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가톨릭마당

sub_menu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겸손의 두 능력

120616 김현아 [estherlove] 스크랩 2018-05-21

 

 




2018년 나해 연중 제7주간 화요일

<겸손의 두 능력>


  
복음: 마르코 9,30-37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한 청년이 박해를 당해 고향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함디는 터키의 작은 마을에서 양떼와 염소를 몰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쿠르드족이라는 이유로 온갖 비극을 견뎌야했습니다(터키에서 쿠르드족은 차별과 탄압을 받아 왔습니다). 그는 터키의 말살정책으로 테러범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터키를 탈출해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이곳에서도 여전히 차별과 싸워야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주민들이 나라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업 경험이 아주 없었지만 그는 작은 요거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장 근처에 난민수용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디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난민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영어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직원 5명과 매일 가게에서 먹고 자며 밤새 일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고향에서 먹던 걸쭉한 요거트가 미국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상은 적중하여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뉴욕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요거트는 날개 돋친 듯 팔려 회사는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100%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함디는 더 많은 난민들을 고용했습니다. 직원들은 함디의 은혜를 갚기 위해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얼마 후, 그는 회사를 미국 요거트 브랜드 1위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한 해 매출 1.6조원을 기록하였습니다. 함디는 2,000개의 일자리를 더 만들었고 그중 600명이 난민들입니다. 그는 소수민족 가정에서 태어나 나라 없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하며, 직원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한 명당 지분 17천만 원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난민구조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누가 더 높으냐고 말다툼하는 제자들을 불러다놓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운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느님이신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처럼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을 받아들여야 높아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이렇듯 포용력있는 이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돼 있습니다. 사람을 차별대우하며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차별 없이 품에 안을 수 있는 능력은 겸손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사람들이 누구인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얼마 전 라스베가스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은 호텔 32층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젊은이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며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높은 위치에 서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판단하는 사람. 범인은 심판관으로 서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포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겸손은 낮아져 섞일 줄 알고 또 포용할 줄 아는 힘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두 능력입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의 두 능력은 어디에나 담길 수 있고 무엇이나 담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제자들은 교만하여 서로 섞일 줄 몰랐습니다. 공동체에 섞일 줄 모르는 것을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섞일 줄 모르는 사람이 포용력도 없습니다. 누가 더 큰 사람이냐를 놓고 다투다가 자칫 눈에 보이지 않는 총기 난사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함디는 미국이라는 곳에서 난민이라는 처지로 섞일 줄 알았습니다. 자신을 차별한다고 해서 총기를 난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몸에 좋은 요거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섞이지 못하는 이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세금을 내는 한 시민으로 섞이게 만들었습니다.

겸손은 열등감이 아닙니다. 열등감은 교만입니다. 내가 못나서 저 무리에 섞일 수 없다고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와도 잘 섞일 줄 아는 것이 겸손이고 누구라도 안아줄 수 있는 포용력이 겸손입니다. 이 세상에서서 이런 겸손의 모습이 나타난다면 하늘나라에서도 반드시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 2,588 2

    추천  2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