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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미사 강론]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새로운 대주교들을 위한 팔리움 축복과 거룩한 미사[2020년 6월 29일 월요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139266 정진영 [jjwriter] 스크랩 2020-07-04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0.index.html

                            https://www.vaticannews.va/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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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2020629일 월요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사도행전 12,1-11

                         화답송 : 시편 34(33),2-3.4-5.6-7.8-9(◎ 5ㄴ 참조)

                          제2독서 : 티모테오 2 4,6-8.17-18

 

 

 

                                복음 : 마태오 복음 16,13-19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1760&gomonth=2020-06-29&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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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새로운 대주교들을 위한


봉헌된 팔리움 축복과 거룩한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베드로성당

 


2020 6 29일 월요일


 


이 도시의 두 사도들의 축일에 나는 여러분과 두 개의 키워드를 나누고 싶습니다. , 일치와 예언.


 


일치. 우리는 두 명의 매우 다른 사람을 함께 기념합니다. 베드로, 자신의 삶을 배와 그물 속에서 보낸 어부. 그리고 바오로, 회당에서 가르쳤던 학식 있는 바리사이. 그들이 전도로 나아갈 때 베드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바오로는 이교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로가 교차되었을 때 바오로가 그의 서간들 중에 하나에서 인정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듯이 그들은 열띤 논쟁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2, 11 참조). 요컨대 그들은 매우 다른 두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주 싸움이 있지만 한결같은 사랑이 있는 굳게 단결된 가족들 안에서 그렇듯이 그들은 서로를 형제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바오로를 결합시켰던 친밀함은 타고난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좋아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모두 비슷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일치시키시는 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다름 안에서 우리를 일치시키십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우리를 이 일치의 원천으로 데려다 줍니다. 그것은 새로 태어난 교회가 어떻게 위기의 순간을 겪고 있었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헤로데는 매우 화가 났고 난폭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가 붙잡혔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의 목숨을 염려하면서 공동체는 지도자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비극적인 순간에 아무도 달아나지 않았고 아무도 자기만 살려고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도 다른 이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하나가 되어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에서 그들은 힘을 이끌어 냈고 기도에서 어떤 위협보다 더 강력한 일치가 나왔습니다. 그 구절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사도행전 12, 5). 일치는 기도의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희망을 향해 열면서 어려운 때에 거리를 좁히면서 우리를 단결시키면서 성령께서 개입하시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다른 것에 주목합시다. 그 극적인 순간에 아무도 헤로데의 악과 그의 박해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헤로데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사회에 대해서 옳지 않은 모든 일들에 대해서 불평하면서 그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할 가치가 없고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불평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내가 성령강림대축일에 말했던 것처럼 불평은 우리를 성령님으로부터 떨어뜨려 가두어 버리는 두 번째 문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첫째 자기애(narcissism), 두째 낙심, 셋째 비관주의. 자기애는 당신을 끊임없이 거울 속에 있는 당신 자신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낙심은 불평으로 이끌고 비관주의는 모든 것이 어둡고 절망적이라는 생각으로 이끕니다. 이 세 가지 자세가 성령님께 문을 닫습니다.. 저 그리스도인들은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지 않고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좀더 조심을 했더라면 우리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거야”. 아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베드로가 비판을 받을 이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 대해서 뒤에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치를, 교회 안에서 우리의 일치를 기도로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우리가 더 기도하고 덜 불평한다면, 우리가 더 조용한 혀를 갖고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감옥에 있던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처럼 지금 너무나 많은 닫혀진 문들이 열릴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묶인 쇠사슬들이 부서질 것입니다. 문에서 베드로를 보고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베드로를 보았다는 기쁨으로 놀랐던 하녀처럼 우리는 놀랄 것입니다(사도행전 12,10-17 참조).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시다. 바오로 성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이를 위해서 특별히 통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 2,1-3 참조). “그러나 이 통치자는…” 그리고 많은 형용사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곳은 통치하는 사람들에게 거스르는 방향으로 우리가 들은 형용사들을 언급할 장소도 아니고 시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도록 합시다. 통치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과업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단지 말하고 비난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의 면전에 문을 쾅 닫아 버리는 사람들, 용서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를 기대하십니다. 오로지 기도가 쇠사슬을 풀어 줍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했던 것처럼. 오로지 기도가 일치의 길을 닦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추기경단의 단장과 대주교들에게 수여되는 팔리움을 축복합니다. 팔리움은 양들과 목자 사이의 일치, 예수님처럼 결코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그 양을 자신의 어깨에 메고 가는 목자 사이의 일치의 표징입니다. 오늘 또한 좋은 전통을 따라 우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청과 일치를 이룹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형제였습니다. 그리고 가능할 때는 언제나 우리는 우리 각자의 축일들에 서로 형제의 방문을 합니다. 우리는 오늘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여행이 어려워서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베드로의 유해들을 공경하러 갔을 때 내 마음 안에서 나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 바르톨로메오를 느꼈습니다. 그분들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두 번째 말은 예언입니다. 일치와 예언. 사도들은 예수님께 도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물으심을 들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복음 16,15 참조). 그 순간에 그는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관심이 없으시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베드로 자신의  결심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오로의 인생은 예수님으로부터의 비슷한 도전 후에 변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9,4). 주님께서 바오로를 속속들이 뒤흔드셨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를 그저 땅에 엎어지게 하시는 것 이상으로 그분께서는 자신이 존경 받을 만큼 믿음이 깊다는 바오로의 환상을 산산조각 내셨습니다. 결국 교만한 사울은 작은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 바오로로 변했습니다. 이 도전들과 역전들은 예언에 따른 것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마태오 복음 16,18) 그리고 바오로에게.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행전 9,15). 우리가 모든 것을 계속 조용히 두고 통제 안에 두려고 걱정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도전 받도록 놓아 두면 언제나 예언이 일어납니다. 예언은 나의 생각에서, 나의 닫혀 있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복음이 확실한 것들을 뒤집어 엎을 때 예언이 일어납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놀라우심에 열려 있는 누군가만이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그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미래를 보는 예언자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복음 16,16)라고 선포한 첫 번째 사람입니다. 바오로, 그는 그의 다가온 죽음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티모테오 2 4,8)


 


오늘날 우리는 예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이 필요합니다. 불가능을 약속하는 말재주 좋은 사람이 아니라 복음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증언이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은 기적적인 쇼가 아닙니다. 나는 누군가가 우리는 예언적인 교회가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예언적인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기적을 보여 주는 삶들이 필요합니다. 강제성이 아니라 솔직함. 쓸데 없는 말이 아니라 기도. 연설이 아니라 봉사. 당신은 예언적인 교회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봉사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하십시오. 이론이 아니라 증언.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저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편해지는 이 세상의 인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과 악마와 편해 지는 것이 모든 사람들과 편해 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예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가올 세상의 기쁨이 필요합니다. 마치 그것들이 성사들인 것처럼 그것 자체의 자족적인 효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더 나은 사목 계획이 아닙니다. 효율적인 사목 계획들,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내어 놓는 사목자들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것이 베드로와 바오로가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로서 예수님을 선포한 방법입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에서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의 주님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처럼 죽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히기를 청했습니다. 바오로는 목이 베이기 전에 오로지 그의 목숨을 내어 놓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가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기를 원한다고 썼습니다(티모테오 2 4,6). 그것이 예언입니다.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예언, 역사를 바꾸는 예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언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우리에게도 비슷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마지막 책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실하신 증언을 약속하십니다. “흰 돌(…) 그 돌에는 (…)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요한묵시록 2,17). 주님께서는 시몬을 베드로로 변화시키셨던 바로 그대로 그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인류를 건설하는 살아 있는 돌들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일치를 파괴하고 예언을 질식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시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 되고 싶으냐 너는 지상에서 내 하늘 나라의 예언자가 되고 싶으나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 도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릴 용기를 발견하십시오. “, 제가 하겠습니다!”


(최종 번역 날짜와 시간 2020. 7. 7. 08:15)



    강론영어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20/documents/papa-francesco_20200629_omelia-pallio.html

강론 미사동영상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events/event.dir.html/content/vaticanevents/en/2020/6/29/pietroepaolo.html


 

 

 

 

 

 


 


<소리로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심쿵 미사 강론>

1. 마리아 사랑넷 https://m.mariasarang.net/bbs/bbs.asp?index=bbs_sermon_pope (->신앙생활->교황님 미사 강론)

2. 팟빵 http://www.podbbang.com/ch/1771273(->교황님의 심쿵 미사 강론)

 

 


        * 상기 강론의 음성 파일의 14 45초 부분의 신학이 아니라 증언이 필요합니다

        ‘이론이 아니라 증언이 필요합니다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들으실 때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늘 부족한 저를 참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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