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홍) 2024년 4월 25일 (목)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나눔마당

sub_menu

따뜻한이야기
복음을 사는 순교자 ㅡ 박영봉신부님의 복음묵상글

97952 강헌모 [kanghmo7] 스크랩 2020-09-20

 

 
 복음을 사는 순교자 *^^* 박영봉신부님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대축일 복음묵상글(879번) 
 

 

- *♥* 복음을 사는 순교자 *^^* *♥* -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우리의 추석 한가위는 만남의 축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명절에는 가능하면 만나지 말라고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명절 연휴 동안 면제해주던 고속도로 통행료도 다 받는다고 합니다. 울릉도는 고속도로가 없으니까 이래도 저래도 관계가 없지만 육지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고속도로를 이용하실 분들에게는 좀 기분 나쁜 결정일 것 같습니다. 그래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영향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다면 감수해야할 불편이겠죠. 형제 자매님, 오늘 한국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을 지냅니다. 이 땅에서 돌아가신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그런데 순교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자기가 믿는 신이나 종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누구나 자기 목숨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기에 순교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성인들 중에는 12살의 아이도 있고 77살 할머니도 계십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벼슬을 하던 양반도 있고 한글도 모르는 무식한 상민도 있습니다. 대단한 부자도 있고 아주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신분이나 재산 혹은 나이나 성별 차이에 관계없이 그분들은 자신의 전 생애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가치를 찾은 분들이기에 참으로 행복한 분들입니다. 형제 자매님, 순교자들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뛰어넘어 자신의 온 생애와 목숨을 걸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분들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오늘 복음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교리지식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손길을 체험했기 때문에 깨달은 것입니다.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은 철저히 유교의 태두리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양반과 상민의 신분 차는 너무나 컸고, 남녀의 차별이 심해서 서로 어울릴 수도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그리스도교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정말 살맛나는 세상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함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고 참된 행복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그 시대의 보편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반항아였습니다. 절대 왕권을 행사하던 왕의 입장에서 본다면 용서할 수 없는 역적의 무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무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잘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형제 자매님, 저는 신학교에서 신학생들과 생활할 때 신학생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했었습니다. 며칠이 지나면 신학생들은 불편하다고 말을 놓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존댓말을 썼습니다. 신학생들은 점점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 저는 “여러분이 제게 반말을 쓰면 나도 반말을 쓰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제게 반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사이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동등한 입장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셨는데 서로 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동등한 입장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을 해줍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신학생들도 아주 편안해 했습니다. 잠시 본당에서 사목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년들이나 교리교사들에게도 존댓말을 썼습니다. 서로 동등한 조건으로 잘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는 것이 참 편했습니다. 형제 자매님,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와 동등한 입장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요약하시며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동등한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순교성인들께서는 그런 복음의 가치를 깨달으신 분들이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그 삶이 주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맛보았고 나아가서 그 삶의 결신인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미리 맛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순교성인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형제 자매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져야할 십자가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낮추고 내 욕심을 버리고 내 판단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할 때 세상 사람들은 바보라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보면 하느님의 선물인 참 평화가 어떤 것인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날 우리는 신앙생활하기에 여러 가지 여건이 나쁘다고 불평합니다. 경제적인 문제에서부터 직장생활의 어려움, 가정생활의 문제 자녀교육 등등과 요즘은 코로나19 바이러스까지 신앙생활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 순교자들이 복음을 살던 여건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재산을 모두 버리고 산중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움막을 짓고 살면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배불리 먹을 수도 있고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호화롭고 배부른 생활보다, 춥고 배고프더라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우촌에 신부님이 오신다는 전갈이 오면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이틀이 꼬박 걸리는 산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매일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너무 좋은 환경에서 살다보니까 신앙이 나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액세서리로 전락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나를 위한 액세서리가 아니라 내 삶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은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오늘의 순교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고통이 아니라 참된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새롭게 맞이할 한 주간 동안 우리 모두 순교자의 마음으로 살아봅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랑하기 위해서 오는 어려움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나를 낮추고 동등한 입장이 되어서 사랑합시다. 그러면 순교자들이 누렸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울릉도 도동성당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1,030 1

추천  0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