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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안식일에 해야할 일 (루카13,10-17)

150554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21-10-25

 

2021년 10월 25일 월요일

 

[연중 제30주간 월요일안식일에 해야할 일 (루카13,10-17)

 

   

 

1독서<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2-17)

12 형제 여러분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13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화답송 시편 68(67),2와 4.6-7ㄱㄴ.20-21(◎ 21ㄱㄴ)

◎ 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 하느님이 일어나시니그분의 적들은 흩어지고원수들은 그 앞에서 도망치네의인들은 기뻐하며 춤을 추리라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 고아들의 아버지과부들의 보호자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시네

○ 주님은 날마다 찬미받으소서우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 구원이시다우리 하느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주 하느님께 있네

 

복음<안식일 일지라도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루카13,10-17)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여인아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14 그런데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분개하여 군중에게 말하였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15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위선자들아너희는 저마다 안식일에도 자기 소나 나귀를 구유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끌고 가지 않느냐

16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사탄이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는데안식일일지라도 그 속박에서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1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분의 적대자들은 모두 망신을 당하였다그러나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신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제1독서 (로마8,12-17)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14,3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4,6)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8,15)

 

어째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때까지 그들이 새겨듣는 복음서와 바올의 서간안에서

여전히 예수님의 모국어인 아람어 표현 '압바' 호칭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 'Abba'호칭을 특별히 예수님께서 몸소 사용하신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인들의 기도문에서는, 당시 아람어를 쓰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를, 신뢰를 갖고 친숙하게 부르는 호칭,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아빠'라고 번역할 수 있는 'Abba'라는 호칭을 감히 사용하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당시의 언어 용법을 거슬러 가족들안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였던 '압바', 즉 '사랑하는 아빠'를 사용하였다.

 

그렇다면, 루카복음이 전해 주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Pater)라는 그리스어의 단순한 호칭은 일종의 번역으로, 아람어의 가족적 신뢰를 드러내는 'Abba'라는 호칭의 의미를 가장 가깝게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족적이고 신뢰성을 드러내는 호칭임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느님께 하느님의 위대함과 그 거룩함의 지위를 드러내는 예수님께서 칭하신 '압바'라는 호칭은, 그 거룩함을 모르는 사람이 부른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다.

 

올리브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꾸준히 아빠에게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하느님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예수님이 이미 믿고, 또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갈라디아 4,6과 로마 8,15에서도 아빠앞에서 자식의 특권(신뢰)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지, 그들간의 어떤  특별한 사랑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지상에서의 아버지 상(像)이 예수님이 하느님과 맺으신 결속 관계를 위한 상징으로 비쳐졌다면, 우리는 아버지가 곧 주인이기도 한 팔레스타인 문화권의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도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 9장에 노아와 그 아들들 (셈, 함, 야펫)의 이야기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치부를 덮어 준 셈과 야펫을 축복하고,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하며, 형 셈과 동생 야펫의 종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르신 '압바' 호칭은 상징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존중이 깔려있는, 피와 생명과 인격이 오고 가는 결속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전수받은 사람들, 마르코 3,33 이하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인 '형제들', '자매들',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종말의 때에 드러나실 하느님께 마음을 쏟는 자들,

예수님을 중심으로 작은 형태의 '추종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그분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을 포괄하는, 보다 확장된 형태의 무리가 다 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Abba 호칭은 그것을 부르는 사람들의 공동체 형성과 관련된 호칭이고, 교회를 구성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Abba를 부르는 사람들이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저희의' 라는 표현을 쓸때, 우리는 수평적으로 하느님을 한 아빠, 아버지로 고백하고 섬기는 한 자녀들이고, 한 가족이고, 한 공동체라는 말이다.

 

쉽게 이야기 하자.

우리 가족이 전부 믿음을 가진 가족이라면, 할아버지,할머니, 부모, 형제, 자매, 조카, 손자도 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나의 부모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으니, 자식인 나는 '하느님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는가?

 

성경을 믿고, 주님의 기도를 아는 타 종파 신자들도 똑같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른다.

그러면, 수평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군다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아버지의 신뢰를 받는 자녀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이니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영광, 축복의 상속자인데, 그 영광과 축복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8,17참조)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 4,4-7과 로마 8,14-17 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또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는, 우리가 받은 성령에게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나에게서 성부 하느님은 진짜 아버지이신가?  어떤 마음으로 '아빠, 아버지' 호칭을 부르는가?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 본당이나 교구,수도 공동체에서 체험된, 좋지 않은 아버지 상이나 상처때문에,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어려움은 없는가? 

 

하느님을 '아빠,아버지'라고 부르는 우리들은 같은 믿음의 자녀로서, 수평적으로 가족적 사랑이나 우애, 형제애를 서로 느끼는가?

서로 원수처럼 살고 미워하고 싫어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한 아버지라 부르는 같은 자녀라고 볼 수 있는가?

 

 

 

 

그리스도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에페 4,32─5,4)

4,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 그리스도의 대속, 그분의 십자가로 서로 용서하라 하시는 것이다. 내 모든 죄를 대속하신 그분의 십자가로 용서 받았음을 내가 믿는다면 다른 이도 주님의 십자가로 하늘의 용서를 받았음인데 사람이 어찌 심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서로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 모드는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그분의 자녀이다.

 

5,1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본받는(미네타이- 본뜬 것) 하느님과 똑 같이 되라는 말씀이다.

 

(2베드1,3-4) 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게 하신 그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4 우리는 그 영광과 능력을 힘입어 귀중하고 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 위대하신 하느님의 약속, 그 약속의 말씀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그분의 본성,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에페소서5,7절에서 여러분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흙, 어둠, 없음이지만 하느님의 약속으로, 그분의 자녀로 하늘의 빛, 하늘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하느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당신 아드님을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 주셨고, 그 아드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당신의 이웃으로, 당신처럼 사랑하셔서 대신 죽으셨다.

죄인인 우리가 그 사랑으로 그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성도들에게 걸맞게, 여러분 사이에서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 4 *추잡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농담처럼 당치 못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

= 어리석은 말, 얼이 섞인 말이라는 뜻, 곧 하느님의 얼(영), 그분의 뜻에 사람의 영(얼), 사람의 뜻을 섞어 하느님의 온전하신 뜻이 변질되는, 말씀을 폐기시키는 그 어리석은 말인 것이다. 그것이 추잡하고 온당치 못한 것이다.

 

(마르7,13) 13 이것이 바로 전해 오는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냐? 너희는 이 밖에도 그런 일을 *많이 저지르고 있다.'

= 그러면 구원의 말씀이 사람의 법으로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되어 모든 일에 감사의 말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온당 치 못한 신앙으로 등이 굽어 하늘을 못 보고 땅만 보는, 그 잘못된 병에 걸린 여자의 이야기가 오늘 복음이다.

 

(루가13,10-13)

10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11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 본문 앞4절에서 탑이 무너져 ‘열여덟’이 죄로 죽은 일이 있었다. 자신들의 열심, 인간의 지혜로 탑을 세워, 그 자신들의 이름으로 하늘에 오르겠다는, 곧 하느님의 뜻인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아닌 인간의 뜻인 그 자신들의 의로움이 구원의 길이라고 착각하는 그 착각이 잘못, 죄, 병이라는 것이었다.

그 섞인 잘못된 말을 듣고, 잘못된 신앙관으로 삶의 중심인 허리가 굽어, 하늘을 못 보는, 곧 하늘의 용서, 자유를 모르는 여자인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 죄에서 풀려났다는 것, 하느님의 용서, 자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이 신앙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13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하느님의 용서로 죄의식 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면, 정말 믿는다면~ 오늘 이 여자처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곳이 우리 신앙의 최종 목적지인 것이다.

 

(이사43,7) 7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 영광을 드리는 삶이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다.

 

(하바꾹3,17-18) 17 비록 무화과는 아니 열리고 포도는 달리지 않고 올리브 농사는 망하고 밭곡식은 나지 않아도 비록, 우리에 있던 양떼는 간 데 없고 목장에는 소떼가 보이지 않아도 18 나는 *야훼 안에서 환성을 올리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렵니다.

 

*천주의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 아멘!!!

 

<숫자 열여덟(18)의 의미>

3ⅹ6=18 육의 숫자 6이 하늘(3)의 흉내를 내면 666 그 짐승의 숫자로 죄인이 되는 것,(묵시13,18참조)

그래서 18= 완전수10과 부활8. 완전한 부활, 곧 하늘의 생명이 묶인 것,

그래서 사탄이 열여덟 해 동안이나 묶어 놓았다 하신 것.

그렇다고 사탄이 하늘의 생명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말, 거짓말로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복음(루카13,10~17)

 

"마침 그곳에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시어,"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으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11~13)

 

루카 복음 13장 10절에서부터 17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마귀가 들려 허리가 굽어진 병에 걸린 한 여자를 고쳐줌으로써 말미암아 야기된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소개되고 있다.

 

13장 11절에 '마침'으로 번역된 '카이 이두'(kai idu; and behold)에서 '이두'(idu; behold)라는 표현은 뒤따라 나오는 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바로 '여자'라고 번역된 '귀네'(gyne; a woman)가 강조되는 것은 사탄한테 묶여(16절) 병중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 여자의 불행한 처지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을 드러냄으로써 이후에 나타나는 회당장과의 안식일 논쟁에서(14~17절)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불행한 이 여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정당한 행위임을 독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시달리는'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astheneia; crippled; of infirmity)는 '병', '연약함'을 가리키는 '아스테네이아'(astheneia)의 소유격이다.

 

이 소유격은 '결과'를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는데, '마귀'를 가리키는 '프뉴마'(pneuma; a spirit)와 연관시켜 볼 때, 이 병은 마귀로 말미암은 것을 표현해 주고 있다.

 

16절에서는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탄이 ~ 묶어 놓았는데'로 묘사해 주고 있다.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었다'

 

'결과'를 가리키는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된 본문은 그 여자의 비정상적인 상태에 대한 여러 묘사가 모두 마귀들림으로 나타난 결과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즉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은 마귀들림(부마)으로 나타난 결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여자의 굽어진 상태를 표현하는 '슁큅투사'(syngkyptusa; bowed together; bent over) 기본형 '슁큅토'(syngkypto)는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 '쉰'(syn)과 '몸을 구푸리다', '몸을 굽히다'는 뜻의 '큅토'(kypt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몸을 완전히 구푸리다'는 뜻이다.

 

이 병은 아마도 척추염이나 다른 원인으로 말미암아 등뼈가 고부라져 허리를 펼 수 없는 곱사병을 말하는 것 같다.

 

한편, 원문에서는 '슁큅투사'(syngkyptusa) 앞에 과거에 계속적 사실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형인 '엔'(en; was)를 사용하여, 그 여자의 이러한 상태가 과거로부터 18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음을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본절의 후반부에 '조금도 ~없는'이라는 관용구인 '에이스 토 판텔레스'(eis to panteles; in no wise; (not) at all)를 첨가해서, 이 여자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가 지속적이면서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는 것을 부각시켜 준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여자나 주변 사람들의 아무런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능동적으로 병을 고쳐주시는 자비를 베푸셨다.

 

여기서 '풀려났다'에 해당하는 '아폴렐뤼사이'(apolelysai; you are loosed; you are set free) '아폴뤼오'(apolyo) 동사의 완료형이다.

 

이 동사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그 여자가 18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몸이 굽어진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11절의 미완료 과거 시제 '엔'(en; was) 동사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이 여자가 예수님의 이러한 선포로 말미암아 18년 동안이나 계속된 마귀와 질병의 속박(병마)에서 완전한 자유를 맛본 것을 나타내기 위해 완료형 동사가 쓰인 것이다.

 

그리고 특히 예수님께서 이 여자의 치유를 가리킬 때 '치유'의 의미가 아닌 '자유'의 의미를 갖고 있는 '아폴뤼오'(apolyo)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아폴뤼오'(apolyo)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아포'(apo; from)와 '풀다'는 뜻의 동사 '뤼오'(lyo)가 결합된 합성어로서 '놓아주다', '해방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소나 나귀가 마구에서 자유를 얻는 것처럼,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는 표현이다.

 

12절은 14~16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회당장과의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참된 안식이란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여기서 '찬양하였다'에 해당하는 '에독사젠'(edoksazen; glorified; praised)은 '영광을 돌리다', '찬양하다'는 뜻의 '독사조'(doksazo) 동사의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그녀가 계속해서 영광을 돌리고 있었다' 또는 '찬미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원문은 이 동사가 계속적 사실을 가리키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굽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11절의 '엔'(en; was)동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계속적 고통'에서 '계속적 찬양'으로 상황이 완전히 바뀐 것을 묘사해 주면서 참된 안식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주고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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