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재난 피해자의 권리를 말하다

서로의 아픔 감싸는 재난 피해자 연대
진실부터 처벌까지 ‘참여’권 첫 공론화
4.16재단이 주최한 ‘재난 피해자 지원 및 권리 강화를 위한 국제 포럼’에 참석하고자 방한한 영국과 프랑스의 참사 피해자 단체 회원 등이 지난 20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4.16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과 연대의 의미로 손을 잡고 있다. 안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4.16재단이 주최한 ‘재난 피해자 지원 및 권리 강화를 위한 국제 포럼’에 참석하고자 방한한 영국과 프랑스의 참사 피해자 단체 회원 등이 지난 20일 경기 안산시 단원구 4.16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과 연대의 의미로 손을 잡고 있다. 안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고속 성장에 열을 올리던 수십년 동안 우리나라에선 수십명, 수백명이 죽고 다치는 재난을 국민들이 오롯이 겪어내야 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쓰러지는가 하면, 지하철이 불에 타 수백명이 숨지고, 수학여행 가던 고교생 수백명을 태운 배가 물에 잠겼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재난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빈번한 일이 돼버렸다. 최근 50년간 10명 이상이 숨진 재난이 276건에 이르러 우리는 1년에 다섯번꼴로 재난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재난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닥치는 일이 아니었고, 불평등한 재난 앞에 국가의 대응은 무기력했다. 앞으로 닥칠 재난은 지금과 달라야 한다는 새 패러다임이 일고 있다.

 

 

 

 

 

재난 때 우왕좌왕 진상규명 안돼
보상 난관, 책임 불분명, 재발 거듭
피해자들 그저 ‘불쌍한 사람’ 취급
복지 수혜자 아닌 ‘권리자’ 말할 때

 

 

사람 목숨 후순위로 둔 경제성장
같은 재난도 피해는 약자에게만
잇따른 재난에도 대응 시스템 미비
“소중한 경험 쌓아 제대로 대응하자”

 

 

순남은 항상 거실에서 잠든다. 안방 침대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교생 아들이 배 침몰 사고로 목숨을 잃은 뒤 생긴 버릇이다. 어느 날 갑자기 현관문을 열고 돌아올까, 그러면 발 벗고 나가 아들을 반길 수 있어야지. 순남이 늘 거실에서 잠드는 이유다. 영화 <생일>(2019)의 주인공 순남은 숨진 아들의 친구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지만 인사를 받지 못한다. 아들의 친구는 순남이 걸어오자 고개를 떨구고 다른 길로 피하고 만다. 친구는 죽었고 자신은 살았는데, 친구 어머니에게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인사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로 어머니를 잃은 황순오(51)씨는 순남의 행동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16년 전 황씨는 황망히 어머니를 잃고 한동안 침대에서 맘 편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1년 가까이를 거실에서 지냈다. 이와 동시에 황씨는 영화에서 순남 아들의 친구에게도 감정이 이입됐다. 거대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참사로 가족을 잃은 순남이 왜 그렇게 거실에서 자는지 너무나도 알 것 같았죠. 소중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는데 혼자 살아남은 순남 아들의 친구도 다름 아닌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황씨는 말했다. 이어 황씨는 “재난 피해자는 희생된 당사자뿐 아니라 참사를 함께 겪은 주변인 모두라는 걸 영화는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8일 경북 포항에선 의미 있는 영화제가 열렸다. 2년 전 대규모 지진을 겪은 포항 시민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일어난 재난에 대해 돌아본다’라는 주제로 재난을 다룬 영화를 함께 보며 아픔을 치유하는 행사였다. 재난을 앞서 겪은 이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공감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했다. 유경근 전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예은 아빠)과 대구 지하철 참사 유족 단체 ‘2.18안전문화재단’ 황순오 사업팀장, 박상원 흥해도시재생봉사단 단장은 이 영화제에서 세월호 참사를 그린 영화 <생일>(2019)을 함께 보고 각자 겪은 재난의 아픔을 나눴다. 3일간 열린 이 영화제는 성수대교 참사가 등장하는 <벌새>(2019),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 리>(2019) 등 9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안산, 대구, 포항 세 도시는 겪은 재난의 종류는 달라도 아픔은 같았다. 지진으로 17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포항에 사는 박상원 단장은 “재난이 일어난 뒤 정부의 대응 과정이 부실하다는 점이 매번 반복된다. 포항엔 재난이 발생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체육관에서 지내는 피해자들이 많고 특별법 제정도 지지부진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나아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사람 목숨이 소중한지 모르고 고속 경제성장에 열을 올리던 수십년 동안 우리나라에선 수십명, 수백명이 죽고 다치는 재난을 국민들이 오롯이 겪어내야 했다. 다리가 무너지고(1994년 성수대교 참사), 백화점이 무너지는가 하면(1995년 삼풍백화점 참사), 어린이가 자던 수련시설이 불에 타고(1999년 화성 씨랜드 참사), 지하철이 불에 타 수백명이 숨지고(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수학여행 가던 고교생 수백명을 태운 배가 물에 잠겼다(2014년 세월호 참사). 이 밖에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재난은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도 빈번한 일이 돼버렸다. 1964년부터 2013년까지 50년간 10명 이상이 숨진 재난이 276건에 이른다는 집계도 있다.(국립재난안전연구원) 1년에 다섯번꼴이다. 최근 10년(2009∼2018년)간 발생한 사회재난(다중밀집시설 화재, 건축물 붕괴, 지하철 사고 등)은 94건으로 이로 인해 917명이 숨지는 등 모두 2508명이 다치거나 숨졌다.(2018 재난연감) 지난 19일에도 제주 차귀도 서쪽 해상에서 어선이 불에 타 12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문제는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든 재난이 발생한 뒤의 상황이 매번 비슷하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사고 초기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사고 원인의 저변엔 기업의 위법행위나 행정당국의 부실한 관리감독이 늘 있었다. 하지만 관리 책임자를 엄벌할 수 있는 법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언론은 그저 재난을 ‘구경거리’처럼 보도한다. 재난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 지원을 위한 과정에서 정치인들은 재난을 여론에 활용하는 ‘재난 정치’를 펼치곤 한다. 반면 재난 피해자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때론 ‘사고를 피하지 못했던 부주의한 사람’ ‘보상에 눈이 먼 떼쟁이’ 등 사회적 비난까지 감수해야 한다.

 

2017년 5월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2017년 5월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박승화 <한겨레21> 기자 eyeshoot@hani.co.kr

 

하지만 살펴보면 같은 재난이라도 그에 따른 피해는 주로 가난하거나, 몸이 약하거나, 권한을 덜 가진 이른바 ‘재난약자’들을 향하고 있다. 영화 <기생충>(2019)을 보면 도시를 집어삼킬 듯한 폭우가 내리던 여름, 누군가는 캠핑을 다녀와 소고기를 넣은 라면을 먹으며 창밖의 빗물을 구경하지만, 누군가는 지하방이 물에 잠기며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이재민이 되어 체육관 돗자리 위에서 잠을 청하는 이들은 평소에도 주거가 불안했던 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우리 사회는 재난 피해자를 ‘불운한 사고를 당한 불쌍한 사람’으로 봐왔다. 실제로 재난 피해자는 사회취약계층이 국가의 시스템 미비로 재난 위험으로부터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결과였다. 몽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재난 피해자는 재난이 발생하기 전 이미 사회구조적 불평등으로 상당 부분 결정된다”며 “재난이 개인의 비극으로 개별화되지 않고 사회적 사건임을 인식하고 대응할 때 우리는 재난에 제대로 맞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불쌍한 사람들’ 아닌 ‘피해자 권리’

 

되풀이되는 재난과 미비한 국가의 대응 시스템 속에서 재난 피해자를 트라우마 환자, 동정의 대상, 복지 수혜자로 인식해온 시선을 거부하고 이들의 권리를 조명하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 지금껏 각각의 사고에 대응하며 ‘각개전투’로 싸웠던 재난 피해자들이 함께 모여 우리나라 재난 대응 시스템의 제도적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최근 10~20년 사이 발생한 여러 재난의 피해자 단체들이 대거 연대해 ‘재난 피해자의 권리 향상’에 대해 발언하는 첫 공식 행사가 열렸다. 세월호 유가족을 지원하는 4.16재단은 지난 21일부터 이틀간 한양대 에리카캠퍼스에서 ‘재난사회, 피해자 권리를 묻다’라는 주제의 국제 포럼을 열어 재난 현장에서 피해자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함께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프랑스, 영국, 뉴질랜드 등 국제사회의 재난 피해자 단체 활동가를 초청해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우리나라 재난 피해자 단체들의 네트워크 모임도 열였다. 이 자리에는 삼풍백화점 붕괴(삼풍백화점 유족회), 화성 씨랜드 화재(한국어린이안전재단), 대구 지하철 화재(2.18재단), 2011년 춘천 산사태(춘천봉사활동 인하대 희생자 기념사업회), 2013년 태안 해병대 캠프 사고(유족회), 세월호 침몰(4.16가족협의회), 2017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스텔라데이지호 가족대책위원회), 2017년 포항 지진(피해자모임) 등 사고 피해자들이 참석해 우리나라 재난 피해자의 권리 보장 방안에 관해 머리를 맞댔다.

 

재난이 터지면 가장 먼저 미안해하는 이들은 앞서 일어난 재난의 피해자들이었다. 2017년 대서양에서 22명의 선원이 실종된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 때 앞서 배 침몰 사고를 겪었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부에 진상 규명 요구를 함께하며 길잡이가 되어줬다. 지난해 김용균씨가 산업재해로 숨지자 역시 세월호 유가족들이 김씨의 어머니를 도왔다.

 

재난 피해자들의 연대는 이미 수년 전부터 시작됐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들과 화성 씨랜드 유가족이 팽목항을 찾았다. 앞서 재난을 겪은 피해자 단체들이 세월호 피해 가족들을 도울 방법을 고민한 것이다. 전재영 2.18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은 “찾아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 (재난을 앞서 겪은) 우리가 미리 제도적 틀을 닦아놨다면 어쩌면 세월호 사고도 안 일어났을 것”이라며 “피해자 단체끼리 연대해 재난 대응 경험을 축적하고 다음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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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행사 때가 되면 피해자 단체들은 서로 힘을 보탠다. 지난 6월, 화성 씨랜드 화재 참사 20주기 추모식에는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 피해자 유가족 등 다른 재난 피해자들이 찾아와 애도했다. 충남 태안 사설 해병대 캠프에서 고교생 5명이 숨진 태안 해병대 캠프 사고의 6주기 추모식이 열린 지난 7월, 추모식장에는 재난으로 자녀를 잃은 세월호 유가족, 제주 현장실습생 사망 사건 고 이민호군 아버지 등이 참석했다.

 

그동안 소소한 교류는 이어졌지만, ‘재난 피해자의 권리와 국가 시스템의 변화’라는 사회적 발언에 피해자 단체들이 나서는 데까지 세월호 참사 이후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각자 겪은 재난을 치유할 시간이 필요했고 국가와 기업 등 거대 권력에 대응하며 몸과 마음이 지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연대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2011년 춘천 산사태 참사로 자녀를 잃은 정경원 춘천봉사활동 인하대 희생자 기념사업회 운영위원은 “누구든 재난은 처음 겪게 되는데 경험이 없는 피해자들은 우왕좌왕하게 되고 적절한 대응 시기와 방법을 놓치게 된다. 재난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 ‘우리는 이런 경험을 했고, 이럴 때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니 이런 대처를 해야 한다’는 경험을 공유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재난 피해자 단체들이 연대해 조직체를 꾸리면 재난이 발생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정부나 기업의 대응이 적절한지 감시할 수도 있다. 자연재해든 사회적 재난이든, 나아가 산업재해까지 그 본질에는 국가의 시스템 부재와 관리감독 미비, 기업의 위법행위 등이 숨어 있다는 게 피해자들의 설명이다. 2017년 대서양에서 침몰해 22명의 선원이 실종된 스텔라데이지호 사고의 허경주 가족대책위원회 공동대표는 “우리는 사고 초기에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누구한테 물어야 할지 몰랐다. 사고 초기에 무엇을 챙겨야 할지, 피해자에게 이런 권리가 있고 기업이나 정부에 이런 걸 요구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진상 규명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