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가톨릭마당

sub_menu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4-36)

142469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20-11-28

2020년 11월 28일 토요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4-36)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1독서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묵시22,1-7)

주님의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2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그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주님곧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당신 천사를 보내신 것이다.

보라내가 곧 간다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화답송 시편 95(94),1-2.3-5.6-7ㄱㄴㄷ(◎ 1코린 16,22과 묵시 22,20)

◎ 마라나 타오소서주 예수님!

○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감사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세노래하며 그분께 환성 올리세

○ 주님은 위대하신 하느님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신 임금님땅속 깊은 곳도 그분 손안에높은 산봉우리도 그분 것이네바다도 그분 것몸소 만드셨네마른땅도 당신 손수 빚으셨네

○ 어서 와 엎드려 경배드리세우리를 내신 주님 앞에 무릎 꿇으세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로세

 

복음 환호송(루카21,36) ○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복음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 있어라.>(루카21,34-3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제1독서(묵시22,1~7)

 

"주님의 천사가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1~2)

 

묵시록 19장 1절~22장 5절은 대종말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예언 중에서도 예수님의 재림과 어좌 심판 및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이어지는, 예수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이다.

 

그 가운데서도 묵시록 21장 1절~22장 5절은 현 우주와 역사의 종결이요, 영원히 지속될 천국 역사의 시작이기도 한, 대종말 사건의 절정인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묵시21,1~8)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 될 예루살렘의 황홀한 정경(묵시21,9~27), 그리고 새 예루살렘 중심을 관통하는 생명수의 강의 정경(묵시22,1~5)으로 점차 그 범위를 좁혀가면서 모든 성도들이 그토록 대망하는 천국의 공간적 배경을 묘사한다.

 

'주님의 천사가 ~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에서 '~ 보여 주었습니다' 번역된 '에데익센'(edeiksen)은 '지시하다','설명하다','지적하다'라는 뜻을 지닌 '데익뉘오'(deiknyo)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 능동태로서 사도 요한에게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보여준 존재가 묵시록 21장 9절에 언급된 '마지막 일곱 재앙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가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은 이미 묵시록 7장 17절과 묵시록 21장 6절, 22장 17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묵시7,17)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져 주겠다'(묵시21,6)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묵시22,17)

 

묵시록 7장 17절을 보면, 어린양이 창조주 하느님과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분이심을 암시하는 표현이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이다.

그런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데, 인도하시는 최종 목적지가 '생명의 샘'이다.

 

'생명의 샘'으로 번역된 '에피 조에스 페가스 휘다톤; epi zoes pegas hydaton; to living fountains of waters)에서 주목할 것은, '생명'이란 뜻을 지닌 '조에스'(zoes)가 어군상 먼저 등장하여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어에서 단어의 어순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이 경우는 '조에스'(zoes) '휘다톤'(hydaton) 뒤에 두는 것이 더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이것을 서두에 둠으로써 '생명'이란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생명의 샘 관한 언급은 묵시록의 결론부인 21장 6절, 22장1절,17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경우, 이러한 표현은 통상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을 가리켰다(시편36,10; 예레2,13;17,13).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생명의 샘(생명수의 강)이란 결국 하느님의 직접적인 현존과 임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완전한 현존과 임재는 인간의 영적 갈망을 완벽하게 해소하는 것이다.

 

한편, 새 예루살렘의 모티브 에덴 동산의 모티브 및 성전 모티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묵시21,19.20).

 묵시록 21장 16절, 22절 등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 모티브와 관련된다면, 묵시록 22장 1절은 명백히 에덴 동산 모티브와 관련된다. 실제로 에덴 동산에도 생명의 샘의 근원이 있었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 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창세2,10).

 

이와 마찬가지로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사도 요한은 이같은 방식으로 새 예루살렘이 첫 창조, 곧 에덴 동산의 회복이자 완성임을 분명히 한다.

 

본문에서 '~로부터'로 번역된 전치사 '에크'(ek)는 기원이나 출처를 나타내는 소유격 지배 전치사로서, 생명수의 강의 근원이 본질이 같으신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어좌(투 트로누; tu thronu; the throne)임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자신의 환시에서 생명수의 강의 발원 '주님의 집'(성전)으로 언급한다(에제47,1.2).  에덴 동산에서는 강이 동산 꼭대기에서 흐른다면,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에서는 성전에서 발원하고,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를 그 기원으로 한다.

 

새 예루살렘이 에덴 동산과 성전의 궁극적 실재이자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점은, 그 생명수의 강의 기원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힌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새 성경에서는 '나와'가 1절에 번역되어 있고, '흐르고 있었습니다' 2절에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나와 ~흐르고 있었습니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개의 단어가 아니라 '엑포류오메논'(ekporeuomenon) 하나로 1절에 포함되어 있다.

'엑포류오메논'은 본래 '~로부터'라는 뜻을 지닌 접두어 '에크'(ek) '오다', '가다'라는 뜻을 지닌 '포류오마이'(poreuomai)의 합성어로서 주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현재분사로 쓰여 마치 생명수의 강이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발원하여 계속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은 뉘앙스 전달한다.

이같은 생명수의 강은 '성령'이나 '불멸에 대한 약속'이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을 뜻할 수도 있다. 이런 견해들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다. 즉 생명수의 강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견해들은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이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생명수의 강 묵시록 21장 3절 언급된 하느님의 약속을 회화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묵시록 22장 1절에서 '생명수의 강'에 대해 언급한 사도 요한은 이제 2절에서 '생명나무'에 대해 묘사한다.

생명수의 강이 새 예루살렘의 대로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강물이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에 생명수를 공급하며, 하느님 나라에 생명력을 충만케 한다는 본 단락의 전반적인 문맥을 살려준다.

 

한편 에덴 동산의 궁극적인 성취인 새 예루살렘에는 타락한 인간에게 절대 금지되었던 에덴동산에서와는 달리, 결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 금지되지 않는다(창세3,24).오히려 그것은 대로상에 자리하여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울러 새 예루살렘에는 첫 창조 당시 에덴 동산에 있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창세2,9).

 

따라서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죄가 침입하지 못한다. 즉 새 창조로서 새 예루살렘은 단순히 첫 창조때의 에덴 동산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성취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누릴 풍성한 영적 생명은 '열두 번 열매를 맺으며, 다달이 열매를 내놓는다'는 진술로 더욱 명백해진다.

 

본절에서 '맺는'과 '내놓습니다'로 번역된 '포이운'(poiun)과 '아포디둔' (apodidun)은 각각 '만들다','행동하다' 라는 뜻을 지닌 '포이에오'(poieo) '완수하다','이룩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디도미'(apodidomi)의 현재분사로서 생명나무의 열매가 현재 계속해서 열리고 맺히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그리고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두 번' 맺히고, 또는 '열두 가지 열매'(karpous dodeka)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서 누릴 영적 생명의 풍성함과 다양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묵시록 22장 2절은 무엇보다도 에제키엘서 47장 12절과 밀접하게 병행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이 중에서 생명수의 강의 근원에 대해서는 1절에, 그리고 생명나무와 그 열매에 대해서는 2절 상반절에 언급한 사도 요한은, 이제 본문에서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언급으로부터 자신이 본 생명나무 나뭇잎 환시의 의미를 해석한다.

 

여기서 '치료하는'으로 번역된 '테라페이안'(therapeian)은 '치료하다', '봉사하다'라는 뜻을 지닌 '테라퓨오'(therapeuo)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목적을 표시하는 목적격 전치사 '에이스'(eis)와 더불어, 생명나무의 나뭇잎 (타 필라; ta phylla; the leaves)이 민족들을 치료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본문에 언급된 치유의 대상은 '민족들'(톤 에트논; ton ethnon; of the nation)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거주민이 된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킨다(묵시21,24).

즉 '민족들을 치료하는 나뭇잎'은 요엘기 1장 14절, 2장 15절에 의하면, '이방인의 개종'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민족들의 회심에 대한 우주론적이며 보편적인 전망을 가지면서도 묵시록 21장 8절, 27절, 22장 15절과 같은 분명한 제한 장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치료한다는 의미는 어떤 병든 상태를 고쳐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육간의 건강이 계속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 죽음이 다시 발붙이지 못하는 영생의 나라가 될 것임을 보여준다.

 

 

연중 제34주간 토요일-늘 깨어 기도하여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21,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

 

루카 복음 21장 34~36절은 올리브산 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종말의 시기에 준수해야 할 실제적 행동 지침을 제시하신 내용이다.

루카 복음 21장 34절의 '조심하여'에 해당하는 '프로세케테'(prosechete; be careful)의 원형 '프로세코'(prosecho)는 '자신에게 주의하다', '스스로 조심하다'는 뜻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주로 경계의 교훈의 문맥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루카12,1; 17,3).

그리고 이 단어의 뉘앙스는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점검하면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온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다. 그것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인데, 이 세 가지 사항을 조심하지 않으면 마음이 물러지고 둔해지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방탕'으로 번역된 '크라이팔레'(kraipale; dissipaton; surfeiting) '머리가 이리저리 뒤흔들리다'는 뜻으로 라틴어로는 '크라풀라'(crapula)로 번역된다. '크라풀라'는 포도주를 지나치게 마심으로써 일어나는 현기증과 두통을 가리킨다.

그리고 '만취'로 번역된 '메테'(methe; drunkenness) '너무나 많은 술에 만취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방탕'과 '만취'는 성령에 충만된 상태와 대조적으로 세상의 쾌락과 관심에 취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또한 '일상의 근심'으로 번역된 '메림나이스'(merimnais; the anxieties of life)의 원형 '메림나'(merimna)는 어원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이끌리다'는 뜻으로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나뉘어져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찬 상태를 가리킨다.

즉 마음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마음이 물러진 상태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물러지는'으로 번역된 '바레토신'(barethosin; be weighed down; be overcharged)의 원형 '바뤼노'(baryno)는 무거운 것으로 '내리 누르다' 뜻으로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하느님의 뜻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자신의 관심과 쾌락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을 누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루카 복음 21장 34절의 '덫처럼'(원문에는 35절)에서 '덫'으로 번역된 '파기스'(pagis; a snare)는 문자적으로 '함정','올가미'와 같은 뜻이지만, 비유적으로는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위험'을 나타낸다(로마11,9; 시편68,23).

이것은 갑작스럽게 온 심판을 말하는데, 평상시 동물들이 잘 다니는 길에 놓여진 덫이 어느 순간 갑자기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 닥치듯이, 일상의 삶 속에 갑자기 찾아오는 재난, 곧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러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와 의무가 루카 복음 21장 36절에 나온다. 

첫째는 깨어 있는 삶인데, 여기서 '깨어'로 번역된 '아그륍네이테'(agrypneite; watch)의 원형 '아그륍네오'(agrypneo)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로서 잠에 들지 않는 것(전쟁터에서 보초를 서듯)을 말한다. 

둘째는 늘 기도하는 삶인데, 이것은 기도가 삶의 일부가 되어 늘 기도하며 사탄의 유혹과 대적하고, 늘 하느님과 친교하는 것을 말한다.

 

 

 

 


0 1,309 0

추천  0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