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GOOD NEWS 게시판

검색
메뉴

검색

검색 닫기

검색

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4일 (수)부활 제4주간 수요일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가톨릭마당

sub_menu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1년 가까이 굿뉴스에 글을 올리면서..........

135250 강만연 [fisherpeter] 스크랩 2020-01-11

이제 제가 굿뉴스에 글을 올린 지 어언 1년이 되어 갑니다. 언제 한번 잠시 밝힌 적도 있습니다만 저는 한동안 바쁘셔서 나오시지 않으시다가 다시 글을 오려주시는 분인 한 자매님을 한 카페에서 인터넷으로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117일부터 글을 굿뉴스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글 때문에 상처 아닌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사실 개신교에서는 글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유독 천주교에서만 상처를 받았습니다.

 

상처를 입었지만 제 글을 좋아하시는 신부님이 계십니다. 모르겠어요. 지금 유학 가신 신부님께서 제 글을 정말 좋아하십니다. 저 같은 평신도의 글을 왜 좋아하시는지는 잘 모릅니다. 굿뉴스에 올리는 글 모두는 아니지만 거의 모두 신부님께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사실 한 자매님과의 인연으로 다시 용기를 내어서 굿뉴스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제가 글 때문에 받은 상처 때문에 다시 개신교로 가려고 하던 차에 수도원에 계신 신부님 덕분으로 개신교로 다시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평소 제가 전해드리는 글을 신부님만 보기엔 좀 아깝다고 하셨습니다자매님을 다음카페에서 만나기 전에 이미 신부님께서 굿뉴스에 글을 올릴 것을 권유를 했지만 제가 워낙 글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 때문에 더는 상처를 받지 않으려고 신부님의 권유에도 그냥 그렇게 신부님께만 제 글을 보내드리고 또 피드백을 받는 그런 식으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초부터 글을 올렸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작가처럼 글을 유려하게는 쓰지는 못합니다. 글은 유려하지 않지만 그냥 저는 가능한 제 느낌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을 하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그래서 제 글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인위적으로 뭔가 꾸미려고 하는 그런 부분이 없어서 말입니다. 실제 수도원에서는 제가 보낸 글을 강론으로 주일에 그대로 강론을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수도원에서 있었지만 사실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저에게는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제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난 후에 인터넷에 종교에 관한 정신세계에 관한 글을 올린 후에 잊을 수 없는 댓글이 딱 두 개 있습니다. 김웅렬 신부님 카페에서 강릉바다라고 하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자매님의 댓글과 아이디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분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강릉바다 아이디를 사용하는 자매님의 댓글 중에 한번은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다른 건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에 형제님 글은 글 한 자도 빼지 않고 읽는다는 댓글이었습니다. 정말 저에게는 많은 힘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글이 어떤 분에게 힘과 용기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글을 올리는 보람이 있었습니다. 또 한분의 자매님은 정말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너무나도 과분한 칭찬이었습니다. “ 형제님은 나중에 왠지 성인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칭찬은 정말 말도 되지 않는 과분한 칭찬이었습니다. 이 칭찬을 듣고는 사실 겁도 났습니다.

 

사람은 글과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글이라는 건 이 세상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작가가 글을 잘 쓰려면 작가의 삶이 그대로 우러나와야 그 글이 독자들로 하여금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런 칭찬이 어쩌면 좋은 칭찬일 수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제 자신한테는 무서운 칭찬일 수 있습니다. 저는 왜 그 자매님께서 그런 칭찬을 했는지 그 이후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글로써 제가 허위로 제 삶을 거짓으로 그릴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한두 번이지 어느 정도 계속 일관되게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건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그 자매님께서도 카페에 제가 올리는 글을 계속 읽고 나름 저를 유심히 관찰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제 글을 보고 그렇게 느끼셨던 같습니다.

 

최근에도 마찬가지였고 며칠 전에도 이젠 그만 글을 올릴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사실 굿뉴스에서 거의 1년 동안 글을 올리면서 글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제 스스로 위축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글만 번지르르했지 제 삶이 글과 일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추한 게 없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가식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 한번 제가 왜 글을 올리는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한번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나서 그냥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면 그 글이 제가 제 자신을 추켜세우는 그런 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렸습니다.

 

만약 그런 오해를 사게 되면 그건 정말 건방진 모습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나름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평소 오늘만 올리고 이젠 더 이상 글을 올리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을 하면서도 번번이 그 약속을 제가 어깁니다. 저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어떤 글은 쓰면서도 두려움을 안고 글을 씁니다. 타이핑을 하면서도 만약 이 글을 많은 형제자매님들께서 읽어보시고 좋다고 평가를 하실 수도 있지만 조금 무례하다고는 생각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군가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도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가지는 건 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제가 봤을 땐 좋은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 스트레스를 가지면 글을 올리지 않아야 되는데 왜 그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글을 올리는지 아세요 저는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하느님을 체험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부족한 글이지만 글을 쓸 때만입니다.

 

세상 글을 쓸 때는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개신교에 있을 때 글을 쓰도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 언젠가부터 그걸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걸 잘 몰랐습니다. 물론 개신교 때부터 글을 많이 썼지만 그땐 으레적으로 하는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글을 좀 쓴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냥 단순한 칭찬이고 격려 차원에서 하는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근데 개종 후에 본당에서 많은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제가 주보에 글을 올리면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저에게 영세를 주신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강론을 잘 하시기로 유명한 신부님이십니다.

 

저도 한번 이 신부님을 소재로 글 몇 편을 올렸습니다. 제가 영세를 받고 6개월되었을 때 성모의 밤 행사를 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성모님 앞에서 성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제대 뒤에 앉으셔서 행사를 하는 동안 제가 성모님께 올린 글을 보시고 나중에 미사가 끝난 후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계속 글을 주보에 올렸습니다. 본당 자매님들 중에서는 제 글이 주보에 실리지 않으면 글 좀 올려라고 부탁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나름 신선한 면이 있어서 그랬나봅니다. 그러다보니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글을 올리면서 신기한 체험을 어느 날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때 하느님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바둑을 두지 못합니다. 바둑에 보면 대국을 하고 나서 처음부터 자기가 어떻게 바둑을 두었는지 다시 복기하는 게 있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글을 쓰면서 주위에서 글을 좀 쓴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또 개종후에도 그런 소리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고백하면 제가 좀 글쓰는 달란트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순전히 제 능력으로 글을 쓰는 줄 알았습니다. 초기에 본당 주보에 글을 올릴 때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근데 어느 날 알았습니다. 제가 글을 쓰는 달란트가 제 능력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겸손해보이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원래 다른 글은 복기를 하려면 복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신기하게도 신앙에 관한 글은 복기를 하려면 비슷하게는 쓸 수가 있을지는 몰라도 거의 복기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글을 한 편 완성을 한 후 컴퓨터에 저장하고 나서 다시 복기를 해서 쓰려고 해도 전혀 되지를 않았습니다.

 

또 하나는 글을 쓰는 도중에 제가 컴퓨터로 타이핑을 하지만 저도 어떨 땐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글을 쓰고도 이유를 모를 정도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때 알았습니다. 이건 확실한 체험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왜냐하면 보여서 증명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사례를 한두 번 체험한 게 아닙니다. 순간 어떤 느낌을 받으면 그냥 뭔가 제가 생각해서 글을 쓰기도 하지만 그냥 제가 생각해서 적는다기보다는 뭔가에 이끌려서 쓰는 기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확실한 건 모르지만 저는 제가 글을 쓸 때 정말 제 능력으로 쓰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글을 쓰면서 어떨 경우는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건 이런 비유와는 좀 거리가 있지만 저는 이럴 때 옛날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의 고충을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저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선지자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고 싶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사명을 받았으면 그게 하나의 운명인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그런 거랑 저와는 전혀 다르지만 아무튼 이런 심리적 압박감을 가지면서 나름 글을 올리는 이유를 최종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로마에 계신 신부님이 얼마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어떨 경우는 잘 쓴 글 하나가 어떤 영혼에 잘 스며들어간다면 그 영혼을 살리는 명약이 될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형제님! 용기를 가지시고 형제님의 글을 보고 희망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분을 위해 힘들더라도 꾸준히 글을 올리시는 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일 수 있으니 부디 용기를 가지라고 하신 격려 때문에도 비천한 글이지만 용기를 내어 글을 올리는 그런 사정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조금이라도 신앙에 보탬이 되는 글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분도 계실 거고, 어떤 분에게는 짜증나는 글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자기와 성향이 맞지 않으면 그러는 게 당연합니다. 사람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제 글이 불편하신 분이 계시다면 너그러이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저는 제 글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받을 수 있는 한 분이 계신다고 한다면 그분 한 영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밀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항상 겸손한 자세로 부족하지만 제 힘 닿는 데까지 올리겠습니다.

 

혹시라도 글에 대해 비판하실 분이 계시면 얼마든지 비판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건전한 비판은 얼마든지 제 자신의 발전을 위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0 1,450 0

추천  0 반대  0 신고  

TAG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로그인후 등록 가능합니다.

0 / 500

이미지첨부 등록

더보기
리스트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