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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마태18:21-22)

140724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20-09-13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마태복음 18:21-22)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490번?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의 죄를 얼마나 용서해 줘야 하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헵토 메쿤투케스 헵타’.(ἑβδομηκοντάκις ἑπτά) 이 말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말이 아니라, 일흔, 70이라는 부사예요, 그건요. 그리고 칠(7)이라는 명사를 쭉 붙여 놓은 거예요. ‘칠십으로의 칠’이라는 거죠굳이 번역을 하자면, 칠십이라는 성격의 7로, ‘아피미(Aphiemi)’, 오늘 본문에 그 단어랑 똑 같아요. ‘용서해, 자유롭게 해줘!’ 이런 말이에요. ‘쉬게 해 줘!’

 

칠(7)이라는 건 안식의 숫자죠? 창세기의 칠, 그 숫자 이야기 하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 그 칠을 어떻게 지켜내고 있었어요?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죠? 그 칠을 율법으로 지켜내고 있었다니깐요. 십(10)으로, 율법으로 칠을 알아야 되는데, 이 칠이라는 걸 십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죠? 거꾸로 이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통하여 안식에 이르겠다는 아담들의 욕망을 나타내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칠로 안식이 됩니까? 칠이면 됩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그 행간을 보면, 마침 베드로가 일곱 번이요?라고 하니까 주님을 그걸 받아서, 당신의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그 안식을, 그 칠을, 율법으로 지키고 있잖아? 그 칠은 안 된다’는 거예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어야 된다고 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들은 구약에 능통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았다니깐요. 칠십의 칠 이라는 게, 칠은 이레니까. 하루, 이틀, 닷세, 엿세, 이레? 칠십 이레라는 말을 하신 거예요. 칠십의 칠.

 

성경에 나오는 숫자. 창세기에 칠(7)이라는 언약의 수, 안식의 수가 나오죠? 그런데 이거를 하느님이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어야 되는데, 이건(7) 우리가 몰라요 뭔지. 그 안식이 뭔지. 그래서 출애굽기에서 십(10), 십계명, 율법을 주시는데, 이것을 갖다가 다섯 개, 다섯 개로 설명을 해주고, 주님은 이걸 두(2)개로 또 축약을 해주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산상수훈에서는 이걸 셋(3)과 넷(4)으로 설명을 해주죠? 살인, 간음, 거짓증거(3), 그리고 그걸 완성하는 게 사랑! 넷이야(4), 이렇게 설명을 해준다 말이에요. 그래서 요게 되면 그게 칠(7)이다라고 설명을 해주신다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안 사람들이 12이라는 거죠, 그들이 아들이란 말이에요. 아들. 열둘(12)은 아들의 숫자니까, ‘벤 야민,’ 이게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이라는 거고, 열둘의 첫 번째는 누구예요? 르우벤! ‘르우’가 ‘라’에서 온 거니까, ‘아들을 봐라. 내가 이제 아들을 설명해 준다.’ 그래놓고 열둘(12), 마지막에 벤 야민, 이것이 아들이야.

 

그런데 그 아들이라는 단어가요, 이 단어가 ‘송아지’라는 뜻도 있어요. 황소의 새끼, 이런 말.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황소의 새끼, 이 송아지, ‘벤’, 이걸 잡았다는 건 무슨 말이냐 하면, 하느님이 그의 육(肉)을 잡아서 죽여 버리고, 예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해요. 황소의, 진짜 그 소,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그가 죽고 탕자가 살아나는 거거든요? 그거는 그 안에서, 그 탕자, 둘째를 죽여 버리고, 아들로 살려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벤 야민, 오른 손의 아들, 아들의 완성, 이게 열둘(12)이란 말이에요. 열둘! 그렇게 아들이 되면, 이들은 이 십(10)으로 이 칠(7), 안식을 안 자가 되는 거죠? 그래서 십(10)으로 칠(7)을 안 자가 되면 (10×7), 이게 칠십(70)이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열두지파가 나와서, 거기에서 70원로가 서게 되는 거고, 열두(12) 사도가 나중에 70으로, 70명이 아녜요. 거기 보면, 원문에 보면 그들을 70으로 보낸다, 그래요. 둘 씩, 짝으로. 70으로 보낸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70이라는 건 이 십(10)으로 칠(7)이 되는 거지, 이 칠(7), 안식을, 이 열(10)로, 이걸로 도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러는 거예요. 용서(容恕)라는 거, 안식이라는 건, 칠(7)입니까? 그가 알고 있는 건 율법(10)으로 칠에 당도하는 안식일을 열심히 지키는 그것 밖에 없단 말이에요. 베드로가 알고 있는 건.

 

그때 주님이 그 이야기를 받아서, 우리 교회(聖徒)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지, 그 칠(7)이 아니라, 칠십(70)의 칠(7)이지, 그래서 부사(70), 명사(78), 이렇게 쓴단 말입니다. 그러면 칠십의 칠! 칠십 이레가 뭔지 알면, 주님이 저 용서를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알게 되겠죠?

 

다니엘서 9장에 보면 칠십 주간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니엘서는, 유다가 BC586년에 망하죠?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하필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이 바벨이에요., 바벨론의 바벨. 거긴 탑이라는 말이 없어요. 그냥 바벨이에요. 바벨론, 바벨 같은 단어입니다. 그 바벨론에게 유다가 망하고, 다니엘서가 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 기록된 거죠? 거기는, 이 세상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우리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의 왕들은, 느브갓네살이 다니엘한테 뭐라고 그래요? “내가 무슨 꿈을 꾸었다. 그런데 생각이 안 나, 너,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맞추고,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도 좀 해줘”. 그래요. 그런 황당한 요구가 어디 있어요? 그 말은, 꿈이라는 게,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면, 꿈이라고 그러죠?

그래서, 성경이 꿈, 환상, 그러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유한한 세상,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해요. 그걸 꿈이라고 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환상을 본다, 그러죠? 그게 뭔지를 안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걸 본다는 뜻이 아니라.

 

요엘서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이 꿈 같은 이 세상을 사는데, 이 세상 왕들, 모든 아담들 이야기하는 가예요. 그 왕들은, 그 꿈이 무언지도 모르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람이, 너는 지금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고, 그건 하느님이 이런 이유로 준거야 라고 설명을 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라에 유다가 잡혀와 있으니, 얼마나 속이 터지냐고. 답답한 거죠.

 

자, 바벨, 그 바벨이라는 건 ‘바랄’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건데, ‘섞다’라는 뜻이에요. 섞는 것은 항상, 그러니까 누룩이 어디에 섞이면 항상 술이 나오죠? 술, 그러면 성경에서 섞인 것이에요. 섞여서 창조된, 창작된 어떤 것, 인간 세상의 어떤 것. 섞으면 다 율법이 되는 거예요.

하느님이 이런 걸로 줬는데, 인간이 자기의 마음을 섞어 버리면, 인간의 소위 양심이라는 걸 섞어버리면, 그거 술이 된다니깐요. 인간들을 미혹하여 홀려 버리는 술! 섞은 것! 그걸 바벨이라 그래요. 그래서 거기에서 언어가 섞이는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상징적인 거죠. 그러한 곳에, 그렇게 섞이면, 거기가 심판이에요.

그곳에 하느님의 백성들이 들어갑니다. 들어가 가지고, 거기에서, 그 섞인 자들과 방불하게 살다가, 어떤 은혜에 의해 이제, 그들만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그 안에서 사는 그 기간이 70주간이예요. 그거는 이 역사 전체를 가리키는 겁니다. 다니엘서 9장에 보면. 그러니까 이 역사 전체가 우리가 포로로 사는 기간이에요. 여기가.

 

거기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주어져요. 칠십 주간! 그 때가 되면 너희들이 풀려 날거야, 그 유다가 BC 516년에 완전히 풀려나죠? 조금씩, 조금씩 잡혀가다가,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서, 나중에 계산해 보면 70년이에요. 그래서 70년 포로생활, 그러는 거죠.

하느님은 유다가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서, 그 땅을 쉬게 만들기 위해, 70년의 포로생활을 그들에게 허락했다고 그래요. 성경은. 그러니까 쉬어야 되는데, 너희들은 뭔가에 쫓겨서 쉬지 않고, 안식하지 않고, 열심히 달려 버리면, 하느님은 그걸 심판하신다, 그래요.

 

그래서 70년을, 그 땅을 쉬게 하세요. 당신 백성들의 땅을. 그런데 안식년은 7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죠? 그러니까 70×7. 70주간이 거기서 나온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70번의 안식년을 너희들이 어겼다. 그러니까 70년 동안을 내가 이 땅을 아예 쉬게 만들어버리겠다. 그러니까 매년이 안식년이에요. 거기는 그 포로생활 전체가, 거기에서 그게 뭔지를 알면, 그들은 이 바벨론에서, 바벨에서, 안식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뭔지 알면. 왜? 그게 안식의 기간이거든요. 70이라는 것 자체가.

 

안식이라는 건, 너희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너희에게 찾아오는 게 아니라, 내가 강제로 너희에게, 너희 땅을 혼돈과 공허로 만들어, 텅 비게 만들어서, 그 땅을 부정해 버림으로 너희의 안식이 오히려 완성이 되는거다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너희에게 허락한 시간이 바로, 70주간이라는 거예요. 칠십으로의 그 칠이다.

율법이 아닌 은혜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그 안식의 희년이 오는 거예요. 그 희년은 50일 해서, 오순절, 그 날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예요. 육신으로서의 역사가 끝나는 거예요. 그게 70주간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칠(7)로 용서할까요?’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로 용서를 하라’라는 게 무슨 말이겠어요? 인생은 율법으로 용서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용서가 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에요. 이 모든 역사가 사실은, ‘용서의 역사’라는 거예요. 용서하시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역사인데, 그걸 아는 자는 나올 것이고, 모르는 자는 그 바벨에 가서 죽는다, 그래요. 그 용서를 우리가 알아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바벨, 지긋지긋한 야차들의 세상에서, 안식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이들이 있다니깐요. 누가 뭐라고 그러던 말던.

 

그래서 그 바벨이라는 단어가 ‘섞다’라는 뜻과 함께, ‘기름붓다’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어요. 그 바벨, 그 섞은 것 안에서, 하느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에게 기름이 부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벨이 뭐 나빠요? 성도들에게는 거기도 천국이라니깐요. 거기서 기름 받으면 되는 거예요. 진리의 말씀을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용서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심판 때에 왕 앞에서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기다려 주세요. 내가 갚을 게요.’라고 나선 거예요. 나는 7로 할 거예요, 끝까지 그런 거예요. 그러면 너는 용서를 모르는 거야!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70이레에 쏟아 부어진 그 용서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거예요. 성경에 그런 말이 나오죠? ‘하느님은 모든 자가 구원 받길 원한다.’ 그게 그런 말이에요. 하느님은 이 역사를 그 용서를 위해 만드셨다.

당연히 모든 이가 구원 받길 원하는데, 하느님의 은혜가 임(臨)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 못 받아, 그걸 설명해 주는 거예요. 모든 자가 구원 받길 원한다, 그러니까 뭐 하느님의 보편 구원론을 이야기하셨다고 이야기 하는데, 천만의 말씀. 성경은 그냥 그렇게 몇 구절만 뽑아 가지고, 자기 신학을 만드는데 사용하면 안 돼요. 사람이 만들어낸, 창작해 낸 엉터리 신학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자 그래서 그 임금이, 그 70주간을 이해하지 못한, 그 종에게 빚 탕감을 선언해 주었음에도, 그것이 뭔지 모르고, 다른 이에게 빚 탕감의 복된 소식을 전해 주지 못하고, 그를 오히려 목 졸라 감옥에 가두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다고 해서, 다 진리가 됐다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바오로가 그런 말을 하죠. ‘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고 혹시 버림을 받는 자가 될까 한다’라는 이런 말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오로가 진리를 알고 나서, 너희들이 다 듣는다고 해서, 그 듣는 것이 너희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런 말이에요. 아, 실제로 그렇다니까요. 사람은요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확신으로 막 말할 때는, 그 확신에 자기가 넘어갑니다. 내가 그걸 확신하고 있는 줄 착각해요. 자기가 그 얘기를 막 할 때는 그런대요. 내가 그 이야기를 하지 않고 멈추잖아요? 그게 자기의 마음이 되지 않은 자들은 그 때부터 불안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죽기 전에, 하느님 혹시 나 이렇게 써 먹기만 하고 지옥 보내는 것 아녜요? 이런 의심에 흔들렸다는 것이 그런 연유에서 그런 거예요. 그 단순히 우리가 이걸 듣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 받았다라고 착각하면 안 돼요. 그것으로 나를 용서했는가? 그리고 그 용서를 남들에게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자꾸 자기를 묵상하고, 상고해 봐야 해요, 나를!

 

그렇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 그를 용서해 주지 못한 그 자는, 바벨에서, 그저 바벨이라는 섞은 재료로, 열심히 탑을 쌓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거예요. 그것을 하느님이 용서라는 것을 주었는데, 그것을 진리로 읽어 내지 못한 사람의 모형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처지의 동료를 자유롭게 풀어주지는 못할망정, 감옥에다 처넣는 자가 된 거죠.

 

바오로는 이 땅에서 그 바벨을 통하여, 다른 바벨, 기름 부음이라 그랬어요? 거기에 당도해야 하는 성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로마서 15:25-27) 25 그러나 지금은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금을 전하러 갑니다. 26 그것은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같은 교우로서 정을 나누려고 기쁜 마음으로 보낸 것입니다. 27 그들은 이렇게 기쁜 마음으로 보냈지만 그들에게는 또한 그렇게 할 의무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의 정신적인 축복을 나누어 가졌으니 이제는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냥 얼핏 보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사람들이 신령한 것을 받았으니까, 그들이 어려울 때, 육신에게 필요한 구제 헌금, 돈을 보내는 게 마땅한 것 아니냐? 이런 말로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로 헌금을 착취하는데, 자주 쓰는데, 그렇게 보이죠? 여기에 무슨 구제 헌금, 돈이라는 단어도 없고, 무슨 동정했다 이런 말도 없어요. 그냥 ‘교제했다’라는 말이에요. ‘코이노니아’란 단어예요.

 

그리고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이 ‘페네스(penes)’가 아니고, ‘프토코스(ptocos)’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이죠. 거기에 있는 ‘프토코스’,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절대적 가난! 그들에게 이방적인 어떤 것들이 가서, 오히려 예루살렘 밖의 어떤 것들이 가서, 그들을 섬기는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 일을 위해 내가 가겠다.’라는 그런 말이에요. 이것은요. 헌금 들고 찾아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면서 27절에서 섬김이 어떠한 방식의 섬김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요. 이걸 원문으로 보면요, ‘빚진 자들은 이방적인 것 안에서, 어차피 우리는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로 해석되지 않으면, 그걸 이방적인 것이라, ‘에뜨노스’가 여기선 중성으로 쓰인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방인이라 해석하면 안 된다니깐요. 그러니까 중성으로 쓰이면, 그건 이방적인 것이라고 해석해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방적인 것 안에서, ‘프뉴마, 신령한 것’으로 교제를 하는 자들이란 거예요. 우리는 그 아랫것들 갖고, 내 말 갖고, 성경을 가지고, 그 예수를 이야기 하면서, 그 안에서 그 신령한 것으로 전달해 주는 자들이란 거예요.

 

그게 ‘빚진 자들의 마땅한’이란 단어도 ‘빚갚다’라는 뜻이에요. ‘마땅하다, 당연하다’란 뜻이 아니라니깐요. 빚진 자들은 그렇게 이방적인 것 안에서, 영적인 것들로, 신령한 것들로, 교제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 그 육신적인 것 안에서 진리로 전해주는 그 행위를 하는 그것이, ‘빚 갚는 거야’라는 말이에요. 이 말이요.

 

그러니까 당연히 여기 안에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 진리를 설명해 주면 그걸로 빚 갚는 거라니깐요. 그들이 용서받은 자요, 용서하는 자란 말이에요.

주님의 기도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가 ‘내 안에서 그 빚이 탕감되게 해 주세요. 용서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나도 그렇게 되면 나도, 나를 용서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런 말이에요.

 

뭐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뭐 어떤 사람으로 살았던, 너무 자부심 갖지도 말고, 거기에 너무 묶여 있지도 마세요. 그건 교만한 것 보다 더 나쁜 거라니깐요. 성도의 목적지가, ‘아, 나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라고 했더니, 그냥 주구장창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거기에 머물러 있어 그냥. 아니라니깐요! 그래요, 내가 죄인이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으로 나를 의인 만들어 주었다까지 가야지, 그냥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그러구 앉아 있으면, 그래 너 죄인이야. 그럴 거예요, 하느님이. (웃음) 누가 뭐래?

 

아니 그래서 하느님이 나에게 그 은혜, 그 사랑을 퍼부어 주셔서, 내가 이렇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까지 가는 거지, 내가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하고 끝! 그래 너는 죄인이니까 지옥가라 그러실 거 아녜요.(웃음) 하느님이. 자 그게 ‘오페일레테스’, 빚을 갚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이고, 진정한 교제, ‘코이노니아’이며, 그것이야 말로 ‘성도의 사랑’인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렇게, 우리가 구역,반 같은 것 나누어 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바로 그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하는 그런 것들, 이건 정말 바람직한 거예요. 그러니 자주 모여서, 서로서로 이렇게 빚진 자로서 그 사랑을 나누시면 됩니다. 그냥 교회 온 사람들 나가는 뒷구멍 막는다고 어떻게 조직을 만들어서, 씨줄, 날줄로 엮어서 관리를 해야 돼 라는 의미에서의 구역 이런 것은, 하나도 필요 없어요. 그걸 관리해서 뭐할 거예요. 아닌 사람들은 빨리빨리 나가야지 뒷문으로. 그러니까 그 진리에 연합이 되는 그런 이들끼리 모여서, 그 사랑의 나눔을 하시면 됩니다. 따른 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주인의 것으로 다른 이들의 빚을 막 탕감해 주는 그 불의한 청지기를, ‘어 너 지혜 있다’그러는 거예요. 그게 지혜야. 주님의 것!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걸로 자꾸 이렇게 용서해 줘, 탕감해 주는 거예요, 빚을. 그러니까 하느님이 지혜 있어 그러신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도 그 일 하면 되요. 많이 용서하며 사십시오. 많이 탕감해주며 사세요. 그걸 하느님을 빚쟁이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리로 옮겨 드리는 삶이라고 하고, 그게 영광을 돌리는 삶! 영화롭게 하는 삶!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진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엉뚱하게 섬겨서 사랑하려고 하지 마세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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