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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3일 (화)부활 제4주간 화요일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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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복음 이야기

137079 강만연 [fisherpeter] 스크랩 2020-03-27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첫 기적을 행하실 때도 그랬고 오늘도 복음에서 보면 때를 상당히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마산 교구장님의 신동아 인터뷰 기사를 언급하면서 교구장님의 어머니 글에서 감명 깊은 내용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에서도 알 수가 있듯이 하느님의 때와 사람의 때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근데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하느님의 시간에 맞는 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그때가 가장 시의적절한 때라는 사실은 분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완벽하신 분이 원하시는 시간이라서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을 한번 보시면 참 아이러니합니다. 때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축제입니다. 근데 이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습은 축제를 지내러 가시긴 하지만 남몰래 가십니다.

 

이때는 이미 민심이 흉흉한 그런 상태입니다. 왜 그런 상태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 당시 유대 사회를 향해 정의를 내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예수님 당시 시대에도 그렇지만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개혁하기 위해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힘든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사회 조직이나 정치 조직, 심지어 종교조직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무서워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만약 하느님의 권능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것 같았으면 피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얼마든지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실 수가 있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의 시간이 올 때까지 예수님의 길을 가실 때 장애물이 있으면 그걸 넘어가셨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피하셨다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를 보면 악인과 의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롭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눈에 가시입니다. 독서에서도 나오지만 악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악으로 인해 그들의 눈이 멀어졌다고 말을 합니다.

 

결국 그들의 눈은 자신들의 악으로 인해 의인들 속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 지혜서 14절을 우리는 유심히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의인들이 악인들의 생각을 알고 자신들을 질책을 하니 악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의인들이 자기들에게는 하나의 짐처럼 느껴진다는 말씀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중에 어떤 결론이 날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22절 이하에 나옵니다. 흠 없는 영혼들인 의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상급을 받을지 모릅니다. 바로 자신들의 악이 자신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 주민들은 당시 최고 의원들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고 뭔가를 알려주시는 상황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근데 이 사람들의 논리는 이상합니다.

 

진정 메시아는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인데 자기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의 논리로 봤을 때는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라는 논리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의 논리를 인정하시기는 하시지만 실제로는 너희들이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장난 같지만 말장난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메시아가 올 장소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눈으로 인식하는 장소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소는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인데 그들은 하느님을 보지 못했고 또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 너희들이 안다고는 하지만 그건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말씀으로 이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왜 그럴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생략이 되어 있지만 17절에 나옵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이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결국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이유가 오늘 독서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그들이 하는 악행 때문입니다. 그 악행이 무엇인지는 오늘 독서의 내용을 뒤집어서 봐야 그 말씀이 무엇인지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를 바탕으로 해서 묵상을 하게 되면 그렇습니다. 간단하게 보면 율법을 어기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지 않아서 그들이 악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 오늘 독서의 내용을 꼼꼼히 읽으면 그렇습니다.

 

결국 제가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복음 말미에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지만 할 수가 없었던 게 요한복음사가는 그 이유가 예수님의 때가 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그분의 때는 언제가 될까요 바로 십자가상에서 최후를 맞이하시는 때입니다.

 

그때 실제로 예수님이 하느님이셨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 상황을 묵상하니 더더욱 울컥합니다. 왜 그럴까요 마지막에 숨을 거두시고 당시 사형 집행관이었고 이방인이었던 백인대장의 고백을 떠올리면 울컥합니다. 바로 이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는 고백 말입니다.

 

결국 자기 땅에 오신 메시야를 정작 자기 백성은 알아보지 못하고 이방인의 입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사실이 슬퍼지 않습니까 그것도 살아계셨을 때 알아본 게 아니고 피투성이가 되어 마지막에 그것도 병사들이 다시 창으로 찔러 피를 흘리게 하시는 그런 극도의 고통 끝에 운명하신 상황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고 하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걸어가셔야 하고 또 그 길에서 이 순간은 당신이 원하는 그 시간이 아니셨지만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시간이라 그 시간까지 당신이 가야 하시는 그 길만 향해 가시기 위해서 그때를 기다리신 것에서도 하나 묵상할 게 바로 죽음의 때도 순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무엇을 한번 진지하게 묵상해봐야 할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진정 제대로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을까 말입니다. 바로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오늘 제1독서에 끝에 나오는 말씀처럼 흠 없는 영혼만이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답이 나왔습니다.

 

바로 이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에 합당한 시간인 만큼 그때 당시 자신들의 악행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돌아가시게 한 것처럼 지금의 자신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는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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