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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4일 (수)부활 제4주간 수요일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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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

130665 장병찬 [jesus_maria] 스크랩 2019-06-28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

[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면 바로 잊으라.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들었으면 바로 잊으라.
다른 사람이 험담하는 것을 들었으면 바로 잊으라.
화나고 심술이 나는 일이 있으면 바로 잊으라.

다른 사람이 친절을 베풀었으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기억하라.
다른 사람을 칭찬할 것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기억하라.
다른 사람과 약속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꼭 기억하라.
도움받은 일이 있으면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갚으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행복을 기억하며,
근심과 고통을 잊어버리고,
용서하고 소망을 가지라.
선한것을 기억하라.
진실된 것을 기억하라.
그리고 위의 모든것을 기억하라. 생각하라.

그러면 진정한 기쁨과 당신을 아끼는 이들의 마음을 얻을 것이다.

(프리실라 레오날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시는 분 ; 사제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2티모테오 3,17)이다.

우리를 위하여 성체 성사를 준비하고 우리 주님을 우리에게 주는 분은 누구인가?  그는 바로 사제이다.  만약 사제가 없다면, 미사 성제도 있을 수 없고, 영성체도 있을 수 없으며, 감실 안애서의 예수님의 현존도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사제란 어떤 분인가? 그는 "하느님의 사람"(2티모테오3,17)이다. 사제가 될 사람을 많은 이들 가운데에서 매우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선택하시고 부르시는 분은 하느님 뿐이시다.  
"아무도 이 영예를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히브리 5,4).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로마 1,1) 그를 다른 모든 이들로부터 따로 가려내신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영원히 지속되는 거룩한 인호(印號)를 주시어 그를 "영원한 사제"(히브리 5,6)로 만드신다.  그리하여 그가 하느님의 일만을 위하여 완전히 봉헌되도록 사제로써의 임무를 위한 초자연적인 능력들을 부여해주신다. 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일을 맡고 있다. 그것은 그가 예물과 속죄의 제사를 바치기 위함이다" (히브리 5,1-2).


동정이며, 가난하며, 십자가에 못박혀 있다

서품을 통하여 사제는 영혼과 육신이 다 봉헌된다.  그는 하느님이신 사제, 즉 예수님을 닮아 완전히 신성한 존재로 된다.  그리하여 사제는 참으로 예수님의 연장(延長)이 되며 예수님의 성소(聖召)와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구속 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들, 즉 하느님을 예배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의 일을 수행하게 된다. 그의 삶에 있어서 그는 예수님의 삶, 즉 동정이셨고, 가난하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그분의 삶을 완전히 재현하도록 불림받아 있는 것이다.  자신을 예수님과 같게 함으로써 그는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공복(公僕)"(로마15,16)이 되며 "영혼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이"(마태오 28,20)가 되는 것이다.

니싸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썼다. "어제까지만 해도 백성 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가 그들의 주인이 되고, 그들의 윗사람이 되며, 거룩한 것들에 대한 스승이 되고, 신성한 신비들에 있어서의 지도자가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천주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서이다. 왜냐 하면, "사람에게 사제직을 부여하는 것은 사람이나, 천사나, 대천사나, 그 어떤 피조물의 힘이 아니라 천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령께서 사제의 영혼을 예수님의 모상이 되게 하시며, 사제가 예수님의 일을 하게끔 능력을 주시어 "제대 앞에 선 사제는 예수님과 동일한 위격(位格) 안에서 예수님의 임무를 행하게 되며"(성 치쁘리언),  "하느님의 일이 전적으로 그에게 위탁되어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므로 사제의 존엄성에 대하여 "천상적이다"(카씨언), "무한하다"(성 에프렘), "모든 위대함의 절정이다"(성 이냐시오 순교자), "천사들에 의해 사랑으로 존경된다" (성 그레고리오 나지안젠), 너무나 위대하여 "사제가 미사 성제를 드릴 때에는 천사들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희생되시는 주님께 대한 찬미를 합창한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러한 선언들에 대하여 놀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미사 때마다 일어나고 있다.


존경과 경의를 표시함

우리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가 자신이 고귀한 사제직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제가 되지 않으려고 했음을 알고 있다.  성인은 사제들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을 그의 "주인들"이라고 불렀다.  왜냐 하면, 성인은 그들 안에서 "천주 성자"만을 보았기 떄문이다.  그의 성체께 대한 사랑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축성하며 나누어주는 사제들에 대한 사랑과 한데 융합되었다.  그는 특히 사제의 손을 존중하였다.  그래서 자주 무릎을 꿇고 사제의 손을 경건하게 친구하였다.  그는 사제의 발도 친구했으며 심지어는 사제가 걸어가면서 남긴 발자국들을 친구하였다.

성 요한 보스꼬는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사제들을 지극히 존경하시기를 촉구합니다.  사제들과 이야기하거나 길에서 만날 때에는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손을 경건하게 친구하십시오.  특히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들에 대한 경멸을 표시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거룩한 목자들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큰 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자들이 사제의 축성된 손을 경건히 친구하여 존경을 표시하는 것은 교회 안에 늘 계속되어왔던 관습이다.  로마 제국에서의 박해 시대에 주교들과 신부들이 더 이상 축성을 하지 못하고 강복을 줄 수 없도록 그들의 손을 잘라버리는 잔인무도한 관습이 행해졌다.  크리스챤들은 잘라진 손들을 찾아서 향료를 뿌려서 잘 보존하였다.

사제의 손을 친구하는 것은 또한 사제가 대리하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섬세한 표현이 된다.  신앙과 사랑이 많을수록 사제 앞에 꿇어서, 예수님께서 매일 그 안에 기꺼이 임하시는 그들의 거룩하고 존경스런 손을 친구하려고 할 것이다.

성 아오스딩은 외쳤다. "오, 사제의 존엄성이여!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동정녀의 태 중에 임하셨던 것처럼 그의 손 안에 임하시는도다." 아르스의 거룩한 사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거룩하신 동정녀와 아기 예수의 죽그릇 등 로레또에서 전해지고 보존되어오고 있는 물건들이 매우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제의 손가락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몸을 만졌으며, 그분의 피가 담긴 성작과 그분의 몸이 있는 성합 속으로 넣어졌었는데, 이 손가락들보다 더 고귀한 것들이 있겠는가?"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성인들의 예들을 살펴봄으로써 이것이 확인될 것이다.


사제의 양손을 친구한 성녀 헤드위가 왕비

가경자 카타리나 바니니는 탈혼 중에 천사들이 미사드리는 사제의 손 주위에 모여서 성체와 성작을 거양할 때 손을 받쳐주는 것을 보았다. 하느님의 종인 이 가경자가 어떠한 존경심과 사랑으로 사제들의 손을 친구했었을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성녀 헤드위가 왕비는 매일 아침 궁전의 소성당에서 바쳐지는 모든 미사들에 참례하였다. 그리고 성녀는 미사 성제를 드린 사제들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고 존경스럽게 생각하였다. 성녀는 사제들에게 친절을 표시했으며 그들의 손을 경건하게 친구하였다.  그들이 식사를 걸르지 않도록 챙겼으며 그들에게 온갖 경의를 표하였다.  성녀는 이렇게 외쳤다. "하느님, 천국으로부터 예수님께서 내려오게 하시고 그분을 저에게 주신 신부님을 축복하여 주소서!"

성 파스칼 바일론은 수도원에서 짐나르는 일을 맡고 있었다. 사제가 도착할 때마다 이 거룩한 평수사는 꿇어서 사제의 양손을 경건히 친구하였다. 사람들은 성 프란치스꼬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성 파스칼이 "사제들의 축성된 손들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성인은 사제들의 손이 그들을 존경스럽게 대하는 이들을 위하여 악을 쫓고 축복을 내려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왜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손들이기 때문이다.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사제의 손을 애정 깊게 친구했으며, 때로는 갑자기 그 손들을 꼭 쥐었다. 하느님의 또 한 분의 종이었던 돈 돌린도 루오톨로 신부는 자기 손을 친구하려는 사람들을 거절할 신부가 어디 있겠느냐라고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존경의 행위에 대하여 기적들로써 보답해주셨다. 하루는 성 암브로시오가 미사 성제를 드린 후에 중풍걸린 여인이 가까이와서 그의 손에 친구하려고 하였다. 그 여인은 성체를 축성했던 손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치유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베네벤또에서 15년 간 중풍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교황 레오 9세에게 미사 중에 교황이 손가락을 씻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거룩한 교황은 예수님께 "주인의 식탁으로부터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라도" (마태오 15,27) 청했던 가나안의 여인처럼 겸손한 이 간청을 허락하였다.  이 여인 또한 즉시 치유되었다.


먼저 사제에게, 그리고 나서 천사에게

성인들의 신앙은 참으로 깊었으며 놀라운 결실들을 가져왔다.  그들은 "신앙에 의해서"(로마 1,17) 살았으며,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한계를 모르는 신앙과 사랑으로써 행동하였다.  그들에게는 사제가 더 이상도 아니고 더 이하도 아니고 예수님을 대리하는 분이었다. "사제들 안에서 저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봅니다."라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말하였다.  아르스의 거룩한 사제는 설교 중에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사제를 볼 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드 빠찌가 사제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사제를 "이 예수님"이라고 칭하였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사제가 걸어간 마루나 땅을 친구하곤 하였다.  하루는 성녀 베로니카 쥴리아니가 병자에게 성체를 모셔다주려고 사제가 수도원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성녀는 그 계단의 맨 밑에 가서 무릎을 꿇고 계단을 올라갔다. 매 계단을 친구하면서, 그리고 그녀의 사랑으로 인하여 흐르는 눈물로 적시면서 올라갔다.  이 어떠한 사랑의 표양인가?

아르스의 거룩한 신부는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내가 사제와 천사를 만난다면, 사제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에 천사에게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사제가 없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보물함에 금이 가득 들어있다고 하여도 아무도 이를 열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제는 천상 보물들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흰 면병의 외양 안에 예수님께서 내려오시도록 하는 이가 누구인가? 누가 예수님을 감실 안에 모시는가? 누가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주는가? 누가 우리들이 예수님을 모실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정화시켜주는가? 그 일을 하는 이는 사제이며, 오직 사제 뿐이다.  그는 "성소(聖所)를 돌보며"(히브리 13,10), "화해의 봉사직"(2코린토 5,18)을 맡아 있으며,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1코린토 4,1) 분이다. 오, 예수님을 양떼에게 주기 위하여 자신들을 희생했던 영웅적인 사제들이 얼마나 많았던고!  많은 예들 중에서 하나만 들어본다.


"천국에서 만날 때까지 안녕히"

오래 전 브리따니의 한 본당에서 늙은 본당 신부가 임종을 맞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본당 신자들 중의 한 명이 또한 죽음에 가까워 있었다.  그는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떠나있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신부는 일어나서 그에게 갈 수가 없었으므로 상심이 되었다.  그래서 보좌 신부를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죽어가는 이에게 언젠가 그가 성사들을 받지 않고서는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음을 상기시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신자는 변명을 하였다.  "나는 그 약속을 본당 신부에게 한 것이지 당신에게 한 것이 아니요."  보좌 신부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본당 신부는 실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몇 시간 밖에는 더 못 살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들것에 실려서 그 죄인의 집까지 갔다.  그 집에 들어가서 죽어가는 사람의 고해를 듣고 성체를 영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였다.  "천국에서 만날 때까지 안녕히!"  용감한 본당 신부는 들것에 실려서 다시 사제관으로 돌아왔다.  도착했을 때 담요를 들쳐보니 신부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사제들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분들이요, 예수님과 영혼들 사이의 구원을 중재해주는 분들이다.  사제들이 모자라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가 참으로 놀랄 정도로 타락된다.  사제 성소(聖召)와 선교 성소(聖召)에 대한 응답이 없는 곳에서는 예수님이 증가되지 않으며, 신앙이 약화되고 성숙되지 않는다.

한 번은 일본의 어느 부락의 지도자가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심에 대한 설교를 듣고 난 후에 그에게 물었다. "어째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렇게도 좋으신 하느님께서 이렇게 오랜 세월 후에야 크리스챤 신앙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까?" 성인은 슬픈 어조로 대답했다. "그것을 알고 싶으십니까?  바로 이것이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크리스챤들에게 여러분들에게 와서 복음을 전하도록 영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분의 부르심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사제들은 교회에 안정과 풍성한 결실을 준다. 가경자 안토니 쉐브리에르는 "모든 참된 교회의 토대는 거룩한 신부들입니다. 그 기둥들도 거룩한 신부들입니다. 그 등불도 거룩한 신부입니다. 강론대에는 거룩한 신부가 있고, 제대에는 거룩한 신부가 있습니다. 신부는 또 한 분의 그리스도입니다 (alter Christus)!"라고 말하였다.


"성인 아니면 마귀입니다."

우리도 사제가 우리에게 주님을 모셔옴으로 인하여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 감사드리자.  무엇보다도 그의 고귀한 사명, 즉 예수님의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드리자.  "성부께서 나를 보내셨음같이 나도 또한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 20,21).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사랑으로 머리가 돌고 미쳐버리게 하는 하느님께로부터의 사명이다.
사제는 "하느님의 아드님에 비유된다" (히브리 7,3). 그리고 아르스의 거룩한 신부는 "우리가 천국에 가서야만 사제직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이것을 지상에서 깨닫는다면, 죽을 것이다. 놀라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하여....  하느님 다음에는 사제가 전부이다."라고 자주 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숭고함과 위대함은 크나큰 책임감을 동반하며, 그것이 다른 이들과 똑같은 사제의 약한 인간성 위에 무겁게 놓이게 된다. 성 벨라도는 "사제는 본성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데, 존엄성으로는 지상의 다른 어떤 이보다도 초월한다.  그의 행동으로는 천사를 닮아야 한다."

하느님께로부터의 소명(召命), 고귀한 사명, 천사적인 삶, 지극히 높은 존엄성 - 약한 인간의 본성에게 주어진 얼마나 엄청난 짐인가! "사제직은 십자가이며 순교이다" 훌륭한 사제였고 하느님의 종이었던 에드워드 포쁘 신부는 이렇게 사제직을 잘 묘사하였다.

사제에게 주어진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무거운 책임을 생각해보자. 그의 사명은 신앙을 불신자들에게 가져가는 것이며, 죄인을 회개시키고, 미지근한 자를 뜨겁게 하며, 좋은 것을 자극하여 더 좋게 하고 거룩한 이들을 격려하여 더욱 완덕에로 매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참으로 예수님과 일치되어 있지 않으면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사제는 성인 아니면 마귀입니다."  사제는 영혼들을 거룩함에로 이끌어가든지 아니면 멸망에로 이끌어간다.  자신의 성소를 합당하지 못한 행동으로 더럽히며, 주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봉헌된 지위를 저버리면서 성소를 짓밟는 사제는 얼마나 엄청난 파멸을 초래하는가!

성 요한 보스꼬는 이렇게 말했다 "사제는 천국에 가든 지옥에 가든 혼자 가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대단히 많은 영혼들을 함께 데리고 갑니다. 그들은 사제의 좋은 사목과 표양으로 인하여 구원되든가 아니면 그의 사목상의 태만과 나쁜 표양으로 인하여 멸망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의 시성 조사록에서 우리는 이 거룩한 신부가 "그들의 성소의 거룩함에 맞지 않게 살아가는 신부들로 인한 파멸을 생각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음에 대하여 읽을 수 있다.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합당치 않고 불충한 사제들의 죄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무서운 고통들을 받으시는 환시를 보고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드리자

천사적인 갈멜회 수녀였던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는 임종 떄에 다음과 같은 의향을 위하여 마지막 영성체를 하였다.  즉 그의 성소를 저버리고 탈선한 한 사제가 되돌아 오기를 위하여.  그리고 그 사제는 그의 임종 때에 예수님을 부르면서 회개를 하였다.

우리는 사제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으로 바쳤던 영혼들, 특히 동정 영혼들에 대하여 알고 있다.  이런 영혼들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매우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사제들을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봉헌하자.  위험에 처한 사제들을 위하여 그리고 확고하고 안전하게 나아가고 있는 사제들을 위하여.  탈선하고 있는 사제들을 위하여 그리고 이미 완덕에 이르고 있는 사제들을 위하여.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사제들의 부족함에 대하여 너무나 쉽게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기도드려주어야 하는데.

유명한 스위스의 성인이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플루에의 성 니콜라스는 사제들의 흠을 지적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당신은 사제들의 거룩함을 위하여 몇 번이나 기도드렸소? 교회를 위하여 좋은 성소들을 주시도록 무엇을 하셨소?  말해보시오."

그리고 우리가 제대에 선 사제를 볼 때마다 성모님께 기도드리자. 가경자 챨즈 지아친또처럼: "오 나의 사랑하는 성모님, 당신의 성심을 저 사제에게 주소서.  그리하여 미사를 합당하게 바치도록 하여주소서."

우리는 또 소화 테레사 성녀처럼 제대의 사제들이 성모님의 순결함과 섬세함을 가지고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한 몸을 만지도록 기도드리자. 더욱이 성모님과 지극히 일치되어서 미사 준비를 하였던 성 까예딴을 모든 사제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기도드리자. 성인은 마치 자신이 성모님인 것처럼 미사를 드렸다라고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성모님께서 베틀레헴에서 예수님을 당신의 품안에 안으신 것처럼, 사제가 미사 성제 중에 예수님을 그들의 손에 모시는 것이다.  티없으신 분께서 예수님을 갈바리아 산 위에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던 것처럼 사제도 제대 위에서 희생되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을 바치는 것이다.  동정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인류에게 주셨던 것처럼, 사제도 영성체 때에 예수님을 우리에게 준다. 그리하여, 성 보나벤뚜라는 제대에 선 모든 사제는 성모님과 밀접하게 일치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성모님께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지극히 거룩하신 몸이 사제의 손에 의해서 봉헌되어야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성모님께서 사제들이 어떠한 거룩함을 지녀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되신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태 속에 말씀이 강생하신 것과 사제의 손에 의해서 성체가 축성되는 것과의 지극한 가까운 연관성 때문이다.

우리들도 또한 성인들로부터 사제들을 존경하는 것을 배우며, 그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의 지극히 고귀한 사명을 위하여 도와드리자.

(성체 성사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






감옥에 갇히신 예수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감옥에 갇혀있는 나를 생각하여라.
나는 감옥 안에서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병사들은 말과 행동으로 나를 조롱하고, 번갈아 가며 나에게 매질을 가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묶여 있는 상태로 더럽고 악취 나는 구석으로 쳐밀었다. 차가운 돌 위에 몸을 기대고 있을 때 추위와 아픔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감옥에 갇혀 있던 상황과 지금 감실 안에 포로가 되어 있는 사정을 비교해 보자. 그리고 감옥에 있을 때 나를 학대하고 조롱하던 자들과, 나를 영하면서도 나를 냉대하는 영혼들을 비교해 보자. 감옥에 갇혀 있는 시간은 단 하루 밤이었다. 그러나 감실에 갇혀있는 시간은 성체성사를 세운 후 지금까지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감옥에 있을 때도 사악한 인간들로부터 온갖 조롱과 학대를 당하더니 지금은 나를 사랑한다고 자처하며, 나를 영하는 영혼들로부터 참기 어려운 냉대와 배신을 당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 비재한 줄 아느냐?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추위와 상처의 통증, 허기와 갈증, 그들에게 당한 창피, 그리고 외로움과 망각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와 못지 않게 이 감실 안에서 여러 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수많은 영혼들로부터 사랑과 애정을 받지도 못한 채,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감실에 갇혀있다. 돌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얼음덩이 같은 마음을 가진 수많은 영혼들을 보았다.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하여 갈증을 느끼고, 사랑을 섭취하지 못하여 허기져 있던 때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영혼들이 나를 찾아와 주기를 학수고대하며, 앞으로도 얼마나 긴 세월을 보내야 할까?

영혼들이 언제쯤 나를 찾아와, 이 목마름과 배고픔을 풀어줄 것인지....  설사 영혼들이 나를 찾아왔더라도, 그들은 나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어떻게 해야 해결해 줄 수 있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괴로워할 때에, "당신의 고통과 근심을 덜어 드리기 위해 당신께 저희 희생과 노고를 바칩니다." 라고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내가 외로워할 때, "당신의 짝이 되어, 당신의 외로움을 덜어들이겠습니다."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줄이나 알고 있는가?

너희 영혼들이 나와 결합하면, 평화로운 가운데 자신들의 고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으며, 용감하게 역경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너희 영혼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이겨낼수록, 나의 마음은 큰 위로를 받는다.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악한 그들이 나에게 퍼부어 댄 악담과 조롱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으며, 훗날 내가 끔찍히 아끼고 사랑하는 영혼들의 입에서 그와 똑같은 악담이 흘러나올 것을 미리 내다보고 참혹한 심정이었다. 그 당시 병사들에게 계속 매질을 당하면서, 많은 영혼들이 통회하지 않고 나의 성체를 영하며,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여 나의 마음에 잔혹하게 매질하리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병사들이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이미 기력이 다해 나뒹구는 나를 아무도 붙잡아 주지 않았다. 지금은 배은 망덕의 사슬로 나를 묶어 땅바닥에 패대기 쳐놓은 다음, 나를 외롭고 적적한 상태로 방치하는 영혼들을 본다. 그 창피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느냐?

선택받은 영혼들아!
감옥에 있다가 지금은 감실에 갇혀 있는 너희 짝을 바라보아라. 외롭고 비참한 밤 사이에 내가 이 적막한 감실 안에서 너희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서러워하고 있다. 언제까지 나를 냉정하게 방치해 두려느냐? 값싼 동정이라도 주겠느냐?
어서 너희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다오. 어서 너희 마음 안에 나의 거처를 마련해 다오. 그리고, 너희 사랑의 사슬로 너와 나를 한데 묶어 다오. 너희 애정으로 나를 덮어 다오. 너희들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나의 주린 배를 채워다오. 뜨거운 마음으로 나를 마셔다오. 끊임없이 나를 찾아와 근심과 고통에 젖어 있는 나를 위로해 다오
.

사랑하는 영혼들아!
너희들의 정결과 올바른 의지로 내가 수많은 영혼들로부터 받은 수치를 없애다오. 내가 너희 안에 쉬고 싶어하면, 너희들의 거칠고 산란한 욕정을 눌러 제거하여라. 나는 고요해 진 너희 영혼 안에서 휴식을 취하겠다. 이 때에 너희 영혼들은 "나를 위해 너희 자신을 희생한 것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 너희가 나를 사랑으로 보살피고, 너희 마음 한 가운데 머물게 하였으니, 나도 너희에게 무한한 포상을 내려 주겠다. 너희가 나의 쉼터가 되어 주었으니, 나도 너희들이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주겠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   추기경의 눈물



'황우석 사건' 보니 자괴의 눈물이...

난 눈물이 마른 남자라고 생각해왔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2005년 12월 중순이었다. 성탄절을 앞두고 평화신문과 대담을 하는 자리에서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진위 논란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다 그만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훔치는 사진이 일간지에도 실려 좀 당황스러웠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배아줄기세포 연구 논문의 조작 증거가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자 '황우석 신드롬'에 사로잡힌 국민들은 정신적 공황상태가 됐다. 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하면서도 황 교수의 연구 성과에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사실이 아니기를….'하고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나 역시 참담한 심정이었다. 한 생명공학자의 연구 성과가 전 세계를 흥분케 하고, 그로 인해 그 과학자는 국민영웅이 됐는데 모든 게 거짓이라니…. 세계인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때 흘린 눈물은 자괴(自愧)의 눈물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가슴 아파 한 것은 우리 사회의 진실성 결여다. 그 사건은 한 과학자의 윤리문제로 국한해서는 안 되고 총체적 사회구조의 문제로 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년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동안 '정직'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잃어 버렸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결과만 내놓으면 탈법과 눈가림은 오히려 무용담이 되는 게 사회 풍조다. 그래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심지어 고귀한 생명까지 짓밟는다. 어쩌다 위법사실이 들통나면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말을 바꾸고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다.

우리나라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빨리빨리 성과를 내는 덕분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직이 사라진 사회, 인간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에서 경제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 26-27)고 물으셨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천연자원이 풍부한 땅 대신 좋은 머리를 주셨다. 미국 한인사회를 방문하면 "올해 이쪽 고등학교 최우수 성적 졸업생이 한국인이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일본 유학시절에도 한국인 학생들이 대부분 반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

문제는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요즘 신문방송을 보면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기수법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 얘기가 수도 없이 나온다.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신뢰와 정직이다. 우리나라 제품 품질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일제(日製, Made in Japan)라면 신뢰하고, 국산(國産)이라면 믿지를 못했다. 일제 품질은 기술력 이전에 그 나라 국민들의 우직하고 정직한 심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고로 우직한 사람은 빠르지는 못해도 정직하다.

난 일본과 독일에서 공부한 덕분에 그 나라 국민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독일인들은 질서의식이 투철하고 매사 철두철미하다. 하다못해 한밤 중에도 교통신호를 철저하게 지킨다.

독일에서 한국인 신부가 운전하는 승용차 뒷좌석에 타고 어딜 간 적이 있다. 그 신부가 한밤 중 텅빈 사거리에서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건넜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신호등 앞에 서자 뒤따라 오던 차 운전자가 우리 앞으로 오더니 "당신들은 왜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느냐"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과 독일 제품이 인정 받고, 두 나라가 전후 잿더미 속에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비결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정직한 자세다. 인간 관계건 국가 관계건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머리 좋은 우리 국민들이 좀 더 정직하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평화신문)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집을 사랑함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오 28,20)

감실 안에서의 예수님의 신성한 현존은 항상 성인들의 한없는 경외(敬畏)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주님께 속하는 것들"(1코린토 7,32)에 대한 그들의 지극히 정성스럽고 순결한 사랑의 배려(配慮)는 그들이 가졌던 크나큰 사랑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으로 인하여 그들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었으며, 예절의 아주 단순한 부분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지극히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성 알퐁소는 이를 위하여 그들의 생명까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선언하였다.


거룩함과 단정함

우리는 성인들로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분께서 "거주하시는 장소" (마르꼬 11,17)인 거룩한 감실과 제대와 성당을 사랑에 찬 배려로 감싸는 것이다.  모든 것에 단정함의 분위기가 배어있어야 하며, 모든 것이 신심과 흠숭의 정신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아주 작은 일들에까지, 세부 사항들에 있어서까지 그래야 한다. 
"영광의 왕"(시편 23,10)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해도 부족할 것이다.  전에는 미사 때 사제가 손씻는 물에 향수를 탔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성사를 설립하실 때 훌륭하고 아름다운 장소, 즉 가구가 갖추어져 있고 양탄자가 깔려있는 큰 식당이었던 다락방을 선택하셨다 (루카 22,12).  성인들은 항상 하느님의 집을 아름답고 잘 정돈되게 하기 위하여 전적인 열정을 바치고 머리를 썼다. 왜냐하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르쳤듯이, 먼저 예수님의 실제 몸을 돌보고 그 다음에 그의 신비체를 돌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더러운 성당들을 청소하기 위하여 빗자루를 들고 다녔다.  성인은 사람들에게 설교한 후, 그 지방의 성직자들에게 주님의 집이 경건한 모습을 갖추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성인은 성녀 클라라와 동료 수녀들에게 제대포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의 빈곤에도 불구하고, 성인은 가난하고 초라한 성당들에 성합과 성작과 제대포를 보내주었다.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가 초라하고 버려진 성당에서 성체 조배를 할 때 너무나 슬프게 느꼈기 때문에 조배가 끝난 후에 이렇게 외쳤다.  
"오, 예수님을 이렇게 초라하게 모시자니 너무나 힘이 드는구나!"

성 요한 바띠스뜨 드 라 살(St. Jean Baptiste de la Salle)의 생애를 보면, 성인은 성당이 항상 깨끗하며 잘 갖추어져 있고, 제대는 빈틈없이 정돈되어 있으며, 성체등(聖體燈)은 항상 켜져있도록 하였음을 볼 수 있다.
더러운 제대포라든가, 찢어진 제의, 녹슬은 제기들은 그의 눈을 아프게 하였으며 그의 가슴은 더욱 아프게 하였다.  성인은 우리 주님을 바로 흠숭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비용이라도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제대에서 쓰는 모든 것들이 조금이라도 하자(瑕疵)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떄문에 하루는 미사를 위해 준비되었던 성체포를 두 번이나 제의실로 되돌려보냈다.

성체를 특별히 사랑했던 왕들 중에는 보헤미아의 왕 성 웬체슬라우스가 있었다.  면병을 만들기 위하여 그는 손수 땅을 갈고, 밀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고, 빻고, 체로 쳤다.  그렇게 만든 깨끗한 밀가루로 그는 미사성제를 위한 면병을 만들었다.  프랑스의 왕비였던 성녀 라데군드는 나중에 겸허한 수녀가 되었으며, 미사를 위한 면병을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면병을 가난한 성당들에 무료로 보내주었다. 성녀 원선시아 제로사는 포도밭을 직접 가꾸어서 주님의 성혈이 될 미사주를 만드는 일을 기쁨으로 하였다.


성모님의 손으로

성체를 다룸에 있어서의 성인들의 섬세한 배려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성체 조각에까지도 예수님께서 현존하심에 대하여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비오 신부가 제대에서 성반(聖盤)과 성작, 성합 등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닦는지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서 흠숭을 읽을 수가 있었다.

한 번은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가 미사 성제 후에 성반 위에 작은 성체 조각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서 즉시 수녀들을 불러서 참으로 천사와 같은 경건한 태도로 함께 제의실까지 성반을 들고 거동하였다. 성녀 테레사 마가렛이 성체 조각이 제대 부근 마루에 떨어져있음을 발견했을 때 성녀는 예수님께 드려진 불경을 생각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사제가 와서 성체 조각을 감실 안에 모실 때까지 꿇어서 흠숭하고 있었다.

성 챨즈 보로메오가 성체를 분배해주고 있을 때였는데, 잠깐의 실수로 성체를 떨어뜨렸다. 성인은 예수님께 큰 불경을 드린 데 대한 죄책감으로 나흘 동안 미사 성제를 드릴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보속으로 8일간 금식하였다.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성체를 분배해주면서 가끔 흠숭의 정이 너무나 강하여 무릎을 꿇고서 성체를 분배해주었다.  천국에 합당한 신앙과 사랑의 광경이 아닐까?

우리는 성인 사제들이 성체 성사를 다룸에 있어서 얼마나 사려깊은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성모님의 손처럼 티없는 동정의 손을 가지기를 원했다.  콘스탄스의 성 콘라드의 엄지 손가락과 인지가 어두운 밤에는 빛이 났다.  그 두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거룩하신 몸을 들고 있을 때 그가 지녔던 신앙과 사랑 때문이었다.

탈혼 중에 천사처럼 날아다녔던 꾸뻬르띠노의 성 요셉은 엄지와 인지가 따로 한 쌍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였다.  그 이유는 그 두 손가락들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몸을 만지는 데에만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서였다.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가끔 거룩한 면병을 그의 손가락 사이에 들려고 할 때 많은 곤란을 겪었다.  그는 자신이 성체를 만지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손에 성흔을 받아있었다.  요사이 거의 모든 곳에서 시행되고 있는, 혀 위에가 아니라 손으로 성체를 받는 방식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무엇일까?  너무나 겸손했고 천사와 같았던 성인들에 비해보면, 그 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제시되는 이유들은 무게를 잃는 것 같다.  어떤 때에는 가슴 아픈 일로 인식된다.  그 방식 자체가 주제넘은 도둑질같은 행위임을 의미하지 않을까?


여성의 옷차림

성당 안에서의 단정함과 영혼들의 구원을 생각하여 성인들은 여성들의 정숙과 품위에 대해 대단히 많은 신경을 썼다.  이 점에 대한 엄격함은 모든 성인들의 공통점이었다.  
여인들에게 베일을 쓰라고 명했던( 1코린토11,5-6 ) 성 바오로 사도로부터 시작하여 성 요한 크리소스톰, 성 암브로시오,.............그리고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에게 이르기까지 그들은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항상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정숙한 옷을 입도록 강조하였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카스텔누오보의 성 레오폴드는 정숙하지 않게 옷을 입은 여자들을 "육체를 파는 이들"이라고 부르며 성당 밖으로 내쫓았다. 성인이 오늘날 성당 안에서조차 정숙과 품위를 포기해버린 수많은 여인들을 보고 무엇이라고 말할까?  그들은 성령께서 우리를 경고하시는 (집회서 9,9) 남자를 육욕으로 유혹하는 악마적인 수단을 거룩한 장소에서조차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이러한 심한 광기와 불결을 벌하지 않고 그대로 두지 않으실 것이다. 성 바오로는 "이러한 것들(육욕에 관한 죄)로 인하여 하느님의 진노가 불신자들의 자녀들 위에 내린다" (콜로새 3,6)라고 하였다.

성인들은 항상 그들의 표양과 말로써 우리들이 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어 경건히 십자 성호를 긋고, 존경스럽게 장궤를 하며, 무엇보다도 제대 주위를 에워싸고 항상 지키고 있는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성체성사에 계신 예수님을 흠숭하는 아름다움 습관을 지키도록 권고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드리기 위하여 성당에 들렀다면, 우리는 자신을 경건하고 주의깊게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되도록 성체 성사에 가까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복자 요한 던스 스코투스는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인성으로부터 발하는 신체적인 영향력이 그분의 몸과 피에 가까이 갈수록 더 강함을 보여주었다.  성녀 젬마 갈가니는 어떤 때에는 감실이 있는 제대에 더 이상 가까이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더 가까이 가면 성녀의 가슴 안에서 불타오르는 사랑의 불이 너무나 뜨거워져서 가슴 위의 옷을 태워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모자 위의 못

성 프란시스 드 살레즈가 성당에 들어가면서 성수를 찍어 십자 성호를 긋고, 장궤를 하고 감실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바로 저분이 하시는 것이 천국에서 천사들과 성인들이 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라고 하는 말이 옳음을 인정할 것이다.

한 번은 스코트랜드의 한 왕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만약 네가 천국의 천사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보고 싶으면, 성당에 가서 마가렡 왕비께서 제대 앞에서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시는 것을 가서 보아라,"라고 하였다.  모든 바쁘고 분심많은 이들은 복자 루이 과넬라의 다음과 같은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성당을 복도나, 뜰이나, 길거리나, 광장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성 원선시오 드 폴은 성체 앞에서 꼭두각시처럼 장궤하지 말도록 사람들에게 슬픈 어조로 충고하였다.

모쪼록 성인들의 이런 표양들과 가르침들이 우리들에게 헛되지 않기를!
성 필립 네리의 생애 중에 있었던 일을 회고하는 것이 우리들이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루는, 성인이 성당 앞을 급하게 지나가는 남자를 멈추게 하여 이렇게 물었다.
"여보세요.  거기 못이 왜 달려있습니까?"
그 남자는 놀라서 대답했다. "무슨 못 말이요?"
"예, 거기 있는 못 말입니다.  당신 모자 위에 있는. . ."
그 사람은 모자를 벗어들어 보고 또 보았다. . . 그러나 못은 없었다.
성인은 친절하게 다시 말하였다.  "미안합니다.  그 모자를 당신 머리에 부착시키는 못이 굳게 박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에 당신이 늘 성당 앞을 지나가면서 모자를 벗지 않는 것이 아닌가요?"
그 남자는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는 성당 앞을 지나갈 때 모자 벗는 것을 잊지 않았다.


"꽃들아, 너희들은 행복하구나. . ."

우리는 복음서에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신심깊고 사랑에 찬 행동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베타니아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했던 행동이다.  
그녀는 "값비싼 향유가 든 알라베스터 병을 들고 예수님께 접근하여 그분께 향유를 부었다" (마테오 26,7).  거룩한 감실을 감미로운 향기로 둘러싸는 것은 우리가 항상 아름답고 향기로운 피조물, 꽃들에게 맡기는 임무이다.

성 알퐁소 마리아 드 리구오리는 향기로 감실을 에워싸고 오로지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들을 전부 바치고 있는 꽃들에 대한 자신의 기쁨과 부러움에 대하여 노래하였다. 
"꽃들아, 너희는 행복하구나.  밤과 낮 항상 나의 예수님 곁에 머물며, 너희 삶이 다할 떄까지 떠나지 않으니 너희는 항상 그분과 함께 지낸 것이 되겠구나!"  그리고 성인은 감실 주위를 꽃으로 꾸미는 데 있어서 누구 못지않게 열심하였다.

토리노의 대주교가 하루는 "천주 섭리의 작은 집"에 있는 성당을 방문하였는데, 제대가 꽃으로 장식되었고 향기를 뿜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성 요셉 꼬똘렝고에게 물었다.
"오늘 무슨 축일입니까?  성인은 대답했다.  "오늘 무슨 특별한 축일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 성당 안에서는 항상 축일입니다."

성 프란시스 디 제로니모는 제대를 위한 꽃을 키우는 임무를 맡아있었는데, 예수님께 드릴 꽃이 없는 날이 없도록 어떤 때에는 기적적으로 꽃들이 자라나 피기도 하였다.

"예수님을 위한 꽃" - 이 얼마나 아름다움 풍습인가!  예수님께 사랑을 표시하는 이 풍습을 잊지 말자.  약간의 비용은 들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백배로" 갚아주실 것이다.  그리고 제대 위에 놓은 꽃들이 그들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써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그분과 함께 있음을 표현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 풍습에 관하여 더 많은 의미가 있다.  성 아오스딩은 그가 살던 시대의 경건한 풍습에 대하여 말해준다.  미사 성제가 끝난 후 신자들은 제대에 놓여있던 꽃들을 얻으려고 경쟁을 하였다.  그들은 그 꽃들을 집으로 가져가서 귀중하게 꽂아놓았다.  왜냐 하면 그 꽃들은 미사 성제 동안 제대 위에서 예수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녀 제인 프란체스 드 샹딸도 예수님께 신선한 꽃들을 가져오는데 지극히 열심하였다.  그리고 감실 옆의 그 꽃들이 시들기 시작하면 성녀는 그 꽃들을 자기 방으로 가져가서 십자 고상 밑에다 놓아두었다.  누가 사랑할 때 어떻게 하는지를 보라!  우리도 그들을 배우고 그들처럼 하자.

(성체 성사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






베드로의 배반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나의 제자들이 나를 버렸다. 호기심에 이끌려 따라 온 베드로는 그 집 하인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나를 모른체하였다. 내 주변에는 사악한 재판관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거짓말로 그들에게 아부하며 거짓 증언하는 인간들 뿐이었다. 나를 선동자, 율법을 어긴 자, 거짓 예언자라고 매도하는 인간들, 나를 무함(誣陷)하는 소리에 충동을 받아, 나를 향해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붓는 인간들 뿐이었다.

나와 함께 생활하면서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내가 행한 기적을 증언해야 할 나의 사도들과 나의 제자들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나를 사랑하고 증거해야 할 이들, 나를 보호해 주어야 할 이들은 사라지고 나 홀로 남았다.  내 둘레에는 나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이리떼와 같은 병사들과 군중들 뿐 이로구나. 나를 못살게 굴며 고문하는 것도 모자라 내 얼굴을 때리고 얼굴에 더러운 침을 뱉었으며, 나를 조롱 삼아 휘돌리기까지 한다.

내가 성교회(聖敎會)의 우두머리로 내세운 베드로, 조금 전에는 죽어도 나를 따르겠다고 호언 장담하던 베드로가 나를 증거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나를 모른다고 대답하다니....
위협적으로 심문을 받아 이런 대답을 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사람들이 단정적으로 예수의 제자라고 몰아세우자,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고 잡아떼다니....

베드로야! 너의 스승인 나를 모른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가슴아픈데, 맹세까지 한단 말이냐?

선택받은 영혼들아!
세상이 나에게 대들며 나의 뜻을 거슬러 일어날 때, 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너희들에게까지 내가 배반 당하고 버림받게 되면, 나의 마음이 얼마나 쓰릴지 생각해 보았느냐?

내가 베드로에게 물었던 것처럼 너희들에게도 묻겠다. "내가 너희에게 베풀어준 사랑을 어디에 두었느냐? 너희 자신을 나와 함께 묶을 사랑 줄은 어디에 있느냐? 죽음이 닥쳐도 나를 보호하겠다고 거듭해서 다짐했던 그 약속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너희가 허약해서 마음이 흔들려 나를 버리고 배반했다면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들을 붙잡아 주겠다. 너희들은 베드로처럼 위험을 자초하지 말아라. 죄를 범할 위험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베드로가 호기심 때문에 끌려가는 나를 따라왔기 때문에, 부지 불식 간에 나를 배반하게 된 것이다. 끝까지 나와 함께 하려고 따라 왔다면, 그런 죄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포도밭에서 일하는 영혼들아!
너희들이 여기서 일하게 된 동기가 육신의 재미나, 단순한 호기심에 있었다면 그 재미나 호기심을 과감히 지워 버려라. 그렇지 않고 나의 영광과 영혼 구원의 열성 때문이라면,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내 포도밭 일에 전심 전력하여라. 나는 끝까지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 스스로 위험한 난관을 돌파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주겠다.

병사들이 다시 나를 끌고갈 때, 나는 군중 속에 있는 베드로를 바라보았다. 베드로는 나를 쳐다보더니,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고 슬피 울고 있었다. 내가 베드로를 바라보았듯이, 지금도 죄에 떨어진 영혼들을 바라본다.
베드로가 나를 바라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듯이, 나를 바라보며 참회하기를 바라건만, 이들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구나. 이 죄인들과 눈길을 마주치려해도, 이들의 눈동자는 허공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이런 영혼은 눈이 있어도 나를 보지 못한다. 소리쳐 불러도 대답조차 하지 않는다. 정신 차리라고 아픔을 주어도,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않는구나!

사랑하는 영혼들아!
너희들이 하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너희 존재는 이성이 없는 빈 껍데기, 허리가 굽어 땅만 바라보는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만다. 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너희들이 그리워하는 본향(本鄕)에 계시는 하느님을 찾아라. 그러면 언제나 너희들을 내려보시는 그 분의 눈과 마주칠 수 있을 것이며, 그 분의 눈에서 영원한 평화의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우리 문제에 깔린 하느님의 뜻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우리를 쓰러뜨리거나 진보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겪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선을 이루시는 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 문제들이 가져 온 유익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단지 부딪힌 문제들에 대해서 만 화를 낼뿐이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삶을 세우기 위해 문제들을 어떻게 이용하시는 지 다섯가지 대답이 있다.


1.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신다

때때로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신다. 문제들은 종종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고, 방향 전환의 계기를 제공한다.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 당신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고 계실 것이다.
"깊은 상처는 악을 씻고 매질은 배 속 깊은 곳을 씻는다." (잠언 20,30)


2.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관찰하신다

사람들은 차봉지와 같다. 만약 당신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지 알고 싶다면, 그냥 뜨거운 물에 넣어보면 된다. 하느님께서 문제를 통해 당신의 신앙을 시험하신 적이 있는가? 그때 당신은 어떤 모습을 드러내었는가?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야고보 1,2-3)


3.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교정하신다

어떤 교훈은 고통과 실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어린 자녀가 뜨거운 난로는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도 실제로 만져보고 데인 후에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로 우리는 건강, 돈, 인간관계 등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는다.
"제가 고통을 겪은 것은 좋은 일이니 당신의 법령을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이 좋습니다. 수천의 금과 은보다 좋습니다." (시편 119,71-72)


4.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만약 어떤 문제가 좀더 심각한 다른 문제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막아 준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될 수 있다. 지난 해에 한 친구는 그의 사장이 시킨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그의 실직은 분명히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일년 후에 비리를 통해 회사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에는, 그 일로 인해서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50,20)


5.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신다

문제들이 올바로 대처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더욱 아름답게 다듬어준다. 하느님은 당신의 안락보다는 당신의 인생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로마 5,3-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그분과 함께 모든 일을 행할 때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다.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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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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