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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요한6,60-71)

129651 윤태열 [daniel8155] 스크랩 2019-05-12

2019년5월11일(토)/주일복음말씀묵상/ †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요한6,60-71)

 

 

 

 

요한6,63절은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생명을 주는 성령(그 영)이 언급된다. 육체(육)가 되신 예수님(요한1,14)은 부활하신 후,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생명주시는 그 영(1코린15,45절, 그 영<the Spirit> = 성령)이 되셨다.

 

 

나는 나의 글에서 “그 영”(the Spirit)과 “성령”(holy spirit)을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섞어 사용하고 있지만, 성령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사실 몇 구절 외에는 “성령”이라고 쓰지 않는다. 대신에 그 대부분은 “그 영”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한 사람의 영은 정관사 "the"가 없는 소문자 “spirit”로 사용하고 있음도 참고하시기 바란다.

 

 

1코린15,45-46절은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산 혼(living soul)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life giving spirit)이 되었다. 그러나 먼저는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혼적인 사람이고, 그 다음이 영적인 사람이다.”(원문 참조)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심은 그리스도인의 기초이다. 거듭남에서 몸의 구속까지 모두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심에 근거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생명 공급이 될 수 있는 것은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이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로 영접할 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신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영접하지만, 우리가 얻은 분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이시다.

 

 

여기서 “육(육체)”은 물질적인 몸의 살을 가리킨다. 주님께서 “내가 줄 떡은 곧 내 살이다”(요한6,51)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자신의 물질적인 몸의 살을 그들에게 주셔서 먹게 하시려는 것으로 생각했다(요한6,52).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다(요한6,60).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셔서 먹게 하려 하신 것은 자기 육체의 몸의 살이 아니라고 설명하셨다. 육체인 그 살은 무익하다. 그렇다면 주시고자 하신 것은 결국 무엇인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것은 부활 안에 계신 주님 자신이신 생명을 주시는 그 영, 곧 성령이었다. 죽음과 부활 후에 그분은 육체에서 영으로 변형되셨다(1코린15,45).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영접한 그리스도는 육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 영이신 그리스도이다. 생명의 떡인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 안에서 체현(體現)되셨다. 지금 그분은 부활 안에서 생명 주시는, 곧 살리시는 영이시며, 성령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체현된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영접할 때 우리는 생명이신 그 영을 영접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말씀은 실체적이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했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 예수의 말씀, 곧 진리만이 영을 움직이고 살린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면 내 영이 자유함을 얻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의식, 전통, 교리와 교회법 등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 모든 것이 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하고 부담스럽지만, 성령으로 인도받으면 참 기쁨이 넘친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들려주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앞으로 일어날 그분의 대속적인 죽음, 부활, 승천, 성령의 오심을 이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내 살을 받아먹으라, 내 피를 받아 마시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3절), 또는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57절)라고 하셨을 때도 “어떻게 제 몸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한단 말인가?”하며 의아해했다. 그분이 하신 말씀 속에 담겨 있는 많은 껄끄러운 내용들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고(62), 성령이 수여될 때에 비로소 해소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유대인들은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42), 또 어떤 이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라고 반문하였다. 이런 영적인 말씀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매우 거북스러워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하며 이해할 수가 없다고 불평하였던 것이다(60절). 그러나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심”에 관한 주님의 말씀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세상 말은 세상 언어를 통해 그들의 수준에 맞도록 얼마든지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것만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니코데모에게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3,12)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아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성령께 감동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록할 수도 없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영적인 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들을 수 있다. 버터를 넣어서 만든 음식은 뜨거울 때 먹으면 맛이 있지만, 식은 후에는 기름이 엉겨 붙어서 먹을 수가 없다. 그것을 다시 먹으려면 끓여야 한다. 이와 같이 성령에 감동된 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알려면, 우리 또한 성령에 감동되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영이며 생명이다.” 이 구절에서 “말”은 그리스어로 레마(rhema)로서 즉각적이며 지금하시는 현재적인 말씀이다. 이것은 항상 있는 말씀을 가리키는 로고스(Logos)와는 다르다(요한1,1). 여기서 “말씀”은 “그 영” 다음에 나온다. 곧 성령은 살아있고 실재하지만, 매우 비밀하고 만질 수 없고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말씀은 실체적이다. 먼저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주님께서 “그 영”, 곧 성령이 될 것임을 언급하셨다(62절). 그런 후 주님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명의 영의 체현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지금 주님은 부활 안에서 생명주시는 영이시며, 이 영은 그분의 말씀 안에서 체현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을 사용하여 그분의 말씀을 영접할 때에 우리는 생명이신 그 영(성령)을 영접한다. 말씀은 우리의 밖에 있다. 내가 말씀을 내 안(영)으로 영접할 때, 그 말씀은 즉시 그 영(성령)이 되신다. 내가 그 말씀을 말해낼 때 그 영은 다시 말씀이 된다. 당신이 말씀을 당신 안으로 영접할 때 말씀은 다시 한번 그 영이 되며, 당신이 그 말씀을 말해낼 때 그 말씀은 다시 그 영이 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사실상 우리는 그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복음을 믿을 때 그들은 말씀을 믿는다. 이것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이 말씀을 영접할 때 사실상 말씀은 그들 안에서 그 영이 된다. 당신에게 묻겠다. 지난날 당신이 말씀을 믿었을 때, 당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당신이 이 말씀을 믿었을 때 당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자극되어 살아났다. 이것은 당신이 당신의 정신 안에서 약간의 지식을 받아들였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과 영 안에서 어떤 것이 살아났음을 뜻한다. 당신은 말씀을 믿었지만 그 영을 영접한 것이다. 당신의 밖에 있는 말씀이 당신 안에서 그 영이 되었다.

 

 

당신의 밖에 있는 말씀이 당신 안에서 그 영이 되었다. 그것이 밖에 있는 말씀이었지만 안에서 그 영이 되었다. 당신이 말씀을 듣고 영접했을 때 어찌된 일인지 또한 그 영을 영접했다. 이것은 매우 비밀스럽고 놀랍다. 주님은 그 영이시며 말씀이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 영이시며 그 영은 말씀이시며 말씀은 그 영이시고 그 영은 우리가 누리는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지금 우리는 그분이 무엇이며 어디에 계시는지 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 안에서 말씀을 접촉할 때 우리는 사실상 우리는 산 떡이신 주님 자신을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매일 매일 우리는 우리의 음식이며 생명이며 생명공급이신 놀랍고 부활하신 이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있다. 그분은 생명을 주는 그 영이시며 생명의 말씀이시다.

 

 

사도행전 1장 2절은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신 것은 모두 다 성령으로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결단코 주님의 가르치심과 그의 명령하신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은 자기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그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강제로 주입시키지도, 심지어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지도 않으셨다(66절).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너니라”(6,45)고 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65)는 말로 대신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이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행하시는 표적도 보면서 열심히 따라다니더니 점차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고 감동도 못 받게 되자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6,66).

 

그러자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향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하고 물으셨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7-68)라고 대답하였다.

 

 

베드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혹함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떠나가는 것이 전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라고 대답한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곧 당신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다”(6,63)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그분의 실재(reality)를 만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마르8,27-30).

 

 

그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마귀이다. 이는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사실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머지않아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였다.”(70-71)라고 말한다. 마귀는 사람에게 접근할 때 미혹의 영으로 하여금 먼저 생각부터 파고들게 한다.

 

 

카인(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그의 마음에는 아우에 대한 미움과 질투가 자리 잡고 있었다(창세4,5-8). 이런 카인의 마음을 아신 하느님은 카인에게 “죄의 소원은 네게 있고, 네 문에는 피가 엎드려 있다”고 경고 하셨다.

죄를 짓고 싶은 마음, 곧 아우를 죽이고자 하는 소원이 문 앞까지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 경고를 듣고 동생에 대한 미운 마음을 무산시켰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다(1요한3,12).

 

 

카인에게 살인을 사주한 자는 마귀였다. 마귀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며 그에게서 난 자들 또한 동일한 짓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가인이 동생을 시기한 것이나, 이스카리옷 유다가 예수를 팔아버리려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 사람 개인에게서 발생한 생각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받은 생각이었다. 이스카리옷 유다 자신은 그의 행위가 마귀의 사주를 받고 있는 줄을 몰랐을 것이다!

 

 

요한12,1-8절에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을 때,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마태27,1-5절에 보면, 그는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으나,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자기가 예수를 판 이유와 예수의 무죄를 변호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마귀의 함정에 완벽하게 빠졌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말한다. 이 말씀들로 미루어 보면, 유다는 소위 합리적이고 율법적이며 또한 이기적이며 남을 속이는 사람이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범죄의 동기뿐만 아니라,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넘기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후회한 것(마태27,4-5)은 결국은 주님을 지식으로만 알고, 성령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을 삼년 반이나 따라다녔지만 그분의 실재를 접하지 못한 자였던 것이다. 성직자를 포함한 우리 믿는 자들의 가장 불행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선악을 아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는 사람은 참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율법과 지식으로만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또한 똑 같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의 은총을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생각과 능력만을 믿고, 성령의 능력을 인정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한 혼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참으로 믿거나 증거할 수 없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육체)은 아무 쓸모가 없다.”에서 “육체”는 율법으로 훈련된 육신(몸과 혼)을 말한다. 율법으로 아무리 잘 훈련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죽은 영을 살릴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살린다.

 

 

이스라엘은 천 년이 넘게 율법대로 살아왔다. 율법의 모든 제사와 의식들은 신앙적 양심을 담아서 하느님을 섬기는 예법이었다. 그들의 제사와 의식들은 그것들이 예배하는 이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육체의 예법으로 새 질서의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만 부과된 외적인 법규일 따름이라고 말한다(히브9,9-10). 곧 율법으로는 육체의 훈련은 시킬 수 있어도 영을 구원하거나 새롭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영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명을 주시는, 곧 살리는 것은 성령이라고 했으니 예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은 우리의 밖에 있다. 내가 그 말씀을 내 안으로 영접할 때, 그 말씀은 즉시 그 영(성령)이 된다. 내가 그 말씀을 말해낼 때 그 영은 다시 말씀이 된다. 당신이 말씀을 당신 안으로 영접할 때 다시 그 영이 되며, 당신이 그 말씀을 말해낼 때 다시 그 영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사실상 우리는 그 영(성령)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6,68절에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문제도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곧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을 읽지 않고(먹지 않고), 읽어도 왜곡하거나, 특히 읽어도 영으로 하지 않고 지식으로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말씀을 영접하면, 당신은 당신의 영 안에 그 영을 소유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말씀을 영으로 먹지 않고, 영으로 먹는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며, 말씀 대신에 의식과 형식과 교리와 교회법으로 대치되어 있으므로, 말씀을 먹을 수가 없도록 변질되어 있다. 나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 혼신을 다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영 안에 그 영(성령)을 소유하면, 당신은 내적 생명의 공급인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시면, 당신의 영이 자유함을 얻으며 성령의 인도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입으로 나온 그 말씀으로 하신다(요한16,13).

 

 

주님은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그분은 먹을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말씀이요 영이신 그분을 먹기 위해서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한다. 성령에 이끌리면 자기 영의 움직임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한 생명의 거룩한 길이다.

알렐루야! 아멘!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을 참조 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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