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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기해박해 180주년 댓글 이벤트 - 현경련 베네딕타 편

10423 굿뉴스 [goodnews] 스크랩 2019-10-07

기해박해 180주년 댓글 이벤트 - 현경련 베네딕타 편

 

 

  기해박해는 4대 박해 중 신유박해 이후에 전국적 규모로 일어난 두번째 박해다.

  1839년 4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공식 반포되면서 대대적인 천주교 신자 탄압이 시작됐다.

  전국적인 박해는 184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조선 교회 핵심 지도자들이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 여섯번째 편: 현경련 베네딕타(1794-1839년) 

 

기해박해 180주년을 맞아 굿뉴스는 한국교회사연구소와 함께 11월 3일까지 매주 한분의 성인을 소개하고 그분의 삶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 가톨릭성인 > 굿뉴스 연재 기해박해 순교자 약전, 현경련 베네딕타 편

 

 

   “기해박해 순교성녀. 세례명 베네딕타. 동정녀. 여회장.” 가톨릭대사전 현경련 베네딕타의 첫머리이다. 그러나 현 베네딕타의 업적과 영성을 떠올리면 이러한 말들이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생애는 단순한 순교자나 동정녀라는 이름으로도 또 여회장이라는 이름으로도 온전히 담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순교자 가문

   현경련 베네딕타는 순교자이기 이전에 모든 면에서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참된 신앙인이었다. 평소 앵베르 주교는 현 베네딕타를 두고서, “여회장은 베네딕타가 감당할 만하다”라고 치하하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기해박해 행적을 조사, 수집하는 일이 맡겨진 것도 이러한 주교의 돈독한 신뢰에 기반한 것이었으리라. 그녀는 박해받고 가난한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고, 늘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챙기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회장으로서나 복사로서나 그녀는 한결같이 공동체에서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였다. 오늘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의 삶과 순교를 기억하며, 그녀의 모범적인 순교 영성 만큼이나 교회공동체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당시 그녀의 구체적인 업적 역시 함께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현 베네딕타는 자신을 포함하여 한국천주교회사의 주요 대박해 때마다 순교자가 났던 뿌리 깊은 순교자 집안사람이었다. 아버지 현계흠 플로로는 한국천주교회 창설 초기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를 맞아 순교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현 베네딕타 본인은 1839년 기해박해에 순교하였고, 󰡔기해일기󰡕로 유명한 그녀의 남동생 현석문 가롤로 역시 이후 1846년 병오박해 때에 순교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 베네딕타는 17세 때 신유박해 순교자인 최창현 요한의 아들과 결혼했다. 비록 안타깝게도 3년 만에 사별하였지만, 현 베네딕타 본인의 가문을 넘어 배우자까지 순교자 집안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당시 교인들이 많은 경우 혈연 지연으로 맺어져 있었다고 하지만 현 베네딕타만큼 부모, 형제, 배우자 집안까지 순교자가 난 경우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삯바느질로 연명했던 궁핍한 삶

   현경련 베네딕타는 ‘모태 신앙인’이었다. 현 베네딕타는 아버지 현계흠 등 가족과 함께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그녀가 1794년생인 것을 감안할 때 사실상 그녀는 유아세례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찾아오고 아버지를 여읜 당시 어린 소녀 현 베네딕타의 나이가 겨우 7살이었다. 아버지의 순교 후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사학죄인’으로 처벌받은 집의 재산이 포졸들에 의해 몰수되었던 관행이 있었기에 소녀 현경련 집안의 궁핍함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17세 때에는 최창현 요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나 그나마도 3년 만에 사별하고 친정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에 현 베네딕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삯바느질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구한 운명을 현 베네딕타는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별의 슬픔과 경제적 곤궁을 현 베네딕타는 오히려 기도와 신앙생활에 오히려 전념하는 계기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후 그녀의 뛰어난 바느질 솜씨는 조선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옷을 짓는 일을 전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기해박해 국면까지 한국천주교회의 중추적 역할

   그러나 교회 내에서 현 베네딕타의 역할은 결코 바느질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최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현 베네딕타가 교회에 기여한 바는 여성으로서 가진 특별한 영성만큼이나 공동체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갔던 구체적인 업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첫째, 현경련의 업적과 관련해서는 먼저 명도회 활동이 주목된다. 현경련은 단순 회원이 아닌 명도회 여회장을 맡아 여성들로 구성된 명도회의 활동을 모범적으로 이끌었다. 교리지식, 냉담자들에 대한 권면, 근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 병자 간호, 죽을 위험을 당한 비신자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베푸는 등 명도회원으로서의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둘째, 현 베네딕타는 복사와 여회장을 지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에 들어온 두 번째 외국인 사제인 여항덕 신부가 그에게 여교우의 일을 많이 보살피게 했다고 한다. 즉, 여항덕 신부가 직접 사목활동을 하는 데에 아무래도 제한이 있는 여교우에 대한 사목 일을 돕는 복사로서 일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현 베네딕타는 정기적으로 동생 현석문을 대신하여 선교사의 성사활동을 도왔다. 샤스탕 신부의 복사로 활동하던 현석문은 서울에서 신자가 매우 많은 공소의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현 베네딕타는 선교사의 공소 사목 방문 때마다 현석문을 대신하여 공소의 교우들을 집에 모아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것이다. 예컨대 앵베르 주교가 1839년 4월 7일 부활대축일 다음 금요일과 토요일에 현석문이 회장을 맡고 있는 공소를 방문하여 성사를 줄 때, 공소집이 없어져 남명혁의 집을 빌려 공소를 치렀는데, 현경련은 현석문의 장모와 함께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두루 주선했다고 한다.

 

   셋째, 현경련 베네딕타는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일도 담당했다. 대개 그녀의 동생인 현석문 가롤로의 󰡔기해일기󰡕 수집과 집필에 있어서 큰 기여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현경련의 역할은 그다지 주목되지 못하였던 측면이 있다. 하지만 앵베르 주교는 1839년 순교하기 몇 개월 전에 정하상과 현경련을 비롯하여 이문우, 최영수, 현석문 등에게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는 일을 맡겼던 바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기에서 현경련의 기여나 역할이 작았을 리 없다.

 

   이처럼 현경련 베네딕타의 교회사적인 업적은 매우 컸다. 향후 현 베네딕타의 한국천주교회사 내에서 지위를 평가함에 있어서 여성 교우로서 보조적 역할이 아닌 매우 주도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평가되어야만 할 것이다.

 

   순교와 시복시성

   1839년 7월, 마침내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그녀를 체포한 뒤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이들은 남동생 현석문 가롤로의 소재를 알아내기 위해 현경련 베네딕타에게 곤장과 주리형 등 갖은 가하였다. 페레올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포졸들은 20번 넘게 그녀를 몹시 괴롭혔으며, 법정에서 11회 문초를 받았고 주리를 틀렸을 뿐 아니라 몽둥이로 300대 이상 맞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로부터 아무것도 얻어낼 수가 없었다. 수감 중 현 베네딕타는 장티푸스에 걸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가 되었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신앙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다. 오히려 옥중에는 동생에게 신망애 삼덕을 발하는 편지를 써 보내 읽는 이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은 현 베네딕타는 12월 29일 서소문 밖에서 6명의 동료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의 나이 45세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를 기억하며

   현경련 베네딕타는 순교자이기 이전에 모든 면에서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참된 신앙인이었다. 평소 앵베르 주교는 현 베네딕타를 두고서, “여회장은 베네딕타가 감당할 만하다”라고 치하하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기해박해 행적을 조사, 수집하는 일이 맡겨진 것도 이러한 주교의 돈독한 신뢰에 기반한 것이었으리라. 그녀는 박해받고 가난한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줄 알았고, 늘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챙기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회장으로서나 복사로서나 그녀는 한결같이 공동체에서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였다. 오늘 성녀 현경련 베네딕타의 삶과 순교를 기억하며, 그녀의 모범적인 순교 영성 만큼이나 교회공동체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당시 그녀의 구체적인 업적 역시 함께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료 제공 : 한국교회사연구소]

  

 

 

 ※ 참고자료: 가톨릭 성인 > 현경련 베네딕타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 가운데 추첨하여 한주에 10명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교회와 역사>를 3개월분(10월~12월) 무료로 우송해 드립니다.

또한, 한 달에 다섯 분을 추첨하여 <기해병오 박해 순교자 증언록> 영인본 1세트(15만원 상당)를 보내드립니다. 

 

* 참여방법: 위 성인의 글을 읽고 묵상글을 적어주세요.

* 이벤트 기간: 9월2일(월)~11월 3일(일)

* 이벤트상품: 한주에 10명 - 월간지 <교회와 역사>,

                      한달에 5명 - <기해병오 박해 순교자 증언록> 영인본 1세트(15만원 상당)

* 당첨자 발표: 10월 15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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