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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6일 (금)부활 제4주간 금요일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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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은혜와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요한 1.14-17)

134973 김종업 [rlawhddjq] 2019-12-31

좀 길어요 참고 보세요. 살롬.

 

 은혜와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 (요한 1.14-17)

 

요한복음 114~17(공동번역성서)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치기를 '그분은  뒤에 오시지만 사실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말이다라고 하였다16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받았다17 모세에게서는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은총과 진리를 받았다 아멘

 

온통 은총(은혜)입니다  은혜는 항상 거룩과 관계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에 은혜를 입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어서 그분을 영접하게 된 사람들은 그때부터 성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죄와 사망에 법이 지배하던 그들에 삶을 은혜에 법인 생명에 성령에 법이 다스리게 되는 거죠 그게 성화인 거에요

로마서 82절 보세요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성령에 법이 우리 안에 이제 들어와서 죄와 사망의 법을 몰아 내 버렸다라는 것이죠

로마서 614절 보세요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은혜)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에 은혜를 입어서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제가 일부러 지금 본문에 있는 단어들을 써서 문장을 만들어 가고 있는 거에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은 은혜가 그 삶을 지배해야 맞어요 그런데 눈을 돌려서 우리의 현실을 보면 여전히 우리에 삶을 죄가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요 은혜가 내 삶을 지배해야 되는게 맞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는 은혜가 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보다 죄가 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아 보이지 않아요

 

로마서 721절 보세요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22 나는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속에는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법은 나를 사로잡아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파라 케이타 라는 단어는 근접해 있다 ~ 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의미에 파라케이마이에 직설법 현재 중간태 3인칭 남성 단수에요 그러니까 사도 바오로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 한컨에 늘 악을 기꺼이 행하고자 하는 준비된 의지가 있었다라는 거에요 이렇게 신자는 거듭난 이후에도 죄와 끊임없이 싸워야 되는 거고 때때로 죄가 거듭난 신자를 지배할 수도 있는 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신자의 삶을 죄가 절대적으로 지배를 할 수는 없어요 신자에 삶속에 나타나는 그 죄에 지배는 죄에 상대적인 지배다라고 이야기해요 그 말은 불신자에 삶 속에 나타나는 그 죄에 지배는 절대적인 것이여서 그 죄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지만 신자에 삶 속에 나타나는 그 상대적인 죄의 지배는 비록 외양은 다른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저항해서 몰아낼 수 있는 집이라는 거에요 우리 성도는 죄 죽이기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야 한다라는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그 신자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 죄가 비록 상대적이지만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라는 거에요 그러면 비록 그 사람이 신자라 할지라도 불신자와 방불한 더럽고 추악하고 모진 삶을 살게 된다라는 것이죠

 

요한133절 보세요 3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

이게 정상이죠 원래 은혜의 지배아래 있어야 된다구요 그런데 게릴라 정부가 서갖고 이 게릴라가 나라를 먹어 버리는 수가 있다니깐요 여러분 안에 죄의 세력 은혜의 세력이 공조하는데 여러분이 은혜의 세력에게 자꾸 먹이를 주면 은혜의 세력이 여러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고 여러분이 죄에 세력에게 자꾸 순종하게 되면 여러분 안에 이 죄에 세력이 지배를 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거는 아주 심각한 건데 사람들이 그 심각성을 잘 모르는 거 같해요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지리멸렬해야 하는 그 죄가 그 신자 안에서 불법 정부를 세울 수 있게 되는지 이 죄에 교리를 잘 알아두셔야 되요 그래야 죄를 죽일 수 있고 죄에 빠지지 않고 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거에요

 

로마서 612절 보세요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13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16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자기가 복종하는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정확하죠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에 종으로 정의에 이른다 이렇게 거듭난 신자도 하느님에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안에 작은 세력으로 남아 있는 잔존하는 죄를 죽이는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 은혜에 정부가 함락될 수 있다라는 거에요 그렇다고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를 죽이시는 주체는 성령이에요 분명 우리가 죄를 죽일 수는 없어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반드시 신자에 순종을 통해서만 일을 하세요

로마서 813절을 보시면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여기 육체 사르카라는 이 단어는 죄된 육체를 말하는 거에요 여기 보시면 그 죄된 육체를 몸에 행실이라고도 부르죠 그것을 성령으로써 죽이면 살 것이다 그래요 그러니까 몸에 행실 죄된 육체를 죽이시는 주체가 누구라는 거에요 성령으로서 죽이면 살 것이다 그랬으니까 성령이 주체에요 죄를 몸에 행실을 죄된 육신을 죽이는건 성령이에요 그러나 그 죄를 죽이라는 명령은 성도에게 떨어지고 있단 말이에요

성령이 주체가 되셔서 죄를 죽이시는데 반드시 우리 성도에 순종이 따라야 한다라는 거에요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 그래요 죽는다 그러죠. 그 단어는 헬라어 아포스네스케인인데요 그 말은 죄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 성도에 삶 속에는 생명력이 사라진다 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행복과 기쁨과 찬양이 없어지고 마치 죽은 자처럼 고통스럽게 살게 된다라는 거에요 생명력이 없게 살게 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영으로서 몸에 행실을 죽이면 어떻게 된다구요 산다 에요 여기서 쓰인 죽이면 또 다른 단어에요 앞에 쓰인 죽이면과 여기서 쓰인 단어는 다나토어라는 단어인데요 그 단어는 동물이나 사람같은 생명이 있는 사물을 공격을 해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그럴때 쓰는 단어에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죄와의 싸움은 그야말로 치열한 전투여야 된다라는 거에요

 

히브리서 124절 보세요4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아직까지 피를 흘린 일은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도가 죄와 싸울때 피가 흐를 정도로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신자에 경건은그 사랑 안에 있는 하느님에 생명에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게 되는 조건이 되기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신자는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되는 거에요

디모테오전서 48절 보세요 8 육체적인 훈련이 가져다 주는 이익은 대단한 것이 못됩니다그러나 경건한 생활은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그것은 현세의 생명까지도 약속해 줍니다

신자들이 죄에 지배아래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처음에는 남아있는 그 죄에 오염 때문에 괴로워해요 그런데 지속적인 그 죄에 지배가 계속되게 되면 어느 순간 본인이 자발적이며 의도적으로 죄를 짓게 되요 그걸 대역라고 하죠 성경에서요

 

마태복음 527절 보세요 27 ''간음하지 말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여자를 범했다. 

타락한 인간속에서는 절대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으며 밖으로 나타나는 그 실행죄는 모두다 그 타락한 더러운 마음속에서 출발된다라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에 수준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거에요 그래서 죄인들은 도저히 자신들에 실력으로 하느님의 요구수준을 맞춰 낼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에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진 거죠

그 예수 그리스도에 필연성 십자가에 필연성을 설명해 주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에 백성들이 짓는 모든 마음속에 죄와 밖으로 출산된 죄를 전부 뒤집어 쓰고 십자가에서 죽어 주셨어요 그래서 성도들에 모든 죄는 이미 다 용서를 받은 거에요 그러나 성도들에 신앙생활속에서 그들이 출산된 죄를 지은 것과 아직 출산되지 않은 마음속에 죄를 지은 것이 성도들에 삶에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라는 이야기는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 수록 그들에 성향은 점점 죄를 향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죄에 경향성에 더욱 완고한 힘을 실어주고 그 경향성에 맹렬함과 무모함을 더해주고 죄책감을 없애줘요 덜어준다구요 자꾸 그렇게 해서 신자의 영이 하느님에 말씀에 둔감해 지게 만드는 거에요 그런 신자는요 하느님에 말씀이 던져져도 깨닫지를 못해요 멍청해져 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에 마음을 느끼지도 못해요 그리고 하느님에 말씀에 순종하지도 못해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쉽게 죄에 유혹이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신자 안에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그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속임이라는 무기를 쓰는데요 죄가 신자를 속이는 것은 크게 세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져요

첫번째로 죄는 그 죄가 갖고 있는 궁극적인 목표를 숨겨요 여러분 죄에 궁극적인 계획은 단순히 신자로 하여금 개별적인 죄를 짓게 만드는게 목표가 아니에요 그럼 뭘까요 어차피 그에 구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도 목표가 아니라면 그러면 죄가 뭐하러 그렇게 발광을 떠는 걸까요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죄에 궁극적인 계획은 그러한 개별적인 죄를 출산하게 함으로해서 신자에 영혼에 지배력을 확보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 신자를 피로 사신 하느님에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 주는 거죠 그게 죄에 궁극적인 목적인 거에요

둘째로 죄는 용서하시는 그 은혜에 원리를 자의적으로 적용을 해서 신자를 속여요 무슨 말인가 하면 신자가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면 신자는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죄는 신자에게 니가 죄를 짓는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쉽게 용서해 줄거야 그러니까 마음놓고 죄 지어 괜찮아 이렇게 속인다라는 것이죠 그 죄에 용서 은혜에 원리를 자의적으로 적용을 해서 신자를 속이는 거에요

세번째로 죄는 범죄함으로 얻는 우리가 죄를 지으므로 얻는 즐거움에 대해서요 과다한 기대를 갖도록 속여요 죄는 신자를 유혹하면서 신자가 하느님 앞에서 갖게 될 죄책감보다 신자가 그 죄를 지으므로써 얻게 되는 즐거움이 더 클 것이라는 그런 과장된 기대를 신자에게 심어준다말이에요 그래서 신자는 잠시 죄책감으로 망설이다가도 그 죄로 인한 즐거움에 대한 기대로 죄책감을 무참하게 밟아 버리는 거에요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커다란 기대를 갖고 이 죄를 지으면 나는 커다란 즐거움과 쾌락속으로 빠질거야하고 죄를 지었는데 허탈했던 경험이 있죠 그게 죄에게 속은 거죠 내가 하느님 앞에서 이 죄를 지음으로 해서 받는 죄책감이나 이 고통 이거보다 그 즐거움이 더 클거라고 기대를 해서 떡 지어 놨는데 짓고 나니까 그 외로움과 중압감과 고통과 괴로움이 더 커 그래서 허탈해진 적이 있잖아요 그게 죄에게 속은 거라 말입니다 우리가 그 죄에 강압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은 하느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로 부터 출발을 해요

  

 신자가 아무리 극악한 죄에 지배를 받고 있다 할지라도 그 신자 안에 있는 하느님에 은혜가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실패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죠 비록 은혜의 불길이 거의 꺼져가고 작은 불씨만 남아 있는 그런 처참한 상황이 될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은혜에 불씨는 성도에 순종과 죄와 싸우겠다라는 의지를 에너지 삼아서 금방 활활 타는 횟불로 발할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내가 지금 죄의 아래에 있는데 나의 죄가 너무 커서 너무 커서 이제는 어떤 희망도 없어 이렇게 좌절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님이 그 죄 때문에 죽으셨어요 그리고 그 죄때문에 죽으시고 나서 그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지금 흘려주고 계시다구요 그러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에 삶 그 고난과 수난과 역경과 죽음에 삶 그것이 무엇때문에 이 땅에 주어졌는지 생각하시란 말이에요 우리는 일어나는 거에요

루가복음 2334절을 보세요 34 예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고 기원하셨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에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자기 아래에서 제비를 뽑고 있는 자기 옷을 갖고 제비를 뽑고 있는 로마 군인들에게 그리고 자기를 둘러싸고 조롱하고 있는 그러한 왼수들에게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저들의 죄를 용서하러 여기 온거 아닙니까 이러고 가셨잖아요 예 우리에 죄를 용서하러 오신 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아는데 여전히 죄에 지배아래 있다면 그분에 죽음을 모독하는 거죠 우리는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에요 그냥 2000년 전에 한번 쓰고 만게 아닙니다 능력으로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영향력과 경항성으로 미치고 있는 거에요

시편 425절을 보세요 5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 하는가 하느님을 기다리리라. 나를 구해 주신 분, 나의 하느님, 나는 그를 찬양하리라.

시편 12111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2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

이 도움들이 무슨 도움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여러분이 필요한거를 하느님이 막 쏟아 부어주신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에 자녀로 지어져 가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거 그런거 여러분 앞에 닥쳤을때 하느님 어떻게 해야 내가 이 장애물을 딛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 삶 속으로 한발 더 깊이 갈 수 있을까요 했을 때 하느님이 여러분을 도우신다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분께 열심히 구하면서 열심히 죄를 죽이면서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동하여 그 길을 가는거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자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죄 가운데 살도록 돕는 그 삶에 환경을 정비하고 정돈을 해야 되요 소극적인 의미에서 삶을 정돈한다는 건 자신으로 하여금 죄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환경으로 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거구요 적극적으로는 죄를 이길 힘을 얻게 하는 은혜에 방편과 그를 실천하는 환경에 자신을 가까이 두는 거에요

 

 죄에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환경을 바꾸는 거죠

첫째로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죄와 싸운다라는 것은요 신자가 그 죄 자체를 혐오하거나 미워해서 죄 죽이기를 하는게 아니라 그 죄로 말미암아 자기가 당하게 될 그 불명예나 수치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가 되서 죄와 싸우는거 신자가 어떤 특정한 죄에 계속해서 말려들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죠 이런 범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하지 내 체면과 내 자랑을 위해 죄를 잠시 벗어 놓는건 죄죽이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죄 죽이기에 동기는 복음 때문이라니깐요

 

두번째로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죄와 싸우는 경우를 살펴볼께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느님과에 관계에 화복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에 마음에 평안을 위해서 죄와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신자가 죄를 지으면요 그 죄는 즐거움도 주지만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게 되어 있어요

시편 3110절 보세요 10 괴로와서 숨이 넘어갈  같으며 한숨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견딜  없이 기운은 다하였고  마디마디가 녹아납니다

이렇게 신자는 고통을 받게 되어 있어요 죄를 지으면 그래서 신자는 은혜에 대해서도 실증을 금방 내지만 죄에 대해서도 실증을 느껴요 권태감을 느낀다니깐요 심지어 죄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인간은 하여튼 불가능한 존재에요 인간은 그래서 범죄한 사람들에게는 지속적인 평화가 없어요 죄를 짓는 그 순간에는 더 이상에 평화를 바라지 않을 정도로 순간적인 즐거움이 있지만 그 즐거움이 지나고 나면 다음에는 그 잠시 누린 죄에 즐거움보다 몇배더 커다란 심리적인 외로움과 생각에 혼란이 밀려오게 되어 있어요 그때 잠시 신자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죄를 떨쳐 버리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라는 것이죠

베드로후서 220-22 보세요 20 만일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세상의 더러운 것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다시 거기에 말려 들어 가서 정복당하고 만다면 그런 사람들의 나중 처지는 처음보다  나빠질 것입니다21 그들이 올바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22 '개는 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다.' '돼지는 몸을 씻겨 주어도 다시 진창에 딩군다라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 맞았습니다

그 개가 더럽고 역겨워서 토해 버려야 할 것이라서 토한 것이 아니라 얼떨결에 토한거죠 그러니까 그 토한 걸 다시 먹는 거에요 그러니까 죄를 죽였다고 하는데 성도가 죄를 죽였다고 하는데 그 죄를 왜 죽여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얼덜결에 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목욕을 시켜놨더니 돼지가 다시 그 흙탕물속에 들어갔다라는 것은 돼지가 목욕하는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목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얼떨결에 한거에요 그러니 목욕한 것이 왜 좋은지를 모르니까 다시 구정물에 또 들어간다라는 것이죠 고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목적과 동기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되는 거에요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허락하셨단 말이에요 우리 안에 죄가 오염이 부패성이 그냥 남아 있게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 했단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죄라는 것이 얼마나 집요하고 더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한 죄로 부터 구원을 해주신 그 하느님에 크심과 그분에 은혜에 깊이를 체험케 해주시기 위해서 죄를 잔존케 하시는 거에요

여러분 간수라는거 아시죠 그 간수는 예전에 극약으로 쓰던 거에요 바닷물에서 소금끼만 농축해서 뽑아 낸거죠 그거를 죄수가 한사발만 먹으면 항우장사도 그 자리에서 즉사해요 그런데 그 간수가 쓰이는 곳이 있어요 두부를 응고하는데 쓰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여태까지 계속해서 그 독을 먹고 있었단 말인가 여태까지 내가 먹은 두부를 합치면 간수 한사발은 넘을텐데 나는 곧 죽을거야 아니에요 두부는 영양음식이에요 그런데 독이 들어간다니깐요 거기에,   중국에서 이 소금은 자살용으로 제일 많이 쓰였던게 소금이에요  소금을 일정량 이상 많이 먹으면 삼투압 팽압이라는게 있잖아요 그래서 농도가 높은 소금이 농도가 낮은 장기속으로 쫙 빨려 들어간다구요 그래서 내장이 소금에 저려지는 거에요 죽는 거에요 자살할때 소금을 많이 먹었다구요 그런데 이 소금이 없으면 우리는 밥을 어떻게 먹어요 그리고 실지로 우리 몸 안에 염분이 없으면 우리는 죽어요

죄도 똑같은 거에요 그 죄는 인간에 영혼을 피패하게 하고 결국에는 그 영혼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그런 아주 더럽고 추악한 것이지만 하느님은 그것을 우리 성도들에 성숙에 쓰신다구요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선용하세요 그게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신자로 하여금 죄와 싸우게 하심으로 해서 신자에 성숙에 유익을 만들어 내시고 은혜를 넘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죄를 잔존하게 하셨어요

로마서 520절 보세요 20 율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 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21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여기서 파레이셀텐이라는 단어는 그 추가로 들어왔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어떤 종류에 율법이 있었다라는 거죠 그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로 오브더 네이쳐 본성에 율법이라는 거에요

로마서 214절 보세요 14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습니다그러나 그들이 본성에 따라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을 실행한다면 비록 율법이 없을지라도 그들 자신이 율법의 구실을 합니다

모든 인간에는 본성에 율법이 있어서 모든 인간은 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요 그런데 모세의 율법이 들어옴으로 해서 본성에 율법만으로는 알지 못했던 죄를 아주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라는 거에요 이제 모세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본성의 율법으로는 다 알지 못했던 죄가 밝혀 졌다라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죄가 들어난 곳에는 하느님에 은혜가 넘쳤다라는 거에요 그 말은 신자가 도저히 자기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죄를 경험하게 될때 주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은혜의 힘에 의해서 그 죄가 죽어가는 것을 봄으로 해서 그 죄 보다 더 강한 주님에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게 되는 그 이치를 설명한 거에요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라는 구절이 있는 거에요 그 말을 좀더 이해하기 쉽게 의역을 하면 죄와에 싸움이 많은 곳에 은혜에 능력이 더욱더 풍성하게 경험된다라고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거에요

구약성경에서 다윗 만큼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또 하느님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을 거에요 그러나 그가 우리야의 아내 밧쎄바와 범죄를 했어요 그리고 다윗은 그때까지 들어가보지 못한 깊은 영혼에 밤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고통스러워하죠 다윗이요 다윗이 고통속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었어요

시편 5111절 보세요 11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 내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을 거두지 마소서12  구원의 기쁨을 나에게 도로 주시고 변치 않는 마음  안에 굳혀 주소서.

구원에 즐거움 까지도 완전히 소멸되어지더라는 거에요 죄를 이렇게 지었더니 그래서 다윗이 처절하게 울부짖으면서 참회를 했어요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행복보다 자기에 마음이 정결해 지고 영혼이 하느님에 은혜로 새롭게 되기를 갈망했죠 왜 죄를 짓고 나니까 이렇게 힘든걸다윗은 밧쎄바를 범함으로해서 하느님에 은혜와 그 구원에 기쁨과 그리고 죄에 고통과 죄를 벗어난 자의 즐거움을 다 배운 거죠 실지로 오관을 갖고 이성을 가지고 그걸 배우는 거에요 그 죄를 통해서 하느님이 얼마든지 말리실 수 있었잖아요 안말리시고 놔두신 거에요 하느님에 자녀에게는 그 죄 조차도 은혜의 통로가 되더라는 것이죠

그러나 그 하느님에 자녀는 반드시 그 죄에 대해서 통회 자복하고 그 죄를 더 이상 내게 다가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그러한 의지의 발동과 하느님에 말씀에 대한 순종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어흐 너무 좋아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성도의 삶 속에 죄를 때때로 허락을 하시는 거에요 그렇게 될때 우리 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던 교만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자기 자신에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느님에 은혜만을 구하게 되죠.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 밖에 없으며 우리는 그분에 은혜만을 간구해야 하는 나약한 피조물임을 알게 되는 거에요

타락한 인간들이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서 내가 우주에 중심이다라고 우기며 하는 행위들 그게 전부 죄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듭난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그러한 죄를 경험함으로 해서 우리 자신은 얼마나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며 우주에 중심은 무슨 중심이야 하느님 앞에서 먼지같은 존재도 아닌게 우리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에 삶 속에 이렇게 때때로 죄가 지배를 하게 하느님께서 놔 두시는 거에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주님을 보고 그분을 영접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은혜의 영향력과 경향성에 지배를 받아서 죄를 죽이고 하느님에 자녀로 지어져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지금부터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을 미혹하고 있는 그 죄들을 죽여 가세요 그래야 우리는 경건한 하느님에 자녀로 쑥쑥 자라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부터요 아셨죠?  지금부터 죽여보자구요 은혜를 다 죽여 버리지 마시고 또 죄를 죽이시란 말이에요 

 

감사합니다. 2019 년 마무리 잘하시고 다가오는 경자년 새해 복 많이 지으시고 받으세요.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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