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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3일 (화)부활 제4주간 화요일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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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9.15)

140788 김중애 [ji5321] 스크랩 2020-09-15

2020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히브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
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음 요한 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0분 후에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소한 일이나
 바보 같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소한 일에 그토록 신경 쓰고,
바보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쁜 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 때문은 아닐까요?
물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아직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사소한 일에 얽매이고
바보 같은 일을 하고 또 나쁜 일도
서슴지 않는 것입니다.
갑곶성지 안에는 ‘천국의 문’이라는
 봉안당이 있습니다. 이곳에 안치되어
오시는 고인은 모두 자그마한 유골함에
담겨 오십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으로 높은 자리에 계셨던 분도,
이곳에 안치되시려면 봉안되실 자리에
맞는 유골함에 담길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뒤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는데도, 사소하고
바보 같으며 무엇보다 나쁜 일까지도
감수하면서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영원한 생명은
지금의 삶 안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할 것으로, 지금이라는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가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최대한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설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의 문제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 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지요. 인간적으로 볼 때,
성모님의 고통은 엄청난 크기가 분명합니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이겨내기 힘든 무게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고통을 거뜬히 이겨내시고,
예수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십니다. 
 이를 단순히 성모님을 제자에게 맡기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이기신
어머니이기에, 우리의 고통 역시
이길 수 있도록 성모님께서 함께
해달라는 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고통을 이기실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말씀처럼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9)의 주인공이
되실 수 있었습니다.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기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과 성모님이
계시기에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이 인생에서 내가
제일 먼저 배웠어야
하는 것은 ‘나’의 올바른
사용법이었지만,
지금까지 그걸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모르니 인생은 예측불허,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김연수)

하느님은 남성? 여성?

언젠가 어떤 청년으로부터

성경은 너무나 남성 중심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꼭 남성이어야 하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표현 때문에

남성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그러나 성경 안에서 하느님은 반드시

남성으로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느님은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느님은 히브리 원어로 ‘엘로힘’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에 2,500회 이상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엘로힘은 ‘엘’이라는 남성 신과

‘엘로아’라는 여성 신이 합쳐진

복수형입니다. 이는 하느님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표현하는 ‘엘 샤다이’ 역시

 ‘젖을 먹이는 하느님’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이는 어머니의 여성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밖에도 성경

안에는 하느님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드러납니다. 즉, 하느님은

성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편협된 생각이 하느님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좀 더

하느님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거부하는 이유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전교구 솔뫼성지의 성모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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