 평화를 접근하거나 불신으로 가득 찬 극단적 태도를 넘어, 세상 안에서 이뤄야 하는 참 평화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도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요한 5,9)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부디 우리 민족이 미움과 갈등과 단절을 넘어, 하느님의 은총으로 평화를 이루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함께 기도합시다.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찾아오신 예수님 탄생의 기쁨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빌며 축하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하느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8년 성탄절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인천교구]

 

2018 성탄 메시지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탄생하셨습니다. 기쁨에 넘친 목소리로 그 사랑과 기쁨을 외치고 싶습니다. 아울러 그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구약시대 4000년 동안 모든 백성은 구세주의 오심을 기도 안에서 간절히 바라고 원했습니다. 인간의 기다림은 구세주의 오심으로 귀착(歸着)되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히 오게 된 것입니다. 그 기쁨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 참조) 구세주의 오심은 인간이 고안(考案)해 낸 방법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이었고, 인간의 역사 안에 하느님의 오심은 하느님의 방법이었지만 인간을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이 강생(降生)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하느님의 오묘한 사랑의 신비인 강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립 2,6-7)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이 되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며, 시편의 기도를 떠올려봅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무한한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 그 사랑과 자비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랑을 다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는 성서의 대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루카 2,6 참조)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베들레헴으로 갔을 때, 어느 누구도 이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안위와 편의에 눈이 가리워져 가까이에 있는 어려운 이들, 도움이 간절한 이들을 향한 시선과 마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이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 즉 지극히 개인 중심주의적인 모습을 표현하면서 성서는 이제 우리의 시선을 목자들에게로 향하게 합니다.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천사들은 그들에게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구세주를 알아보는 표지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세상을 구원하신 구세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구유 안에 누워 계신 구세주’입니다. 모든 이들이 구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보고, 그 사랑을 깨닫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어려운 이웃과 가난한 이웃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자선과 나눔을 통해 사랑의 실천 등의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는 구유라는 초라하고 비천한 곳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느끼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먼저 자문 自問해보아야 합니다. “과연 어렵고 가난한 이웃은 누구입니까?” 사실 우리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어떻게 또 어떠한 방법으로 다가서야 하는지 그리고 누가 그 대상인지를 잘 모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의 말씀은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날은 가난한 이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가난한 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선진국에는 친교의 가난, 정신의 가난, 고독이라는 가난, 사랑의 결핍이라는 가난이 존재합니다. 세상에 그보다 큰 병은 없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그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소통의 가난’, 자신만을 사랑해 달라는 ‘사랑 결핍의 가난’, 서로에게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는 ‘친교의 가난’, 내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정신의 가난’이 이 시대에 만연합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해 고립되어가는 가난한 세상이 되고 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더구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가난한 이들을 만나지 않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으려는 모순 속에 살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베르나르도 성인이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며 하신 말씀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고 싶습니다. “사람이여,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으셨는지 생각하십시오. 그분이 당신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 그분이 얼마나 큰일을 하셨는지 깨달으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취하신 인성을 통해서 그분이 지니신 깊은 자비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이를 위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나를 통해 모든 이에게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을 맞이하며, 내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 이 시대가 낳은 병폐로 앓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갑시다. 이것이 바로 구유 속에 누워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행동이자, 그분의 사랑을 깨닫는 방법입니다.

 

   다시금 모든 이에게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기쁨과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2018년 주님 탄생 대축일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신앙의 기쁨! 젊은이와 함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1. 우리는 지금 인류 구원을 위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뻐 용약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고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요한 1,10~11 참조)도 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첫선을 보인 모습에서 찾아봅니다. 하느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지만 이 세상에 보이신 첫 모습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모습이 아니라 그저 여느 아기와 같은 평범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평범하기는 고사하고 마구간에서 비천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마태 26,53)들을 대동하고 이 세상에 오셨다면 사람들이 열광하며 맞아들였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마저 마다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철저히 낮추셨습니다(필리 2,6~11 참조). 이런 까닭에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맞아들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천하게 태어나신 하느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알아보고 맞이하는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럽고 화려한 것만을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당신 자신을 감추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하는 우리들은 은혜롭게도 영적인 안목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2. 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를 사람들의 성향에서 찾아봅니다. 우리는 빛을 좋아하는지 어둠을 더 좋아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빛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참 빛으로 오신 그분을 사랑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보다는 어둠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방식을 더 사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惡)으로의 경향입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무조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가 재물을 더 많이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등입니다. 용서하고 나누는 삶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빛으로 나아가는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용서와 나눔으로써 생명을 살리는 일을 우리의 관심 밖에 두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에서 부르짖는 ‘사형제도 폐지 운동’이나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 운동’ 등은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인 그분을 알아보는 지혜와 영적인 시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구세주의 마구간 탄생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주신 사람의 본성을 회복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현대에도 세상은 부와 권력,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과 권력, 그리고 능력을 키우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세상의 빛이고 생명의 양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세상의 많은 일을 그것들과 연관시키려 합니다. 경제 논리로 무장한 사람들은 생명의 존엄성보다는 생명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을 돈으로 환산하려 합니다. 소중한 자식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기보다는, 자식을 낳고 키우는 데에 얼마만큼의 비용이 드는가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사람을 꽃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경제적 잣대로 평가하는 세상의 흐름을 숭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을 가장 고귀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혼을 두려워하거나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는 것까지도 주저하며 살아갑니다. 힘이 있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해서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와 권력과 재능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생명의 가치로 인정받지 못하고 부모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어, 때로는 어른들로부터 학대받고 그로 인해 생명의 존엄성에 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마구간에 초대받은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부와 권력 그리고 능력이 아니라, 아기의 순수함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당신 뜻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분이십니다(루카 10,21). 그러니 사람의 순수함을 회복하는 일에 정진해야 하겠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인류의 역사를, 말구유에서 탄생한 보잘것없는 아기를 중심으로 새롭게 써나가야 합니다.

 

4. 참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관방 하나 구하지 못하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심으로 다른 이들로부터 눈길조차 받지 못한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약하고 소외되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형제적 사랑과 관심을 갖는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주고 깨닫게 하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5. 지금 수원교구는 조직개편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혼란스러운 점도 많았고, 아직도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만, 사랑하는 교구민의 능동적인 참여와 협력으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 점은 교회 성장에 있어 크나큰 원동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교구민의 신앙생활이 자랑스러운 신앙 선조의 삶을 훌륭하게 계승하는 바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구의 괄목할 만한 성장의 밑바탕에는 평신도들의 굳건한 신앙심과 희생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형제자매들의 이러한 신앙생활에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마구간에서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사랑으로, 생명을 존중하고 미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성탄 시기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한국의 모든 성인과 복자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8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2018년 12월 성탄메시지 

 

♱ 찬미예수님, 

 

 원주교구 교우 여러분!

 오늘은 예수님의 성탄 축일입니다. 천사가 그 기쁜 소식을 전해줍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한 생명이 태어남은 가족의 기쁨입니다.

한 생명의 탄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입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에 노숙자들의 식당 ‘십시일반’을 찾았습니다. 원주 노숙인들이 형이라고 부르는 센터장 이상길 바오로에게서 노숙인들이 함께 엮은 시집 한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시집에서 노숙인 권혜경이 쓴 시 한편이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 내 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 모든 사람이 한 마음 한 가족이 된 마음으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처음으로 ‘내가 태어나길 잘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앞으로는 과거의 내가 어찌 살았던 간에 다 버리고 미래의 내 삶은 밝고 건강한 삶이길 바라는 마음을 살아야겠다.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은 인류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태어나셨으니, 내가 이 세상을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지 모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산도 넘어야 하고, 강도 건너야 하고, 산 도둑도 만나고, 풍랑에 시달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산 넘고 물 건너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니 살아 볼 만한 이 세상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 삶이 고달프더라도 고향 하느님 나라 가는 길이니 앞으로의 우리의 나날들은 밝고 건강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삶이 즐거울 때나, 고달플 때나,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우리가 태어나길 잘 했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생일을 많이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 덕분에 우리의 삶이 또 다시 행복해지기 시작합니다.

 


원주교구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의 성탄으로 행복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2018년 12월 25일 성탄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용서하고 격려하는 문화를 꽃피웁시다.
“땅에서는 그 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어두운 이 세상에 참다운 빛과 사랑을 주실 분을 간절히 기다리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맞으며 주님께서 내려주신 많은 은혜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특히 금년에는 한반도에 평화에 대한 희망을 보내 주셨기에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기쁨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지난 성탄에는 한반도에 드리워진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웠지만, 새해를 맞아 불기 시작한 평화의 바람은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가 실현되고 있다는 설레임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설레임과 희망이 모두가 갖고 있는 일치된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는 ‘평화와 사랑’을 주시러 이 세상에 오셨는데,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우리 사회와 우리들 마음 안에는 ‘분열과 미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양극화 심화라는 말을 비롯하여,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갈등, 청년실업, 갑질행패,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벌어진 끔찍한 사건들과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며 그러합니다. 모처럼 찾아온 평화의 분위기가 이 분열과 갈등이 평화의 여정을 가로 막는 것이 아닌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분열과 미움, 절망과 분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6.25 전쟁체험과 분단으로 시작된 냉전체제에서 생겼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군사주권을 미국에 양도하여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 우리는 다른 나라 대통령에게 나라의 운명을 떠 맡긴 처지에까지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냉전체제는 한국의 정치 구도 뿐 아니라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사회로 만들어 놓았고 계층간 지역간의 갈등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냉전체제는 우리 사회의 경제 정의를 어지럽혔습니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 노동조합을 바르게 보지 않고, 평등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회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생기고, 재벌독재의 경제질서가 만들어져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냉전의 구조는 사람들의 성격마저도 공격적이고 비판적이며 흑백논리의 구조로 만들어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제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평화로운 사회분위기로 갈 수 있는 길인 평화체제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분단의 긴 역사가 만들어 놓은 이 모든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갈등을 비롯하여 세대와 계층간, 보수와 진보라는 장벽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폭넓게 쌓여진 미움과 분노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입니다. 용서하고 화해 하는 일이야 말로 성탄절의 정신이며 성탄절 베틀레헴 하늘에 울려퍼진 평화를 누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평화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은 정치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몫이기는 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며 다름을 받아들이며 용서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갈 때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신자들은 기도하며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용서 하세요,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해 주세요.’ ‘모처럼 찾아온 평화의 바람을 끄지 마세요’라며 구유에서 맑게 웃고 계십니다. 이번 성탄절 특별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청년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오늘 정치지도자들에게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경제문제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 특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절망에 빠진 청년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화 프로세스가 지지속에 원만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날 청년축제에서 만난 청년은 저에게 ‘면접 잘 봐 취직되게 기도해주세요.’ 라고 하였는데 저에게 한 청년의 청을 아기 예수님께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작은 고을 베들레헴 가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께서 이렇게 작고 낮은 자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본 사람은 그 지역의 가난한 목자들이었고, 탄생하신 날 밤, 하늘에 울려퍼진 천사의 소리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안에 담겨져 있는 참 사랑을 배우고 참 평화를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분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분의 삶과 말씀을 늘 새기고 실천해야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변두리를 찾아가 그들을 만나고 위로해 주었으며,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시고 제자들에게도 늘 용서하는 사람이 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오랜 세월 누적된 미움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격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리며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내리시기 바랍니다.

 


2 0 1 8 년 성탄절
이 기 헌( 베드로 ) 주교

 

 

 

  

[대구대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춥고 어두운 세상에 따스하고 밝은 빛으로 오신 구세주를 영접하며 이 기쁨을 교구민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예수님께서 벌써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셨지만, 교회는 매년 전례력으로 성탄을 기념하며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시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 예수님의 성탄을 맞아 내 마음 안에, 우리 가정에,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이사야 예언자의 이 말씀처럼 빛으로 오신 구세주께서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고, 그분을 믿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구세주의 성탄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로 눈을 돌려 보면, 세상은 아직도 춥고 어둡습니다. 전쟁과 기아를 피해 자유세계를 찾아오는 난민은 지금도 생사의 선을 넘나들고 있지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강대국들은 난민의 어려움을 외면합니다. 한반도의 정세도 평화를 향해 나아가려 노력하지만 앞에 놓인 문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치는 어지럽고 경제 상황도 어렵습니다. 비정규직 젊은 청년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죽음의 위험에 내몰리고, 빈곤층의 노인들은 이 겨울을 나기가 참으로 힘겹습니다. 세상의 상황은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여전히 춥고 어둡습니다. 하지만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신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나약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 탄생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셔서, 자신을 낮추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높은 것을 추구하며 자꾸만 높아지려고 합니다. 무한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남을 짓밟고 올라서서라도 높아지려고 합니다. 내가 높아지는 만큼 다른 사람이 내 밑에 깔려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만 높아지는 것이 우리 마음을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세상은 과거보다 더 높아졌지만, 우리의 마음은 오히려 더 공허해졌습니다. 세상은 더 부유해졌지만, 우리의 마음은 더 헐벗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더 화려하고 밝아졌지만, 우리 마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낮춤으로써 높아지는 하늘나라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구는 지난 2011년 교구 설정 백주년을 보내고, 올해 성모당 봉헌 백주년을 지냈습니다. 초대 교구장이신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께서 성모님께 드렸던 원의와 정신이 성모당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성모당 봉헌 백주년을 맞아 저는 “새로운 서약, 새로운 희망”이라는 사목 교서에서, 3년 동안 성모님께 대한 원의와 희망으로 특별히 기도하고 노력하자고 밝혔습니다. ‘회개의 해’를 보낸 우리는 내년을 ‘용서와 화해의 해’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도 용서하고 화해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더 낮아져야 하고 나의 마음을 더 비워 내야 합니다. 나도 죄를 지은 죄인이고 하느님께 더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는 자각이 있을 때,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와 아량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더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낮은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를 처음으로 맞이하고 경배할 수 있었던 이들은 낮은 이들이었습니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루카 2,8) 어두운 밤에 양 떼를 지키느라 들판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는 가난한 목자들이 가장 먼저 구세주 탄생을 맞이하고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임금이나 율법학자, 종교 지도자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루카 2,10)이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기뻐합시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어, 낮은 모습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며 이웃과 화해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갑시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2018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 환 길(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예수님 강생의 신비를 우리 삶으로 

 

     해마다 주님의 성탄 대축일을 맞으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반성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살다보면, 해마다 성탄을 기다리며 우리 나름대로 결심한 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허물어지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2018년 주님의 성탄 대축일을 맞으면서 또 한 번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한 해를 마무리할 때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안팎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많은 분들이 여러 이유로 ‘참 어렵다’고들 하십니다. 그 어려움은 단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사회적인 분위기와 정서 등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모든 것이 참으로 좋고 편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모두가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으며, 낮아지지 못해서 이 모든 어려움이 오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주셨고’(요한 3,16), 그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신앙의 진리’(필리 2,7~8)를 우리는 알고 또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끝까지 낮추시어 이 세상에 비천하게 태어나셨고, 지상의 삶에서도 늘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그 겸손과 비움, 그리고 낮춤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배려가 부족하고, 모두 자기 자신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고 자기 이익만 찾고 있는 이 사회에서 우리 신앙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그 안에서 쉽게 우리의 본질과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낮추고 내려놓지 않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기심과 세상의 일에 대한 걱정과 욕심에 가득 차 있는 우리 마음의 구유에는 그분께서 오실 공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강생의 신비를 우리가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살아야만 우리는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쁘고 행복한 삶은 반드시 이웃과 나누고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하고 사랑이 실종된 것처럼 보여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해서 고단한 삶에 지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누며, 또 그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올해도 우리 모두의 마음의 구유에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분 강생의 신비를 우리 삶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텅 빈 우리 마음의 구유에 성탄의 은총이 풍성하길 바라며, 2018년 성탄이 우리 모두에게 더 기쁘고 행복한 축제가 되길 기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손삼석 요셉 주교

 


  

[청주교구]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오늘 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축하드리며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신자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루카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온 천하에 호적 등록을 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본향으로 갑니다. 요셉도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본향인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다윗 고을로 갑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루카 2,7).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의 예수님 탄생하신 밤에 관한 기록은 구유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루카 2,7.12.16)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는 ‘머무를 방’ 하나 내어주는 사람이 없어 황량한 들판 마구간 구유에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3. 포대기에 싸여 누추한 마구간 구유 위에 누워 있는 이 아기는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는 이 아기가 어떤 분이신지 이렇게 전해줍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요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오늘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원조 아담이 범죄한 후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인류가 고대해 온 메시아이십니다. 오늘 탄생하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신 이 아기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주님이시며, 평화를 주러 오신 평화의 왕(이사 9,5; 미가 5,4)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신 밤 그 누구도 머무를 방을 내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4. 예수 성탄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기리는 날이자, 언제나 모든 것을 새롭게(묵시 21,5) 하시는 예수님에게 머무르실 방을 내어 드릴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우리 마음에 모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참된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며, 삶의 모든 희망을 예수님께 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엇보다 긴요한 것은 그분이 머무실 자리, 곧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주님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한 가정의 구원과 행복은 생명의 근원이요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아감으로써, 인류의 희망이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가정 가운데 모심으로써 시작됩니다. 여러분 가정에 주님께서 ‘머무를 방’을 마련하고 주님을 맞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련해야 할 방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가족이 둘러앉아 만드는 기도의 자리, 섬김과 나눔의 자리입니다.

우리 사회는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평화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집이라고 할 것도 없는 누추한 마구간이지만 그곳이 바로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리입니다. 평화의 자리는 이렇듯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018년 현재 자기 고국과 고향을 떠나온 외국인이 2백 40여만 명이 있습니다. 다문화 가정과 그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도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내전이나 예멘 내전을 피해 한국으로 온 난민들도 있습니다. 가깝게는 분단의 아픔 속에 70년을 가족과 헤어져 살아온 실향민과 북녘을 떠나온 새터민들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이웃에는 경제적 불평등과 편견으로 인한 차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평화의 자리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고국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 함께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바로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 교회의 어머니신 마리아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께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청하며,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지역사회에 그리고 한반도에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18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불쌍한 목동들이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루카 2,8)고 합니다. 주로 어린 목동들이었던 이 가난한 소년들이 차가운 밤, 들에서 허기진 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차라리 양이었다면 털이라도 있어 추위를 면하련만, 차라리 짐승이었다면 뿔이라도 있어 들이받기라도 하겠건만, 지치고 굶주린 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딱정벌레처럼 온몸을 끌어안고 이 밤의 추위를 견디는 일 뿐입니다. 추위를 견디며 겨우 잠들었지만 유다 산골의 거센 모래바람이 악마처럼 소리치며 할큅니다. 그 소리는 늘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이 밤에 찾아온 두려움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몹시 두려워하는 목동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천사의 알림을 듣고 목동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찾아냈습니다. 구유에 누운 아기를 발견한 목동들은 그 아기에게 폭 빠져 모든 것을 잊고 자신들이 아기가 됩니다. 짐승 같았던 지난날은 사라지고 한없이 사랑받는 귀한 아기로 다시 태어납니다.

 

 목동들이, 그 아이들이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만에 하나 저 아이들이 예수 아기를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저는 저들이 너무 불쌍해서 울어버렸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이 아이들이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구유에 누워있는 갓난아기가 자기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임마누엘)이 어린 목동들에겐 모든 현실을 뛰어넘는 기쁨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목동들이 가졌던 그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기쁨이 다른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 사실 때문이면 좋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아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달리 말하면 지금이 우리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하는 때이고, 또 주님을 더 잘 알아보고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때임을 일깨워줍니다. 천사는 구세주의 탄생을 권세 있는 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천한 목동들에게 먼저 알렸습니다. 비천함을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비천한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빛은 더 환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둠일수록 주님의 빛은 더 강하게 비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빛은 가장 어둡고 소외된 곳에서부터 비칩니다. 그러니 목동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 빛을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더 낮은 곳으로,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로 눈길을 돌리고, 발걸음을 옮길 때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고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목동들이 가졌던 기쁨,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그 사실 때문에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잊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바로 그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소망합니다.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2018년 주님성탄대축일에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났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이렇게 주님의 천사가 구세주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 사람들은, 복음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루카 2,8)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가난한 서민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여겨졌고, 성서 전통에서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에 초대된 첫 번째 사람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첫 번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들이 제일 먼저 주님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사랑받는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메시아, 곧 구세주가 너희에게 오리라.’ 아주 오래 전에(기원전 7세기) 하느님께서 미카 예언자를 통하여 이미 약속하셨듯이 오늘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마태오 복음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베들레헴은 결코 세상의 작은 고을들 중 하나가 아니라,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마태 1,23 참조) 하느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가장 복된 마을, 가장 복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들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6)

 

구세주 예수님께서 새롭게 오시는 오늘의 베들레헴은 어디일까요? 성탄은 본디 아주 보잘것없고 초라한 장소에서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가장 낮은 곳, 가장 초라한 곳에서 가장 가난한 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우리의 구세주 아기 예수님이 새롭게 오시는 오늘의 베들레헴이 될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주님 성탄의 본질적인 의미를 밝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 이것이 성탄입니다. 주님 성탄의 의미는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기 위해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순간을 더욱 함께 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걸으려 오십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 한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을 구원으로 떠받들기 위해 우리들의 가장 낮은 삶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위대하고 강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작아지시고 약해지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시고, 당신 자신을 끝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탄의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은 우리가 받는 선물 중에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주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값진 선물입니다. 못난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하찮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는 우리 각자가 가장 소중하고 값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기를 원할 만큼 우리를 그리워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쇄신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구 설정 50주년을 맞는 2019년 한 해를 교구가 새롭게 태어나는 쇄신 운동의 절정기로 삼으려 합니다. 교회 전례력에 따른 교구의 쇄신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주님 성탄 대축일이 전 교구민이 함께 교구의 쇄신 여정을 새롭게 출발하는 특별한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 각자가 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들이 주님 성탄의 새로운 베들레헴이 되게 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서 새롭게 태어나시는 성탄의 자리가 되게 하시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교구의 쇄신을 함께 이루어냅시다.


2018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안동교구장 권 혁 주 주교

 

 

 

  

[광주대교구]

“우리는 평화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9항 )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0.14)


어두움이 짙은 이 땅에 오늘 구세주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의 첫 메시지가 평화였고, 평화의 말씀은 예수님 생애 동안 자주 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첫 메시지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였습니다. 이렇게 평화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실현해야 할 복음의 핵심적 가치입니다.


“우리는 평화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9항)

 

평화의 사도이신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우리 시대 평화의 비전을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복음적 평화는 아무도 배척하지 않고 다소 이상한 사람, 어렵고 까다로운 사람,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람, 서로 다른 사람, 삶에 지친 사람, 그저 무관심한 사람조차 포용합니다. … 복음적 평화는 갈등을 무시하거나 숨기려는 시도가 아니라, 반대로 갈등을 기꺼이 받아들여 해결하고, 이를 새로운 전진의 연결고리로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장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9항).

 

이 평화의 비전은 평화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 시대에 맞는 표현으로 새롭게 계승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 대한 열린 마음, 다름에 대한 존중과 포용,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환대, 갈등을 새로운 계기로 바꿀 수 있는 힘 등, 이러한 자세들은 오로지 평화에 바탕을 두어야만 비로소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평화는 우리 시대의 가장 절실한 요청입니다


평화는 우리 각자가 주체적인 삶을 살고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근간입니다. 평화는 남녀노소의 아름다운 다름, 나와 너의 차이를 온전히 존중하고 수용할 수 있는 뿌리입니다. 평화는 진정한 다양성과 일치를 보증하는 열쇠입니다. 평화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는 길입니다.

 

“평화는 정의의 작품”(『사목헌장』, 78항)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 사회가 정치, 경제, 노동 정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정의를 이루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또한 평화는 이주민, 난민, 외국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주춧돌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우리 시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입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평화는 비인간적인 폭력의 악순환과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과연 “전쟁으로는 모든 것을 잃지만, 평화로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교종 프란치스코).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남과 북의 화해, 우리 민족의 공존을 위해서는 오직 평화만이 참된 길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갈등과 대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분단의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요한묵시 21,1)인 평화의 땅으로 변모되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며 온 힘을 다하는 것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평화의 일꾼” (『복음의 기쁨』, 239항)입니다. 우리 시대보다 훨씬 앞서 사셨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당대의 대결과 갈등의 벽을 무너뜨리고 화해의 삶으로 평화를 증거하셨으며, 성인의 ‘평화의 기도’는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하나로 결합시킨 기도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이에 우리 교구민 모두가 이 기도를 바치고 ‘평화를 위한 10가지 실천사항’을 함께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고,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요한 1,14 참조). 아기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나누며,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평화를 위한 10가지 실천사항
1. 내적 평화 위해 하루 10분 이상 묵상하기
2. 남녀노소의 아름다움과 다름을 존중하기
3. 가난한 사람들, 이주민, 난민, 외국인 노동자 환대하기
4. 장애우 환대하기
5. 모든 형태의 차별 거부하기
6. 생태계를 보존하고 일회용품 쓰지 않기
7. 이웃 종교 존중하기
8. 정치와 경제, 노동 정의 실현하기
9. 폭력과 전쟁 거부에 동참하기
10.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며 동참하기

 2018년 12월 25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김희중 대주교

  

   

[전주교구]

아기가…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두운 세상에 구원의 빛이 되시기 위하여,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교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하게 내리기를 빕니다.

천사는 구세주 탄생 소식을 이렇게 알립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초라한 구유에 누워계신 힘없는 아기 예수님이 인류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세주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을 알아보는 표징이며, 그 외에 다른 표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께 다른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고 싶습니다.”(마태 12,38) 사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고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등 이미 놀라운 일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더 강력하고 더 분명한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초월적인 특별한 표징을 보여주신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도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악한 헤로데도 승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권능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놀라운 표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표징 요구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았던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은 감옥살이를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듣고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자꾸만 의심이 밀려와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그도 큰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더 큰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표징 요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만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12,39 참조). 요나가 사흘 밤낮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사흘 밤낮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는, 곧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에게는 다른 표징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표징은 강생의 표징과 일맥상통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셨듯이, 강생에서도 당신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입니다(필리 2, 6 이하 참조). 그래서 어떤 교부는 이 둘의 관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자기낮춤은 강생에서부터 시작되며, 강생의 자기낮춤은 십자가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의 온전한 자기낮춤이 진정한 표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 이토록 당신 자신을 낮추셨을까요? 어찌하여 힘없는 갓난아기가 되셨을까요? 그분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남김없이 구원하기를 바라시기에(1티모 2,4 참조)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분은 특히 가난한 사람, 작은 사람, 연약한 사람, 비천한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힘없는 아기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 8,9 참조). 하느님의 자기낮춤은 우리의 모든 가난과 고통, 환난과 연약함 그리고 비천함을 그분이 한없이 사랑하시는 결과입니다. 그분의 자애로운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이 기다렸던 메시지이며 표징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 곧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주시는 하느님, 자신의 보잘것없는 부분을 보듬어주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하느님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비록 하느님을 멀리 하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성탄은 이런 지극히 자애로운 사랑을 선포합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를 바라봅시다. 보잘것없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아기가 되신 하느님을 유심히 바라봅시다. 그러면 그 사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하느님께 선물을 드리는 날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받는 날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애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날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온갖 선물과 함께 사랑을 한없이 베푸실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활짝 열어드립시다.

 

교우 여러분, 힘없는 아기 예수님에게서 당신 자신을 작게 하시는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을 깨달읍시다. 그러면 우리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낮출 수 있습니다. 연약한 이웃을 자애로운 사랑으로 껴안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자애와 온유를 끝까지 지킬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성탄의 신비를 계속 실현하고, 하느님의 표징을 계속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리며, 고단한 삶을 사시는 교우 여러분에게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가득 내리시어 희망과 평화가 넘치는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빕니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주교
김선태(사도요한)


  

  

[제주교구]


‘번영의 신화에서 깨어나십시오!’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19살 먹은 비정규직 청년이 혼자 일하다가 진입하던 열차와 안전문 사이에 끼여서 숨졌습니다. 그의 유품에는 컵라면이 들어있었습니다. 근무 조건이 열악하여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을 시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7년 11월에 서귀포의 한 특성화 고등학교 3학년 18살 학생이 생수업체 공장에서 혼자 일하다가 생수병 기계포장 작업 중 압착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8년 12월10일 태안의 화력발전소에서 혼자 야간 순찰을 돌던 젊은이 한 명이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서 또 숨졌습니다. 그의 유품에도 컵라면이 몇 개 들어있었습니다. 이 어린 청춘들은 모두 외주 하청업체 비정규직으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다가 인생을 제대로 꽃피어보지도 못하고 지고 말았습니다. 이 발전소에서만 지난 10년 동안 12명의 비정규직이 사고사를 당했습니다. 세상이 이들을 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기보다 생산 공정의 한 수단으로만 보고 생산단가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다보니 이런 비극이 되풀이됩니다.
 
지난 12월3일에는 서울 마포구 아현동 재개발 구역에서 쫓겨난 37세의 한 젊은이가 강제철거를 세 번씩 당한 뒤 한강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국가 권력이 강행하는 재개발사업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자진하였습니다. 12월10일에는 택시기사 한 사람이 대기업의 카풀 사업에 항의하며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을 했습니다. 가장 열악한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자본의 가공할 힘에 밀리고 쫓기다가 분노하며 목숨을 던져 항의하였습니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들이 왜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더 발전하고 더 성장해야 된다는 무조건적인 욕구와 강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사회의 가장 힘없고 나약한 이들이 제일 무거운 짐을 지고 구석으로 내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물질주의가 만들어낸 번영의 신화에 취하여 한없는 발전과 성장이 세상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최상의 목표로 오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번영의 신화는 이 시대의 우상입니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절대 권력에 짓밟히고 억눌리며 종살이 하던 이들의 외침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탈출 3,7-10) 이 계시는 이집트 제국의 왕권과 번영을 위해 제일 밑바닥 백성들을 억누르고 짓밟은 태양신 신화의 아들, 파라오를 향한 도전과 항전의 메시지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는 제국 전체에 호적등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제국의 지배력과 번영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한편 제국의 변방 시골동네 처녀가 낳아 구유에 뉘인 갓난아기 예수는 제국의 황제와는 정반대의 꼭짓점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권력과 번영 대신 비천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초상을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황제의 것은 기껏해야 쇳덩어리로 만든 동전 몇 닢에 지나지 않지만, 세상 만물은 다 하느님의 것임을 선언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로마는 권력의 우상 얼굴이 새겨진 동전으로 지탱되는 제국이었습니다. 때가 되자 우상의 제국은 무너지고, 예수님이 세우신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나라는 갈수록 커져서 그 기둥과 그늘에 많은 이들이 기대고 쉽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의 세상도 이집트 제국, 로마 제국이 추구하던 권력과 번영을 향해 브레이크 없는 수레처럼 질주하고 있습니다. 뒤처지는 사람은 가차 없이 밟고, 버리고 가는 무자비한 수레입니다. 그런 이 시대를 향해 예수님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당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더 큰 권력과 더 화려한 번영을 향해 끊임없이 유혹하는 오늘의 우상들에게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종으로 내어주지 말자고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세우시고 깨우치고 계십니다. 마리아와 함께 노래하자고 초대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2018년 성탄절에
 제주교구 감목
강우일

 

 

  

[군종교구]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구의 가족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및 탄생 대축일을 맞아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빌어드립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 관계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및 탄생 대축일을 맞으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갖도록 합시다.

 

I

 

구약에서 미래에 오실 구세주에 대해 가장 상세히 기록한 부분이 이사야서 9장 1-5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와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라는 두 표현으로써 구세주의 오심을 선포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표현에 주목하자고 말씀드리는데, 이 두 표현은 사실 같은 내용을 조금 달리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백성들이 어둠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상태에 구세주께서 구원의 빛이 되어 오셨음을 말해줍니다.

 

이 표현은 당시의 어두운 정치 상황, 어두운 사회 상황, 어두운 경제 상황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 마음의 어두운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예로, 당시의 연약한 왕 아하스가 자신의 고문이었던 이사야 예언자가 믿음과 용기를 가질 것을 탄원했으나 이를 듣지 않고, 아시리아의 도움을 청함으로써 국가적 재앙을 초래했던 일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여러 가지 어두운 상황들 가운데 무엇보다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무너짐으로써 오는 어두운 상황을 이사야 예언자가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 어두운 상황에 구세주께서 빛으로 오시어 인간 마음속의 어둠을 흩으시고 기쁨으로 채워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라는 말에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이사 9,2)

 

흥미롭게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한 마태오, 루카 두 복음사가들도 예수님께서 어두운 밤에 탄생하셨음을 말해줍니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수님 탄생의 현장 모습을 간단히 기록하고, 동방 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유대아 땅에 왔고 별의 인도가 끝난 베들레헴에서 기뻐하면서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동방 박사들이 어두운 밤에 빛나는 별이 동방박사들을 인도했음을 암시하면서 그들이 기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사가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루카 2,8)에게 천사가 예수님 탄생의 첫 소식을 전했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루카 2,9)고 기록함으로써, 역시 한 밤의 어둠 속에 예수님이 탄생하셨음을 말해주고 여기서도 소식 전달자 천사는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여기의 어둠은 물론 밤이라는 자연적인 어둠을 말하고 있지만, 어두움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고도 봅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빛이 되어 오시어 인간의 어두운 마음 곧 죄와 삶의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 마음을 환히 밝히시어, 어둠에서 밝음으로 인도하여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성탄 강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명한 성 레오 대 교황의 성탄절 강론도 이 기쁨의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밤 우리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으니 기뻐합시다! 죽음의 두려움을 파괴하시고 영원한 약속들에 대한 기쁨을 선물로 주시는 한 생명이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무엇보다 인간의 죄들과 여러 가지 역경과 불행이 주는 고통으로 인해 오는 어둠을 파괴하시고, 우리 마음을 순수함과 희망으로 밝혀주시는 우리의 빛이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한없이 기뻐하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 교만, 음행, 탐욕 그리고 이기심 같은 여러 죄들을 뉘우치고 통회하며 동시에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을 굳게 하도록 합시다.

 

II

 

예언자 이사야는 태어나실 구세주를 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이사 9,5) 한편 복음사가 루카는 천사의 말을 전한 탄생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구약과 신약의 이 두 성경 구절이 이 세상에 탄생하신 구세주가 누구이시고 어떤 분이신지를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사야서 9장 5절이 기록한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입니다. 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셨고 이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어진 아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태어남 곧 탄생”과 “주어짐”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사가는 천사의 말을 인용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라고 기록하여 이사야 예언자의 기록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은 요한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라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 번째 표현인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라는 표현과 똑같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탄생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죄로 인한 멸망에서 구하시고자 내어주신 사랑의 최고의 선물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주시어”는 단순한 탄생을 넘어서서 우리 구원을 위한 십자가 제물로까지 삼으셨다는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III

 

형제자매 여러분,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시며 또한 우리의 “구원자”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사람이 되어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관상하면서 큰 기쁨 속에 성탄절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및 탄생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히 임하길 기도합니다.

 

2018 성탄절을 맞으면서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F. 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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