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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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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9.03.08)

128112 김중애 [ji5321] 스크랩 2019-03-08

 


2019년 3월 8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 이사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복음 마태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스페인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요?
스페인의 국기인
‘투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지금은 스페인에서도
동물 학대라는 이유로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도 스페인에서는
인기있는 스포츠라고 합니다.
이 투우에 관한 책을 읽다가
 ‘퀘렌시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는데 이곳을
‘퀘렌시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소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입니다.
소에게 왜 이런 장소가
필요할까요?
 소가 편안함을 느끼면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투우장에서 사람들을
환호시킬 수 있는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퀘렌시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들고 지쳤을 때 기운을
얻을 수 있는 곳,
본연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퀘렌시아를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것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정한 퀘렌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삶의 굴레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편안함이 없어서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기운을 차려서 다시 힘껏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운 없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아무렇게 살아갑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남들의
삶에만 관심을 갖고
부러운 눈길을 보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단순히 단식 자체에만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머무르기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끊는 행위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이
 굳이 단식을 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당신께로 와서
쉬라고 말씀하시지요.
 당신 안에서 쉬면서 참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라고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것들 안에서는
 진정한 위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라는 퀘렌시아에
머물러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기쁨의 삶,
어렵고 힘듦 안에서도
진정한 위로와 힘을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우리 안에 사는 영혼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레프 톨스토이)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묵묵히 옆에 있어 주는 것.

미국에서 있었던 실험입니다. 

 우선 소음을 견뎌내는

 실험이라며 참가자를

모집한 뒤에 A와 B,

두 개의 방에 각각

한 사람씩 들여보냈습니다.

그곳에서 피험자들은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소음을 견뎌야 했는데,

도저히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문을 열고 뛰쳐나와

실험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개의 방은 모양과 면적이

 똑같았지만,

단 한 가지가 달랐습니다.

 방 B에는 패닉 상태에

빠졌을 때 소음을 줄일 수 있는

붉은 스위치가 있었고,

방 A에는 없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B에 있던 피험자들이

소음을 더 오래 견뎠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B에 있던 붉은 스위치가

사실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을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높이는 데는

나를 도와줄 무엇인가가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말과 행동으로

 과연 큰 힘이 될까요?

오히려 상처만을 줄 때가

많습니다.

더 큰 힘은 그냥 묵묵히

옆에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고통을

참는 한계를 높여주고,

또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 곁에서

묵묵히 옆을 지켜주십니다.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는 십자가를 향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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