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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에서의 주민의 형성, 왜의 왕국과 조선삼국

95729 이바램 [good79] 스크랩 2019-08-14

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1)
  • 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 센터장
  • 승인 2019.08.13 21:19
  • 댓글 0

극우로 치닫는 일본을 극복하고, 토착왜구를 박멸하자는 운동이 연일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에 일본군국주의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고자 연재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에 계신 강성은(康成銀) 조선문제연구센터장의 <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조선에서본 일본의 역사>
1. 일본열도에서의 주민의 형성, 왜의 왕권과 조선삼국
2. 일본의 성립과 신라·발해, 몽골의 내습과 동아시아
3. 무로마찌시대·쇼꾸호우정권기·에도시대의 일본과 조선-교린, 그 허실
4. 근대일본의 조선침략 개시-정한론과 강화도조약
5. 갑오농민전쟁과 청일전쟁(제1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6. 대한제국과 러일전쟁(제2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7. 대한제국의 폐멸-한국《보호》조약과 한국《병합》조약
8. <무단통치>와3·1운동
9. <문화정치>와 동화주의
10. <황국신민화>정책
11. 전쟁동원
12. 제3차 조선전쟁=동북아시아전쟁 - 해방과 분단
13. 해방후 제4차 조선전쟁 = 동북아시아전쟁 - 분단의 고착
14. <한일조약>과 냉전의 장기화
15. 세계에서의 냉전의 종식과 조선반도

열도에서의 주민의 형성

일본열도의 주민형성과정을 볼 때 재래의 죠몽사람(繩文人. 고몽고로이드=남몽고로이드)과 야요이(彌生)이후의 도래계의 사람(신몽고로이드=북몽고로이드)들의 쌍방을 시야에 넣어 파악하여야 한다. 현재의 아이누민족, 류큐민족은 고몽고로이드에 속하는 선주민족인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현 <일본민족>은 야요이 이후 대량적으로 조선반도로부터 도래하게 된 신몽고로이드와 재래의 고몽고로이드가 혼합하고 형성된 집단이다. 어떤 시뮤레션에 의하면 현대의 일본인은 전국 평균으로 죠몽계 3, 도래계 7의 비율로 쌍방의 유전자를 갖추고 있고 서일본에서는 도래계의 비율이 더 높다고 한다.

▲ 일본 선주민인 조몬인(왼쪽)과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인 야요이인(오른쪽)의 얼굴.[사진 : 필자제공]

야요이문화는 기원전 4세기경에 규슈(九州) 북부로부터 시작되고 서일본부터 동일본에로 짧은 기간에 혹가이도(北海道)와 서남 제도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역에 퍼졌다. 야요이문화의 특징은 ① 신석기시대의 죠몽시대에 비하여 생산기술의 종합적, 질적인 변화가 있었다. 수전벼농사가 시작되고 금석기를 제작하고 사용하였다. ② 유물의 조선적인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좁은놋단검(細形銅劍), 야우수식 질그릇(夜臼式土器)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③ 묘제의 변화, 즉 조선에서 널리 쓰이던 고인돌무덤(支石墓)이 이 시기에 규슈지방에서 쓰이기 시작하였다. ④ 사람뼈의 변화이다. 야마구찌현 도이가하마 유적(土井ヶ浜遺跡)에서 출토된 사람뼈 207체의 평균신장 164㎝인데 죠몽시대인의 160㎝보다 훨씬 높다. 이와 같이 야요이문화는 조선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 좁은놋단검[사진 : 필자제공]

하니와라 가즈로우(埴原和郞)는 일본인의 기원에 대하여 죠몽사람과 야요이사람과의 <2중구조모델>을 제창하였다(『日本人の成り立ち』人文書院、1995年). 그는 야요이로부터 고분시대(古墳)시대에 걸쳐 일어났던 급격한 인구증가는 일반의 농경사회의 인구증가(년률 0.1%∼0.2%)로서는 설명 못하며 이 기간 100만 명 규모의 도래인의 유입이 있었다고 하는 대량도래설(100만명도래설)을 제창하였다. 죠몽말기의 일본열도의 인구는 7만 6천명 정도인데 나라(奈良)시대에는 약 540만명 정도로 급증하였다. 야요이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4세기경으로 가정하면 1천년 간의 인구증가률은 년 0.4%로 된다. 조선반도로부터 일본열도에로의 도래는 야요이시대만이 아니라 7세기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파도처럼 계속되였다.

야요이문화가 보급함에 따라 북규슈 각지에 소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기원전 1세기의 왜에는 백여 개의 소국이 있었고 정기적으로 락랑군에 조공하는 소국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후한서>동이전에는 건무중원 2년(서력 57년)에 왜의 노국왕(奴國王)이 조공하고 이에 대하여 전한의 광무제가 인수(印綬)를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18세기에 하까따만의 시까노시마(志賀島)에서 금도장 <한왜노국왕>(漢委奴國王)이 발견되였는데 이 사료의 신빙성을 잘 보여준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왜인조(약칭 <위지>왜인전)에 의하면 2세기말에 왜국에서 큰 난이 일어났고 히미꼬(卑彌呼)를 여왕으로 하여 난을 수습하였다. 히미꼬가 통치하는 야마따이국(邪馬臺國)에는 30여의 소국이 있었다고 한다.

사가현의 요시노가리유적(吉野ヶ里遺跡)은 야요이중기(기원전 1세기전후)의 분구묘와 야요이후기(기원 2,3세기)의 환호부락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유적이다. 옹관 1만 5천기, 좁은놋단검, 관옥 등 조선의 영향이 짙은 유물이 대량적으로 출토하였다.

7세기 후반에 성립하는 <일본>이라는 것은 이러한 야요이문화와 그 계보의 위에 창출된 것이다. 이 점을 애매하게 한 채 죠몽문화와 <일본>을 직결시켜 <일본인>이나 <일본문화>의 기원을 터무니없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닐 것이다.

왜의 왕국과 조선삼국 - <미마나일본부>설

4세기의 동아시아를 부감하면 중국은 3세기에 위・오・촉의 3국, 4세기에 동진・5호16국, 5세기에 남북조의 시대였으며 조선은 고구려의 성장, 백제・신라의 건국,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의 시대였다. 왜국은 전방후원분이 출현, 확산하고 야마또(大和)조정에 의한 통합이 진전하는 시기다. 그런데 266년부터 413년까지 약 150년에 걸쳐 중국의 역사서에서 왜국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이 <공백기간>이 <수수께끼의 4세기>라고 불리우는 까닭이다.

이 공백기간을 메꾸기 위하여 일본인사가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편찬)에 있는 진구우(神功) 황후의 전설 등에 의거하여 일본고대사의 이미지를 4세기중엽에 야마또왕정이 전국을 통일하고 나아가서 조선반도에 출병하고 남부지방을 직접 지배하는 기관인 <미마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고 562년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200년간에 걸쳐 존속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사료라고 한 것이 백제칠지도나 광개토왕릉비, 왜의 5왕의 칭호였다.

▲ 칠지도[사진 : 필자제공]

명치시대 이래의 이러한 연구에 대하여 해방 후 북남조선의 사학자들이 근본적인 비판을 하였다.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의 이소노까미시궁(石上神宮)에 백제칠지도(百濟七支刀)가 전해져 왔다. 길이 75㎝, 좌우에 엇갈린 가지모양의 검신이 3개씩 뻗어있는 특이한 형태의 철검이다. 앞면에 34자, 뒤면에 27자가 금으로 상감되고 있다. 일본인사학자들은 백제왕이 복속의 표시로서 야마또조정에 헌상했다고 읽었다. 이 해석은 칠지도의 명문 그 자체의 검토에 기초한 해석이라기보다 <일본서기>의 기술에 따라 이해하려고 한 견해였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북의 사학자 김석형이 근본적인 비판을 하였다(<삼한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에 대하여>, <력사과학> 1963년 1호). 그는 명문의 <후왕(侯王)>, <왜왕지(倭王旨)>라는 말에 주목하였다. 후왕이란 본래 한나라시대에 황제와 군신(君臣)관계를 맺은 조공국(朝貢國)의 왕에게 주어진 것인데 왜왕에 대하여 백제왕이 후왕이라고 경칭을 붙이지 않고 있는 데서 백제왕이 상위에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왜왕지>의 <지(旨)>를 왜왕의 고유명사로 보고 <왜왕○>이라는 말투는 중국 황제와의 주고받는 말에서 쓰이는 형식이니 백제왕이 이렇게 부르고 있는 한 왜왕을 아래사람으로 보고 칠지도는 상위에 있는 백제왕이 하위의 왜왕에게 <하사(下賜)>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석형의 연구는 그때까지의 연구가 주로 <일본서기>에 의거해서 진행되였던데 대하여 명문 그 자체의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시한 점에서 획기적인 지적이였다.

당시는 남하를 노리는 고구려와 백제가 격렬한 싸움을 벌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싸움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활발하게 외교를 진행하였다. 이미 366년과 368년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372년에는 동진(東晋)에 입조하여 책봉을 받았다. 이러한 적극적인 외교의 일환으로 왜와의 동맹이 성립된 것이고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서 하사한 것이 칠지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인사학자들이 4세기 야마또왕정의 조선 남부지방 지배를 증명하는 또하나의 사료로 광개토왕비문을 들고 온다. 고구려가 발전하는 기초를 닦은 광개토왕이 413년에 서거한 이듬해에 대를 이은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념하여 수도 국내성(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에 세운 것이 광개토왕비이다. 비석은 높이 6.3m、밑변 1.2부터 2m의 4각형이고 4면에 1775정도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그중 제1면에 “왜이신미년도래해파백잔□□신라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는 기사가 나온다.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사진 : 필자제공]

일본학계에서는 이 기사를 “왜가 신묘년(서력 391년)에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와 ,  (또는 , ), 신라를 치고 신민으로 하였다”고 해석하여 4세기에 야마또왕정이 조선 남부지방을 지배한 증거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선학계는 <왜가 신묘년에 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고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이 신설은 <래>와 <해>의 사이에 문장을 끊고 왜가 신묘년에 와서 이에 대하여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온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에 알맞게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주체로 하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도해>(渡海)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고구려로 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바다를 건너온 주체가 혹시 왜라 할지라도 여기서 말하는 왜는 야마또왕정이 아니라(4세기의 야마또왕정은 아직 나라분지를 넘어서지 못한 지방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본국(조선삼국)의 정세에 대응한 왜땅에 있는 조선계의 세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끊어지고 있었던 왜국에 관한 기사가 다시 중국의 역사서에 등장한 것은 413년이였다. 421년부터 502년에 걸쳐서는 왜의 5명의 왕이 보내온 사신이나 책봉, 칭호수여의 기사가 계속된다. <송서(宋書)>(5세기말편찬)에 왜의 5왕의 이름과 그들이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여러 칭호가 기록되고 있다. 명치 이래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칭호속에 조선지명이 들어있어 당시의 조선반도에서의 왜국의 우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① 칭호에 있는 지역명은 같은 시기에 복수의 사람들에게 같은 칭호를 주고있었다는 것으로부터 칭호에 기재된 지역명은 실제로 군사지배를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② 고구려나 백제에 주어진 칭호와 비교하면 왜왕에 주어진 칭호는 항상 낮은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미마나일본부>의 문제

<일본서기>는 <미마나>라는 말을 가야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쓰고 있다. 가야는 이전의 변한지방을 중심으로 백제나 신라에 의한 통합에 편입되지 않고 소국(금관가야, 안라국, 대가야 등)이 분립하면서 연맹을 유지해온 지역이다. 금관국, 안라국 등 가야지방의 남부는 예로부터 왜와의 관계가 깊고 철자원의 교역이나 문화교류의 거점으로 된 지역이다. 왜의 출병도 이러한 소국과 연휴해서 진행되였다. 가야 전체를 왜의 지배지인 것처럼 그려온 <일본서기>의 <미마나일본부>설로서는 백제, 신라, 고구려와의 공방을 전개해온 가야사의 약동을 놓치게 된다.

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 센터장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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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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