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가톨릭마당

sub_menu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성경바로알기 / 어둠의 저편

141644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20-10-24

성경바로알기 2020.10.23..

(공동번역성서)

어둠의 저편

31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8:31~32)

 

어둠의 저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제목인데 어둠은 그 자체로 절망과 실패가 아님으로 그 가늠할 수 없는 그 어둠을 인정하고 그 어둠에 저항하려는 그런 몸부림을 멈추고 체념하면 서서히 그 어둠의 저편이 보인다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라는 것은 적어도 이런 것은 나에게는 오면 안된다는 그런 저항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아십니까왜 나에게만, 감히 나에게이러한 생각 말입니다. 그러한 저항이 그 자신을 진짜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의외로 그 고통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기적을 경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속에서 의미를 찾기도 해요. 그러면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그 고통이 감사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 어둠의 저편이라는 소설 속에 이런 에피소드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어떤 삼형제가 바다에 나갔다가 태풍을 만나죠. 그리고 그들은 어느 무인도에 닿게 됩니다. 그 무인도에서의 첫날밤 세 사람의 꿈에 신이 나타나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거의 철학자에 가까워요. 그리고는 그 신이 삼형제에게 제안을 합니다. 커다란 둥근 바위를 굴리면서 앞으로 나가다가 자기가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나면 그 바위 굴리기를 멈추고 그 곳을 줄테니 그곳에 정착하여 살라는 제안이었어요. 다음날 삼형제는 큰 바위를 굴리면서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자기가 살 곳을 찾아가는 길이었지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난 바위를 굴리면서 가야했으니까요.

막내가 제일 먼저 기권을 했습니다. 막내는 그냥 바닷가에 멈춰 서서 난 여기서 물고기나 잡아먹으면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산 중턱까지 가서 멈춰섰습니다. “난 여기서 풍성한 과일이나 따먹으면서 살겠다.” 본래 참을성이 많던 장남은 끝까지 바위를 굴려서 산꼭대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과일도 없고 물고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황량한 땅이었어요. 어둠입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는데 엄청난 고통을 감수했어요. 그런데 그 곳에 서니까 아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과일을 수확하고 있는 둘째의 모습도 보였고, 힘겹게 그물을 던지며 물고기를 잡는 막내의 모습도 보였어요. 맏아들이 혼잣말을 합니다. “난 후회하지 않아 여기는 물고기도 없고, 과실도 없고, 심지어 춥기까지 하고, 외롭기까지 한 곳이지만 난 여기에서 누구보다 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저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으니까 이 고통을 후회하지 않아.”

여러분은 어떠세요 삶의 본질과 내용을 알지도 못한 채 열심히 물고기 잡이와 과일 추수로 분주한 아들들이 되고 싶으세요 아니면 물고기와 과실은 충분하지 않지만 그러한 삶의 고통을 통하여 삶의 본질과 내용을 올바로 알아가며 세상의 본질을 보는 맏아들로 살고 싶으십니까

인간의 인생이 절대자에 의해 많이 털리면 털릴수록 인생이 더 많이 보인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자들의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산악인도 광고 카피에서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려올 때는 보이는 것이 산의 진실이다.“ 라고 말은 했던 것입니다. 악다구니를 부리면서 산꼭대기를 향해 기어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내려올 때는 하나하나 보이더라는거에요. 그것이 산의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인생들은 하나같이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인생의 의미나 내용이나 본질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냥 꼭대기를 향해 달리기만 합니다.

막내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누구보다 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그것으로 자기의 고지 꼭대기를 점령하려하고, 둘째에 해당하는 경우는 누구보다 많은 추수를 해서 자기의 고지를 꼭대기를 점령하려합니다. 열심히 꼭대기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길에 있는 동안 그들의 눈에는 물고기와 추수할 곡식, 과일만 보여요. 그러다가 자기의 성에 차지 않으면 그것으로 고통스러워하고 그것으로 좌절하고 절망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만족한 지점. 내게 닥친 그 고난과 고통은 그 곳에 도달하면 사라질 것이라는 굳은 신념하에 그 고통과 고난을 막으려고 그 만족을 향해 일을 하면서 고스란히 그 고통을 다 겪어요. 인간들은 절대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왜 우리는 악다구니를 부리면서까지 열심히 달려서 자신이 상정해 놓은 안하무인의 그 고지를 점령하려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결국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치는 그 나. 그것도 내 밖에서 주관적으로 타인이 보아주는 나이지 객관적인 실체의 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들의 눈에 비치는 그 나의 자존심을 위해서입니다.

이 역사 속 모든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내 밖의 다른 이들이 라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 줄까에 온통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달립니다 좋은 차로, 옷을 입기도하고, 멋진 집으로 옷을 입기도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펙으로 겉옷을 해입기도 합니다. 그렇게해서 내 밖의 다른 이들이 나를 부러워해주고 가치 있다 인정해주면 그것을 행복과 기쁨으로 삼아요. 그에게 있어서 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아주는 나에요. 안타깝게도 그는 진짜 나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죽은 인생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가짜 나를 열심히 구축하며 살면서 진짜 나가 지향해야할 목적지를 놓치고 마는 것이에요.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게 살다 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을 향해 달리는 과정 속에서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그 가 초라해 보이고 성에 차지 않고,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에 달아보았을 때 비참해 보이면 스스로 고통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리는 것이 진리 밖의 인간들인 것입니다.

세상이 합의해 놓은 가치기준에 달아보아 가치 없음으로 평가되는 자신이 미운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고통의 본질을 추적해보면, 하나같이 전부 똑같아요. 심지어는 하느님께 잘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하기도 해요. 그것이 기특한 것 같지요 성경은 그것을 라고 합니다. 그것이 인본주의요, 율법주의의 핵입니다.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나. 열심을 부리는 나. 구원이라는 것은 그러한 세상과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차피 세상과 그 세상이 생산해 내는 사건들과 현상들은 보이지 않는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허락되는 것들입니다. 심지어 나를 평가하는 내 밖의 그 사람들조차 나의 구원의 여정에 필요한 한시적 소품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품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며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고난과 고통을 비롯한 인생의 모든 현상들은 진리를 보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지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가치 없다 평가 받는 자신을 바라보며 아파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짜 먹을 밥이 없어서 고통스럽습니까 정말 살 집이 없어서 이 한 몸 누일 방 한 칸이 없어서 그렇게 괴로우신 거예요 적어도 성도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 인생의 모든 것은 전부 선의 재료로 주신 것이에요. 성도는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는데 사용되는 것.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이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아들들에게 넘겨진 모든 것을 카리조마이χαριζομαι 선물이라고 하는 거에요. 모든 것,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것을 카리조마이 χαριζομαι 선물 이라고 그래요.

(로마8:31~32) 31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오로는 바로 윗 구절에서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미리 의롭게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했다.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미리 정했다. 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것은 변치않는 불변의 원리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무어라고 그 원리들에 대해서 그 원리들에 대해서 가타부타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말이에요. 그게 31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고자 하시는 분이 아니시냐.. 우리의 아버지 아니시냐 그런데 너희들 인생에 그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 주신 그 모든 것들이 너희들이 그것을 고통으로 감지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너희들의 대적으로 주신 것이겠느냐이런 말입니다. 사탄 마귀새끼들이 너희들을 어찌할까봐 걱정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고통이 대적입니까 환난이 대적입니까 적신이 대적입니까 칼이 대적입니까 아니라는 거에요.

모든 것이 30절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거에요. 그게 본문 32절의 내용입니다. ‘모든 사람은에서 모든 사람. 아들을 넘겨받은 파라디도미paradidomi (넘겨받다, 넘겨주다) 그 아들을 아들로 넘겨 받은 아들... 그 맏아들의 동생들 성도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진리로 넘겨받아 아들이 된 자들 적어도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선물로 보여져야 당연한 것이 아니냐 이러한 말입니다. 가난이나, 질병이나, 사고나, 이별이나, 실수나, 실패나, 나쁜 습관들이나, 심지어 죄까지도 그러한 것들로 인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선물 아닙니까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늘의 참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로 인해 세상 것 들을 많이 잃은 것처럼 보여지고 나도 그렇게 아프고 힘들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진짜 가치 있는 참 생명을 얻은데 하느님이 그것들을 도구로 쓰셨다면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 카리조마이 χαριζομαι아니냐 이런 말입니다.

그것이 정말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세상을 진리로 보아내는 하느님의 아들들 아닙니까 그래서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 피조물들 안에는 여러분들에게 닥치는 그 사건들과 현상들과 여러분의 그 현실들 그게 다 포함되어있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질병으로만 보느냐... 왜 이것을 고통으로만 보느냐... 왜 이것을 아픔으로만 보느냐 아들들아 나타나서 이것이 무엇인지를 좀 알려다오. 그러내다오, 밝혀다오.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나타나야 그 나타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아랫 세상의 피조물들이 오명, 오해, 누명,,을 벗을 수 있으니까요.

하느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그러한 말인 것입니다. 외모를 안 보신다고 하니까 안씻고 다녀도 되겠다라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느님은 마음을 보신다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시죠 진리를 그 마음으로 가진 그들을 마음을 가졌다라고해요. 그 마음이란 단어를 카르디아 καρδία 심장이란 단어와 똑같이 씁니다. 그것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것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 그 생명, 그 심장, 그 진리,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시는 것이지 여러분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진리의 하느님은 겉모양에 절대 속지 않습니다. 겉이라는 것은 항상 속이라는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지 겉의 것에 묶여버리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나타난 것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를 나타난 것을 자로 삼아 실망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오늘 어둠, , 마귀, 사탄 등의 단어에 갖고 있는 개념들에 대한 정의를 확실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막아버렸던 것이, 그들을 하느님께서 택하셨음에도 불구하시고 진리로 가지 못하게 했던 것은 그 것 때문에 그 은혜, 그 진리로 가지 못하고 하느님께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눈과 귀를 막은 것이 바로 율법과 성전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그냥 섬겨버렸고, 율법을 몸으로 행해버림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향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성전과 율법을 그런 용도로 주신것인가요 하느님께서는 그것에 진리를 담아 차서대로 티데미τίθημι 진설하여 이것으로 이스테미στημι똑바로 서라고 진리를 담아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에 보이게 나타내어 준 진리의 모형들을 통해 그 진리를 알지 못하면 그것이 곧 그들의 눈과 귀를 막는 것이 되는 것이죠 그렇게 눈과 귀를 막아 하느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성경이 사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다이어트를 심하게 해서 몸이 허약해지면 방구석에서 보이는 그런 거 말고 그런 건 여러분의 머리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그런건 없는 것이에요.

히브리어로는 사탄 שָׂטָן 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사타나스 Σατανς라고하는데요. 같은 말이에요. 이 사탄שָׂטָן을 헬라어로 음역해 놓으면 Σατανς에요. 그런데 이 사탄이 무엇이냐면 뱀이 아랫것으로 분석을 하면, 가르쳐버리면 그것을 그냥 대적자라고 이야기해요. 사탄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여러분 일반명사에요. 그럼 반드시 그것이 무슨 뜻인지 해석을 해야 되는데 사탄이라고 하면 아 그것이렇게 오해한단 말입니다. ‘나중에 주님과 전쟁할 그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대적자가 다윗을 보고 사탄 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에는 사탄이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서로 대적자들을 향해 사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대적자, 나의 대척점에 있는 것 이라는 뜻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그것이, 진리의 편에서 바라보면 그것이 바로 사탄이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이 뱀이라고도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에 가면 옛 뱀이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는 겁니다. 진리의 대적자. 진리를 못 보게 하는 것.

그렇다면 성전과 율법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에 묶여버리면 성전과 율법이 곧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곧 뱀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성전으로 율법으로 오신 그 분, 예수님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 그 진리로 당도하지 못하면 그 예수는 나에게 뭐에요 , 사탄이란 말입니다. 그 때 그 예수가 다른 존재 사탄이 아니라 바로 그 예수가 그 성전이, 여러분의 성경이, 그 진리를 못 보게 했을 때. 그러나 그 아들로 그 성전으로 그 성경으로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것이 구원이요 생명인것이에요. 그가 아들을 진리로 넘겨받은 자란 말입니다. 그에게 있어서만 그 예수 그 성경이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는 거에요.

껍데기로 보면 뱀, 나를 죽이는 것. 그런데 성전과 율법에 걸려 넘어짐으로 해서 성전과 율법을 예수를 사탄으로 뱀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 예수로 넘어져서 그 예수를 뱀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가 그 성전, 그 율법, 그 예수라는 불 뱀, 불 뱀이라는 건 물, 진리가 아닌 것, 그 반대편의 것의 뱀이란 뜻이에요. 그 불 뱀에 물려서 죽는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주의자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예수를 똑바로 진리로 보아내지 못하면 그가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이 될 것이다 라고 한것입니다. 사탄이 마귀가 아니라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사탄이 아니라말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당신을 뱀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들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뱀으로 만드느냐 그래서 너희가 그 하느님을 믿는다면 너희는 뱀의 자손인 것이구나 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327,33)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33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바리새인들 율법사들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자들을 뱀의 아들, 독사의 아들 이라고 부르세요. 율법, 성전, 예수를 이들이 율법을 몰랐어요 성전에서 제사를 안지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오신 예수가 여기 계세요. 너희들은 이렇게 줘도 모르니 그래 내가 말하는 성전 말하는 율법이 왔다라고 그분도 서계셔요.

그런데 그것을 진리로 보지 못하고 그냥 율법, 그냥 성전, 그냥 제사로 봐버리면 그들이 뱀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느님을 뱀으로 믿고 있구나. 사탄으로 대적으로 오히려 믿고 있구나. 하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입니다. 뱀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자들. 반대로 그러한 것들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 알면 그들을 하늘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대적자의 관점 즉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그 뱀의 자손들에게 진짜 성전, 진짜 말씀, 진짜 예수그리스도는 당연히 사탄으로 보이겠죠 저것이 뭐지 저것 사탄이네 우리 대적자네 그래서 바라새인들이 율법이 예수님 진리를 그 진리로 보아내지 못하고 그 예수를 그 진리를 바알세불이라고 불러요.사탄이다 이렇게 불러요.

(루가복음 1114~19)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쫓아 내셨어요. 여기서 벙어리 귀신이라는 건 다이모니안이에요. 나쁜 말을 가지고 있는 자, 그 좋은 말, 참 말, 진리의 말을 하지 못하는 자를 벙어리귀신 들렸다하는 거에요. 귀신이라고 자꾸 번역을 하는데.... 다이모이안을 그냥 나쁜 말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원래 벙어리라는 병은 없어요. 사고로 혀를 잃던가 그럼 몰라도. 듣지 못하는 자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래서 이 듣지 못함에 의해 그 말을 못함이 연결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벙어리는 진리를 듣지 못해서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자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고쳐주시죠. 어떻게요 바로 이 본문 위에 산상 수훈이 붙어 있거든요. 진리의 말로 그를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로 고쳐줬다는 거에요. 말이 터지게 만들어서.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 사역이니까요.

그런데 그곳이 성전 마당이었죠 산에 올라가셔서 입을 열어 산상수훈을 말씀하셨잖아요. 그 산 그 호로스가 성전이란 말이에요. 그 성전에 가서 이 성전이 무엇에 대해서 그 내용을 진리로 담고 너희들에게 주어진 것인지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해줄께 하시곤 말씀하신 것이 그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표적이 주님의기도문, 산상수훈 그 밑에 바로 붙어있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성전의 내용인 진리를 설명해주시면서 이것이 바로 너희들을 살리는 것이다 라고 하니까 벙어리 귀신이 나갔다고 그래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죠. 주님은 율법과 성전을 진리로 재 해석해 주시면서 그 표피적 성전과 표피적 율법, 그것을 이제 부정해 버리신 것이에요. 그랬더니 그 율법과 성전, 그것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던 이들이 그 예수를 바알제불, 사탄 이렇게 부른것입니다. “저 사람 바알제불이 보내서 온거지 저거 사탄이지이렇게 이야기 하더란 말입니다.

 

 

바알제불은요 BaalZebul의 합성어에요. 바알Baal이라는 것은 이방 베니게의 신의 이름이에요. 그런데 베니게의 신의 이름이라고해서 바알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쁜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남편’, ‘주인이런 뜻이에요. 굳이 파자를 하면 성전으로 오신 하느님. 하느님을 성전으로만 보면 그야말로 베니게의 신 바알이 되는 것이고, 거기서 진리를 알면 그것은 하느님인거에요. 그런데 제불 Zebul이라는 것은 날개로 날다라는 뜻이에요. 사전에는 파리이렇게 되어있는데 날개로 나는 것이 파리 밖에 없나요날개로 날다그럼 날개로 나는 그 성전, 그게 뭐에요 성전이에요. 그 예루살렘에 서있던 그 성전. 그런데 그 성전으로 구원에 이르면 그 성전이 바로 하느님의 진리로 내마음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그냥 섬겨버리면 그게 뭐에요 그야말로 사탄, 바알제불이 되는거에요. 그것이. 주님이 그 성전에서 그 성전으로 오신 당신 그 당신 안의 진리를 그 성전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진리로 이야기 해주었더니 그들이 저거 바알제불이네. 사탄이네했단 말이에요. 아니 바알제불이면 어때요 사탄이면 어때 그런데 그것으로 내가 그 진리를 알게 되면 그 바알제불도 나에게는 선물이라니까요. 그런데 이들은 그것으로 그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가 나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니까 대적자, 사탄, 바알세불, 마귀새끼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참 성전이며 참 율법으로 오신 진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알제불, 사탄으로 보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그 모형으로서의 성전, 지켜야할 계명으로서의 그 율법, 즉 진짜 사탄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그것을 그렇게 보는 것이 진짜 사탄이거든요. 진리의 측면에서 봤을 때. 그런데 거기서 예수를 가르켜 저거 바알제불, 사탄이라고 하면 그들이 정말 요한묵시록에서 불과 유황 못으로 들어가게 될 사탄이며 대적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에게도 똑같은 성전, 똑같은 율법, 똑같은 예수가 주어졌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바알세불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구원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알제불과의 논쟁 가운데에 이러한 진리를 던지는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분리가 되고, 성전과 성전이 분리가 되면, 겉과 속은 하나로 연합이 되어야 이것이 것이구나 라고 해야 진리가 되는데 이것이 서로 분리가 되면 어떻게 그것이 나라가 서는 것이며 어떻게 그것이 성전이 서는 것이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마귀가 마귀하고 싸우면 어떻게 하지 이런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겉과 속은 하나로 이해가 되어야지 너희는 속을 즉 진리를 내용으로 담아 주었더니 왜 겉으로만 보고 그것을 그 진리를 못 보느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나라가 서고, 어떻게 성전이 서는 것이겠느냐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수가 이 성전이 무엇인지를 율법으로 그 진리를 담아 설명해주는데 너희가 그것을 바알제불이라고 한다면 너희들이 지금 이야기하는 그 사탄이라고 한다면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준 것은 그것 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너희가 못 알아 듣는 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귀신을 쫓아 낼 것이냐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은 그것 밖에 없다. 진리는 그 묵시의 그 진리는 이 땅에 그냥 내리 꽂힐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것을 어떤 모형에 담아 너희에게 준 것은 그 아랫것 밖에 없어. 율법, 성전, 예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너희가 그 진리를 이야기 하는 나에게 바알세불, 사탄 이라고 하면 너희의 아들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어떤 방법으로 귀신에서 풀려날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이야말로 사탄의 자식인거야. 뱀의 자식인거야. 이 독사의 자식들아.’

(요한복음 843-45) 43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들은 듣지 못하는 구나라는 말입니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너희가 아버지라 하는 그것은 마귀야 그것이 율법이며, 성전이며, 제사거든. 그러니 너희는 너희의 아비 마귀에게서 난거야. 너희는 독사의 아들들이야.“라고 하는 거에요. 여기서 욕심epithumia 두 마음, 선악의 마음을 말합니다.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자기 안의 그 두 마음, 자존심과 남의 눈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삶을 사는 것에 이용하는 그 율법들, 말씀들이 모두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5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이렇게 내가 진리를 말해도 믿지 않으니 너희가 바알세불이며 사탄이다. 독사의 자식이야. 마귀의 자손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를 구원하는 메시아도 예수그리스도인 것이고, 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마귀의 아들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그 옛 뱀, 마귀도 예수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들은 그 예수에 의해 죽어요. 그러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예수가 옛 뱀이 되는거에요. 물론 오해된 예수, 섬김의 대상으로 여전히 살아있는 예수를 가리키는 거에요. 그 오해된 예수, 그 뱀 그건 얼른 죽어야죠 그 오해된 예수가 살아있으면 안되잖아요! 나에게 그 뱀이 살아있으면 안되잖아요! 그리스도께서 내 맘에 들어와야지.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을 뱀이라고 하신거에요. “내가 뱀으로 죽을게...”

(요한복음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믿으라하십니다. 행하지 말고.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모세가 광야에서 든 뱀 오피스는 불뱀에 물린 자들에게 치료제로 주신 장대 구리 뱀이었죠 장대 구리뱀, 그 구리뱀은 불뱀의 형상이에요. 역시 물의 반대. 불로써의 뱀. 그건 물리면 죽는 것이죠 치명적인 독으로 사람을 죽이는 뱀. 히브리어로 나하쉬 נָּחָשׁ 하고 네호쉐트 נָּחָשׁ 구리라는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아래의 것으로 그 죄를 분석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면 그것이 뱀이에요. 이 아랫것으로 그 죄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설명하면. , 그런데 그 네호쉐트, 구리가 성전의 어디에 쓰인 줄 아세요 성전 마당의 제단을 만들 때 쓰던 것이에요. 합금인 구리는 섞인 것이에요 거기에서 가면 갈수록 은, 금 순수한 것으로 진행되어 가는 거에요. 섞인 것이 바벨이까 바벨론에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끌어내어 순수 그 말씀 진리의 말씀 그 나라로 끌고 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리뱀 이라는 것은 구리 성격을 가진 뱀이라는 것입니다. 성전 마당의 제단의 성격을 가진 그 뱀, 율법이죠 당연히. 희생제사죠. 열심히 인간이 그 두 마음으로 반복하는 것. 그것을 언약의 기둥에다가 달아버려요.

그럼 언약의 관점으로 그것을 보게 되면 아 그것은 우리 보고 그렇게 열심히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에게 자신을 게시하여 희생해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라는 것이로구나라고 깨닫고 그 구리 뱀을 바라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사는 겁니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그래요.

그러기 위해선 그 구리뱀이 반드시 여러분에게 대하여 죽어야 된다니까요. 그 뱀이.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뱀으로 왔다. 내가 성전으로 왔다. 내가 율법으로 왔다. 내가 이것으로 죽을게! 그 나의 죽음으로 그 진리 그 사랑을 봐! 그러면 살아!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본문을 거기에서 몇 명이나 그 뱀을 봤겠느냐 아니면 아무도 안 봤느냐 이런 건 아무 상관 없는 겁니다.

성경은 독자인 성도에게 구원의 원리, 그 은혜, 그 사랑을 설명해주고 있는 거에요. 몇 명이 봤는지에 관심갖지 말고 내가 봤는가를 확인하십시오! 나에게 있어서는 그 불 뱀이 그 언약의 기둥에서 정말 죽은 뱀이냔 말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으로 오시는 것인데 그 뱀이 거기에 진짜 달려 죽었느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 뱀에 물린다는 것은 성전이나 율법이나 예수를 진리로 보지 못하고 성전 마당적 개념으로만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바라보고 살아난다라는 것은 성전과 율법과 예수를 진리, 그 아가페, 그 사랑으로 보고 살아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표피적 성전과 표피적 율법과 표피적 예수, 나의 섬김의 대상이었던 예수가 죽는 거에요. 거기서 부정당하는 것이에요. 그래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뱀독에 물리면 바로 그 뱀의 독으로 해독제를 놔야 살아요. 자기가 어떤 뱀에게 물리면 그 뱀이 무엇인지 반드시 확인해야 해요. 아니면 그 뱀독의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해요. 독마다 증상이 다르거든요.

하느님은 모든 인간들을 불뱀에 물린 자로 이 역사 속에 던져 넣으세요. 그들은 모두 그렇게 불뱀으로 살다가 뱀의 후손으로 유황 불 못에 들어가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 뱀에 물렸다는 것을 아무도 모른 다는 겁니다. 그래서 민수기에서도 뱀에 물린 것을 알고 구리뱀을 바라본 자만이 살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219)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뱀을 죽여 장대에 달았더니 뱀에게 물린 것을 인식한 자만이 그 구리 뱀을 쳐다보고 살더라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모든 인간들은 선악과의 모든 패러다임 아래에서 가장 인간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들의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이 간디나 법정이나 타종교인들, 청렴결백하고 검소하게 살아간 이들을 존경합니다. 많이 존경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인간의 최선이라 생각하며 삽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살다 간 사람들을 롤 모델로 치켜세우고 그들을 본받아 살고 싶어해요.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자기과시 욕망이란 것입니다. 남들이 나를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세요. 그런데 진리를 알고보니까 그렇게 나를 과시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이 정해놓은 그것을 충실히 행하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내가 사실은 뱀에 물렸던 것이구나. 그렇게 살아서 하느님께서 나를 예뻐해 주시는 것이 아니구나. 그런 삶 때문에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구나. 그럼 어떻게 그것을 죽이고 나를 살리는, 그 생명, 그 하느님, 그 진리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율법과 성경이 그리고 예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죠. 그들이 장대에 달린 놋뱀을 제대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만이 삽니다.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그 출애굽이 시작되는 시점에 모세의 뱀과 애굽 술사들의 뱀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애굽의 뱀은 하느님께서 보낸 뱀에 의해 죽는다. 세상의뱀... 바로 예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710~12) 10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에게 가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 아론이 자기 지팡이를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 앞으로 던지자, 그것이 큰 뱀이 되었다. 11 파라오도 현인들과 요술사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이집트의 요술사들도 자기네 요술로 그와 똑같이 하였다. 12 그들이 저마다 자기 지팡이를 던지자, 그것들도 큰 뱀이 되었다. 그러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들을 삼켜 버렸다.

야훼께서 하신 대로 행하여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었으면 그 뱀은 야훼의 하심에 의해 있게 된 뱀인 것입니다. 그렇죠 고대시대에 지팡이가 가지는 의미는 훈육, 가르침, 인도라는 것이었습니다. 라메드 ל 라는 단어 자체가 지팡이라는 뜻도 있지만, 가르침, 훈육, 인도라는 뜻이 있어요. 여기서 이스라엘의 라마단이 나온 것입니다. 자신을 훈육하고, 가르치는 기간. 그래서 낮에는 굶고, 밤에 열배 먹고 그러잖아요.

, 이 지팡이가 우리를 인도하고 훈육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몽둥이로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뾰족하게 지팡이를 만들어서 쿡쿡 찔렀어요. 훈육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고 인도한다고 하는 것은 나를 훈육한다는 것입니다. 이 라메드가 그런 지팡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를 훈육하기 위해 우리를 아들로 만들어 내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신 그 지팡이가 뱀으로 온단 말입니다. 뱀으로 와서 그 가짜 가르침, 그 거짓 가르침을 먹어야 그가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술사에요. 헛것을 가르치고, 허깨비를 만들어내는 자들이 바로 술사들의 술법이잖아요. 그 뱀. 아무리 멋져 보여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엔 허깨비 간디 아이구 저 허깨비. 내가 너에게 그것 만들어오라고 하였느냐 그래봐야 육신인 것을.” 그러니까 아래의 뱀, 옛 뱀을 죽여서 삼켜버리는 건, 하느님의 명대로 이 땅에 오신 뱀이에요. 하늘의 뱀. 여러분 뱀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이미 뱀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징그럽다 더럽다 라고 하지만, 당시 애굽에서 나올 때의 뱀은 뭐에요

그 당시 파라오들이 모두 왕관에 달고 있던 것이 뭐에요 . 신이었어요. 그때는요. 더럽고 무섭고 이런게 아니라. 그래서 최초의 성경을 받을 자들이 이해할 때 그 뱀은 신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좌, , , , 어둠, 빛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니까 그런 것들이 설교를 들으면 하나하나 해결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자꾸 그것이 선명해져서 저건 악이고 이건 선이니까 우리는 이쪽에만 서있자라는 길로 가면 그걸 잘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결국 진짜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그 것을 확실히 구분하여 한쪽을 따르는 것을 훌륭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자유입니까 ...

우리의 동력으로 살고 싶어 하고, 살 수 있다 자신하는 그 바다의 물고기, 바다뱀이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 바다뱀을 하느님의 명을 받은 뱀이 삼켜버리는 것이 구원이에요. 그 뱀에게 먹혀서 죽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 모세의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신 후에 꼬리를 잡아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뱀은 여러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머리를 잡아야지 꼬리 잡으면 죽습니다.

(출애굽기 42~4) 2 주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그가 지팡이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3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땅에 던져라.”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그것을 피해 물러서자, 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 그가 손을 내밀어 꼬리를 붙잡으니, 뱀이 그의 손에서 도로 지팡이가 되었다.

여기 등장하는 지팡이가 라메드, 야곱이 평생을 절뚝거리면 짚고 다니던 하느님이라는 지팡이란 말입니다. 야곱이 짚고 다니던 하느님... ‘땅에 던지니땅에다가 던진단 말이에요. 뱀의 꼬리를 잡다에서 잡다로 번역된 하자크qz"j;가 정복하다 그래서 치유하다 이런 말이에요. 뱀의 꼬리를 묶고 정복하여 치유하는 것. 머리로. 그 지팡이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갔더니 그 뱀이 그 지팡이가 애굽 술사의 그 뱀을 먹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뱀이 나쁜거에요 그 뱀으로 진리를 알면 그러니까 어떤 이들에게는 그 예수의 오심이 무시무시한 심판인 것입니다. 무서운 살육의 뱀으로, 심판의 뱀으로 오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메리크리스마스가 왠말입니까. 온세상이 잔치를 벌여요. 자신이 도륙되는 현장인데... 그리고 왜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안모이냐고 그래요. 모여서 열심히 노세요. 삼삼오오. 그걸 왜 교회의 행사로 그런 것을 합니까 교회가 그 크리스마스와 무슨 상관입니까 원래 그 날도 콘스탄틴 대제가 태양신의 축일을 성탄절로 지정해버린 것 뿐입니다. 그런데 왜 온 세상이 그 크리스마스 트리의 태양을 상징하는 오나먼트를 보며 태양신을 기념하느라 참 빛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모형으로 준 태양을 기념하며 자기들끼리 잔치 벌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걸 빌비 삼아 한 몫 챙기는거고. 그래서 우리만 맨날 적자야. 대목은 다놓치고. 십자가도 마찬가지에요. 그것이 태양신의 표식이라니까요. 콘스탄틴 대제가 크리스마스를 만들었으면, 그리스도교의 표식은 무엇으로 만들었겠어요 자신들에게 가장 친숙한 표식으로 그리스도교의 표식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나치도 나오고 불교의 만자도 나온 것입니다. 옛날 로마의 신상들은 모두 위에 태양을 얹고 있었는데요. 그 표식이 그대로 십자가가 된 것이에요. 신상 위의 태양. 그러니까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붙들고만 있으면 그 십자가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원 같은데서 그 삽자가 한번 붙들고 기도하면 무슨 능력이라도 받는 것처럼 싸우고들 그러는데 그런 것은 마귀도 비웃을 일입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을 머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애굽의 태양신 라 Ra의 시나리오와 똑같은 것이에요. 그걸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아는 그런 신화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가장 잘 아는 것으로 내가 복음을 설명해줄게하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들어서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태양신 Ra도 인간들에게 인식이 불가능한 신이었어요. 그것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소의 형상이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신의 형상으로 소를 만든 것이 당연한 것이었어요. 그들이 430년간 보아온 것이 그것밖에 없었거든요. 그런데 그 시나리오에 의하면 그 태양신 Ra를 대적하는 땅의 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뱀이에요. 땅속에 사는 뱀. 큰 뱀. 그래서 그 태양신 Ra가 그 대적자 사탄을 죽이러 내려오는데 무엇으로 내려오냐면 양으로 내려와요. 이것이 성경 이야기가 아니라 애굽의 태양신 Ra의 시나리오를 이야기 하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양으로 오시는 거에요. 하느님이시라면서요. 양으로 내려오는데 그때 그 양을 뱀에게로 인도하여가는 대변자가 뱀이에요. 뱀이 내려가서 그 큰 뱀을 세 토막으로 내서 죽이고 평화가 와요. 그것이 태양신 Ra의 시나리오인데 그것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이 그것이니까 내가 그 진리, 그 평화, 그 안식을 너희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마!”라고 양, 뱀 이러한 것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의 대적으로서의 그 용이나 뱀은 진리로 이해되지 못한 율법으로써의 성전, 예수, 성경, 세상을 가리킨다는 거에요. 그것을 바다라고도 부르고, 어두움이라고도 부르고, 깊음이라고도 부르고, 저녁이라고도 부르고, 밤이라고도 부르고, 죄라고도 부르는 거에요.

하느님은 아들을 보내서 진리의 영으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 안에 들어가라 그러세요. 씨를 심고 죽어라! 들어가라! 그런단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아랫것들 속에 숨어 있는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심으로 그들을 그 아래 뱀의 자리, 바다의 용의 자리, 무저갱 속의 그 짐승의 자리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이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눈이 떠진 하느님의 백성들의 눈에 진리로서의 성경, 그 진리로서의 성전, 그 진리로서의 예수, 그 진리로서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란말이에요.

그렇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사탄이나 바다나 어둠이나 죄나 악이나 선이나 밤, 이런것과 무관하게 하늘의 존재로 살 수 있는거에요. 그걸 용서라고 해요. 그럼 당연히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선물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바오로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세상 어떤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시나 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이 있겠니! 다 선물이야! 다 선물! 그것으로 알면 돼. 조심스럽지만 너의 죄도 너에겐 선물이야. 그것 없이, 선악과 없이 어떻게 생명나무를 아니

*>잘 이해해야해요. 제가 10년간 단계를 밟아 오면서 여기까지 온거에요. 그런데 아무한테나 가서 선악과가 사실은 선물이래. 죄가 우리에게 선물이래. 그럼 안됩니다. 여러분 큰일납니다. 줄사람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줄 수 있을 때 주세요. 그동안 제가 얼마나 입이 근질거렸겠습니까 빨리 되야 줄텐데. 그런데 그 단계들을 거치지 않으면 또 지금 이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해요.<*

이렇게 우리가 , 그런것이구나! 저 어둠의 저편에는 그 진리 그 빛이 있는거였구나!’ 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하게 되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무엇이라고 불러요 우리의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불렀으니까. 우리도 사탄이라고 불러요. 그들이.

(마태복음 1025~27)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집 주인성전이죠. Master 그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시죠. "너희들을 그 껍데기만 보는 자들은 너희를 바알제불이라고 부를 거야.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그 껍데기가 벗겨지는 날이 온다." 어떻게 하래요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빛으로 말하고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성전 위에서 이야기해준다.” 그러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 감추는 것이 드러나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숨은 것은 반드시 내용으로 알려주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껍데기로만 보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은 그 내용들이 환하게 드러날 때 그 진리에 반하여 사탄의 무리가 되는 거에요. 대적자의 무리가, 그럼 끝나는 겁니다. 무시무시한 거에요. 그것이요. 그들이 어디 있어요 다 성당(예배당) 안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성소에서부터 심판 한다.”하신 거에요. 적그리스도, 거짓 예언자 이들이 절에 가있겠습니까 교회에 와있지요. 그리스도가 왜 절에 가있겠어요. 거기엔 석가모니가 가있지. 엔타이크라이스트AntiChrist 거짓 예언자 그리고 거짓말 하는 마귀의 자손들 다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성소에서부터 심판 한다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즉 이 어두운 세상에서 아래의 것들을 가지고 말씀해 놓으신 것을 가지고 빛으로 말을 해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고민을 좀 해봐야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에 관심이 없어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거에요. 목숨에 관해서는 그렇게 관심이 많은데 참 생명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렇게 어두운 데에서 어두운 것을 가지고 그 빛을 이야기 해주는 그들을 별이라고 해요. 그 광명을 이야기해주면. , , 하니까 너무 어렵게들 생각하시는데 성전, 세상, 하느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어둠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았어요. 그런데 똑같은 성전이에요. 어둠이에요. 그런데 그걸 빛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두움을 보고 이것이 빛이네 라고 알게되는 거에요.

그런데 똑같은 거라니까요. 어둠 안에 이 육신 안에 사는데 내가 뭔지를 알았어 이제. 그럼 내가 빛인거에요. 그래서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세상을 비추어라. 그러는거에요. 다른거 아니라니까요. 뭐 대단한걸 받고 여기 무엇이 있는게 아니라. 그래서 그들을 비추는 자들. 광명. . כוכבו 코카부.

 

(다니엘 121~3) 1 “그때에 네 백성의 보호자 미카엘 대제후 천사가 나서리라. 또한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재앙의 때가 오리라.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2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3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장군 미카엘전쟁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이에요. ‘책에 기록된 자이것은 생명책입니다. 성경. 그 성경이 내 이야기가 되면 그것이 구원받는 것이죠. 그 성경이 나에 대해서 기록(녹명祿命)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책이 그저 예수의 이야기이면 그건 내 책 아니잖아요. 그때는 심판의 책이 되는 것입니다. 그 성경이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면 생명이라고 해요. 그 말씀이...

아담אָדָם이라는 말의 의미는 흙에서 구별해놓은 진리에요. 이게 바로 우리에요. 사람이에요. 진리가 된 자. 그래서 요한묵시록에서 우리를 말씀 이라고 하는 거에요. 너희는 말씀이다.그런데 이 아담이 어디에서 나오냐면 아다마 אֲדָמָה라는 데서 나와요. 하느님께서 구별하신 진리를 소리로 내는데 이 소리에서 진리가 된 자들이 나오는 거에요. ה가 소리니까. 그런데 아다마와 아담 사이에 무엇이 있는데 바로 아파르עָפָר에요. 아파르로 만드세요 아파르가 티끌, 먼지, 모래 이런뜻이에요. 이 아다마 땅에서 아담을 만들어내려고 하는데 중간에 무엇으로 아담을 만들어내냐면, 성경은 아파르 티끌로 만들어낸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티끌, 아파르가 무엇이냐면 아래의 것으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율법이에요. 아래의 것으로 성전이라는 뜻도 있고, 입이란 뜻도 있고, 말이란 뜻도 있으니까.

아래의 성전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그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아담을 만들어내려면 무엇을 주냐면 율법을 줘요. 그래서 율법을 티끌, 먼지, 모래 라고 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먼지로 그들을 떨어버리라 하십니다. 그들을 아직 아담이 아닌 아파르일 뿐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율법, 아파르 에다가 집을 지으면 어떻게되요 무너진다는 거에요. 여기다 지으면 안되요.

아담이 성전이에요. 진짜 성전. 내안에 거하시는 진짜 성전. 그러니까 이 티끌, 이 먼지가 바로 내 자리였구나. 그런데 그 티끌, 먼지에 물을 받아 진리의 물을 대주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담 ,하느님의 아들, 사람이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파르에 물이 대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무엇이라 하시냐면 내가 너희들에게 비를 모래같이 내릴 것이다하고 하세요. 그럼 죽어요. 율법으로 내려오면 죽는 겁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무슨 땅에서 먼지를 티끌을 모아 주물러 아담을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땅이라고 읽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게 읽는 사람은 그렇게 읽으십시오. 그러나 이 말이 무슨 말씀인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이 안에서도 복음을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파르에 머물면 죽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별이에요 아니면 삼십촉 짜리 전구에요 자 이 진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나 상황이나 여건이나 스펙으로 자신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어요. 왜 남의 눈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이나. 남이 평가해주는 나의 모습에 일희일비 하세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면 어때요 적어도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여러 해 공부했으니까 이제 조금씩은 달라져야하는 것 아닙니까 왜 복수를 해요 왜 교회에서 회당에서 싸움이 일어나죠니가 나를 물로보냐이런 생각 때문 아니에요 남이 나를 물로 봐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떠한 존재로 비추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내 안에 그 진리 그 생명이 있으면 그복음 그말씀이 있으면...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내 아들은 온 세상보다 천하보다 귀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진리가 없는 세상의 눈들은 아무짝에도 쓸모다 없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다 태워버릴 것들이니까요. 소품들이 하는 이야기에 절망하고 슬퍼하고 그런다니까요. 그들은 그저 땔감이 될 인생들입니다. 그들의 시선이나 평가가 뭐그리 중요합니까

그리고 나의 과거가 뭐 그렇게 부끄럽고, 창피하고, 더럽고, 추하고, 비루하고, 감추고 싶은 것이 되어야합니까 그것으로 내가 인간의 불가능함과 하느님의 그 전능하신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카리조마이 선물이다라고 한다니까요. 그리고 무엇 때문에 미래의 일을 그렇게 걱정하세요 사후가 준비되어 있는 여러분이 왜 노후를 걱정하십니까 사후가 불확실하니까 노후도 걱정되는 것 아닙니까 다 거짓말인겁니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에 묶이면 여러분은 현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늘 불행할 수 밖에 없어요. 나는 그것만 이루면 행복할거야! 그리고 그 미래로 가면 저것만 이루면 행복할거야! 그런데 그 미래로 가면 또 다른 미래가 보여요. 그렇게 현재에 만족할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불안에 덜덜 떨다가 조바심 내다가 록펠러처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럼 속으로 이럴거에요. 저렇게 갈건데 살면서 저거 다 누리다가 가지. 여러분 그렇게 일주일만 놀아보세요. 재미있나. 곧 고통이에요 그것도요. 인간은 하느님 그 진리 아니면 절대로 만족할 수 없어요. 현재를. 여러분이 걱정하는 미래가 여러분 뜻대로 되어져도 여러분은 행복하지 않아요. 잠깐 아주 잠깐 행복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데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서 시선이 그리로 모아지면 또 불안해해요. 뭐하러 그렇게 사세요 여러분은 그러면 단 한순간도 안식할 수 없어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하셨어요. 세상이 줄 수 없는 다른 평안, 평화를 내가 주었다고 하셨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현재에서 그것을 누려야해요. 지금을 살라니까요. 과거와 미래에 억매이지 말고 지금을 만족 하면서 한 발 한 발 하면 되는 겁니다.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의 사건들을 묵시와 진리 속에서 재해석해서 살게 되면 그 어둠의 저편을 보게 되면 그 모든 것 뒤에 하느님의 그 뜻을 발견하게 되면 여러분은 그 시간과 그 사건과 무관하게 사는 진짜 하늘의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그 사건에 묶여버리면 그걸 땅의 사람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걸 지옥이라고 해요.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에요. “내 옆에 있는 사람 이 사람이 이정도 수준이 되어줬으면 좋겠어. 이정도의 학벌과 이정도의 교양과 이정도의 외모와 이런 것이 되면 나는 비로소 행복할거야!” 그게 되나보세요. 천만의 말씀. 그때까지 늘 불안하고 불행하게 살게 된다니까요. 지금 나에게 주신 그분이 그 사람이 나의 선을 이루는데 가장 적합한 친구기 때문에 준 것 아니에요. 그럼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면 되요. 그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자에요.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든지 신경쓰지 마세요. 그런데 우리는 그 남의 시선에 비춰지는 내 옆 사람을 걱정해요 왜냐하면 그게 나거든요. 사실은. 사악한 인간들이 말이죠. 다른 사람 찾아봐야 그게 다 그거에요.

지금 그 현재를 살아가세요. 가장 가까운 여러분의 벗, 그 친구, 그가 여러분의 반쪽이에요. 지금 그 사람을 누려야지 앞으로 어떻게 되어질 그 사람을 그 사람을 기대하지 마세요. 가나안 너머의 그 풍요를 봐야 해요. 질병 너머의 그 치유를 봐야합니다. 고난 너머의 그 천국을 봐야 되요. 거기에 자유가 있고 거기에 안식이 있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은 그 예수의 오심이 정말 축복이요, 선물입니까 아니면 무서운 뱀의 출현입니까 제발 알고들 흥분하세요. 남의 생일에 술 먹고 들떠 노는 사람들 때문에 함께 흥분하지마세요. 

 

 

 


0 1,444 0

추천  0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